마속

군인, 정치가, 장수

num_of_likes 61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32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군인, 정치가, 장수
report
Edit

촉한의 뛰어난 지략가이자 장군. 제갈량의 깊은 신임을 얻어 남중 정벌 시 중요한 조언으로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제1차 북벌 중 가정 전투에서 독단적 판단으로 치명적인 패배를 기록했다. 이 책임으로 제갈량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법의 엄정함을 위해 아끼는 이를 처벌한다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유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마속을 중용했던 비극적 결말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0

마속은 190년 양양군 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225

[남중 평정 조언]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할 때, 마속은 단순히 무력으로 누르기보다 맹획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조언 덕분에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남방은 평안을 유지했다.

마속은 유비가 자신을 중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제갈량의 깊은 신임을 얻어 참군으로 발탁되었다. 225년, 제갈량이 남중 정벌에 나설 때, 마속은 수십 리를 배웅하며 '멀고 험함을 믿고 불복한 이들을 일시적인 무력으로 누르면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이니,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핵심적인 조언을 했다. 제갈량은 이 조언대로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며 민심을 얻었고, 이 덕분에 제갈량이 사망할 때까지 남방 지역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228

[북벌 선봉장 발탁]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여러 장수들이 위연이나 오의를 선봉장으로 추천했으나, 제갈량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에게 대군 통솔을 맡겼다.

228년, 제갈량은 제1차 북벌을 개시하며 위나라의 주력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때 대다수 장수들은 경험 많고 노련한 위연이나 오의가 선봉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갈량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속에게 대군을 통솔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이는 제갈량이 마속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비극적인 가정 전투의 서막이 되었다.

[가정 전투 대패]

가정에서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산 위에 진을 친 마속은 왕평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했다.

결국 위나라 장수 장합에게 보급로를 차단당하고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며 달아났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선봉을 맡은 마속은 군량과 물을 확보하기 쉬운 요충지인 가정에서 진을 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시와는 다르게 산 위에 진지를 구축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부장 왕평이 여러 차례 물을 확보하고 평지에 진을 칠 것을 간언했으나, 마속은 이를 무시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위나라 장수 장합은 마속의 군대가 물을 길어 나르는 길을 완전히 끊고 공격해왔고, 마속의 부대는 크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 패배는 제갈량의 북벌 계획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읍참마속]

가정 전투 대패의 책임을 물어 마속은 제갈량의 눈물 속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가정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해 제갈량은 북벌을 중단하고 한중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마속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몇몇 신하들이 구명을 요청했으나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39세의 나이로 마속은 처형되었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즉,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다'라는 고사성어가 이 사건에서 유래했으며, 제갈량이 법의 엄정함을 위해 아끼는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상징이 되었다. 제갈량은 마속의 자식들을 돌봐주며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