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책

군웅, 장군, 추존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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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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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 장군, 추존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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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의 장남이자 손권의 형으로 어린 나이에도 강동을 정벌하여 오나라 기반을 닦음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손랑이라 불렸으며 탁월한 카리스마와 무력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강동의 패자로 군림 경솔하고 성급한 성격 탓에 돌연한 죽음을 맞이했으나 그의 업적은 후일 동오 건국의 주춧돌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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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손책 탄생]

후한 말의 군웅이자 동오의 추존 군주 손책이 양주 오군 부춘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부이며, 부친 손견과 모친 오부인 사이의 장남이다.

그는 훗날 '소패왕'이라 불리며 강동을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192

[손견 사망 후 독립 준비]

아버지 손견이 사망하자,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여강군 서(舒)에 살며 주유와 벗이 되었다.

사대부들을 모아 인심을 얻고 힘을 길렀다.

이후 외숙 오경에게 나아가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아 원술을 따르게 된다.

《삼국지》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손견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여강군 서에 살면서 주유와 함께 벗이 되었고, 사대부를 모아 합하여 장강과 회하 사이의 인심을 얻었다. 손견 사후 곡아에 장사지내고 강을 건너 광릉군 강도현에 살았다. 서주목 도겸이 달가워 하지 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곡아로 옮기고, 외숙 단양태수 오경에게 나아가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았다.

194

[원술과의 불화와 독립]

원술을 따르며 손견의 옛 부곡을 돌려받고 회의교위로 임명되는 등 중용되었다.

원술은 손책 같은 자식이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며 탄식했으나, 여강 태수직 약속을 두 번이나 어겨 손책은 크게 실망하고 독립을 결심한다.

원술은 처음에는 손책을 구강태수로 임명한다고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진기로 바꾸었다. 이후 여강태수 육강이 원술의 군량요구를 묵살하자 원술은 육강을 토벌하고 그 땅을 차지하기로 결정하고 손책에게 육강을 치면 여강태수를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손책이 육강을 무찌르자, 유훈으로 여강태수를 삼았으므로 손책은 실망하여 이대로 밑에 있다가는 사나이로써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독립하기로 마음먹는다.

[강동 정벌의 서막]

원술의 협조를 받아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역양에 도착하자 5~6천 명으로 불어났다.

오경, 손분과 협력하여 횡강진의 번능과 우미를, 당리구의 장영까지 격파하며 강동 정벌의 서막을 올렸다.

원술은 혜구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손분과 오경에게 병사를 주어 유요를 정벌하게 했으나, 해가 지나도록 이기지 못했다. 손책은 원술을 설득하여 오경 등을 도와 강동을 평정시키기를 구했고, 원술은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로 임명하고 진구장군을 대리하게 했다. 손책은 병사 천여 명을 거느렸으며, 역양에 도착하자 그 숫자는 5, 6천여 명이 되었다. 손책은 오경,손분과 협력하여 횡강진의 번능과 우미를 무찔렀다. 그리고 서곤 어머니의 계책을 받아들여 임시로 떼와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 당리구의 장영까지 격파했다. 이때는 아직 흥평 원년이었다.

195

[강동 정벌 성공]

우저와 말릉성을 공격하여 유요, 설례, 착융을 무찔렀다.

특히 착융과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위기에 처했으나, 기만술로 적을 유인하여 대승을 거뒀다.

이어서 회계태수 왕랑을 격파하고 회계를 평정했다.

최종적으로 허공과 엄백호까지 제압하며 강동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이듬해(흥평 2년, 195년)에는 우저의 유요 진영을 공격하여 양곡과 군수품을 얻고, 말릉성을 공격했다. 당시 설례와 착융이 서로 협력하여 설례가 성을 지키고 착융은 남쪽에 주둔했다. 손책은 먼저 착융을 공격하여 무찔렀고, 착융은 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한데 설례가 갑자기 번능, 우미와 협력하여 성을 버리고 나와 우저를 습격하여 재점령했다. 손책은 번능을 공격하여 무리 1만 명을 사로잡고, 다시 착융을 공격하다가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이에 잠시 물러났는데, 어떤 자가 “손책이 죽었다.”고 하니 착융이 기뻐하며 부장 우자(于慈)로 하여금 추격하였다. 그러나 함정이었고 복병에게 기습을 당하여 1천 명이 죽었다. 손책은 착융에게 자신이 멀쩡히 살아 있음을 과시하였고, 착융은 두려워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손책은 착융의 주둔지가 견고하다고 여겨 내버려두고 해릉에서 유요의 별장을 격파하고, 호숙과 강승을 항복시켰다. 마침내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 팽택에 주둔하다가 예장으로 옮겼다. 손책은 주유에게 단양을 지키게 하고, 주치에게는 오군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회계를 공격했다. 회계태수 왕랑은 손책의 침략에 맞서 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맞서 싸워, 고릉에서 손책을 저지했다. 손책은 여러 차례 강을 건너 싸웠으나 이길 수 없었다. 숙부 손정이 왕랑을 직접 공격할 것이 아니라 요충지 사독을 먼저 점거하도록 진언하자, 손책은 이를 따라 왕랑을 속이고 사독 길로 나아가 고천둔을 습격했다. 왕랑은 크게 놀라 옛 단양태수 주흔 등을 파견했으나, 손책은 이를 무찌르고 주흔을 베었다. 왕랑은 패배하여 바다에서 표류하다 동야까지 이르렀는데, 손책은 동야까지 왕랑을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손책은 왕랑을 문책하여 쫓아내고, 회계를 평정했다. 회계를 평정한 후 손책은 오군으로 왔다. 이미 주치는 오군태수 허공을 격파했으며, 허공은 오군의 호족 엄백호에게 의탁했다. 손책은 오정 사람 추타(騶他), 전동(錢銅), 가흥 사람이며 전(前) 합포태수 왕성(王晟) 등의 무리를 모두 격파했다. 아버지와 친교가 있던 왕성의 일족들을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주살했다. 그리고 엄백호를 공격했다. 엄백호는 아우 엄여에게 화의를 요청하게 했는데, 손책은 창으로 엄여를 죽였다. 이를 들은 엄백호는 두려워하여 허소에게로 달아났고, 손책은 허소의 의로움을 존중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198

[조조와 협력관계 구축]

강동을 평정한 후, 칭제한 원술과 결별을 선언하며 꾸짖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조조는 손책을 토역장군으로 임명하고 오후로 봉했다.

이로써 손책은 조조와 동맹 관계를 맺고 그의 천거로 정식 작위를 받으며 세력을 공고히 했다.

손책은 강동을 평정하고, 지방관을 모조리 바꾸어 자신을 회계태수, 주치를 오군태수, 오경을 단양태수,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았다. 또 예장군을 나누어 여릉군을 신설하고, 손보를 여릉태수로 삼았다. 이 때 원술이 칭제했기 때문에 손책은 원술과 대립하였고,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원윤을 서곤을 파견해 쫓아냈다. 이후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손책은 원술을 꾸짖는 편지를 보내고 절교했다. 건안 3년(198년), 조조는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으로 임명하고 오후로 봉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기도위를 주고 오후로 삼았으며 회계태수를 겸하게 했다. 손책은 사신을 보내 방물을 진헌하되, 건안 원년(196년)에 올린 것의 배가 되도록 했다. 건안 3년(198년) 조조와 원술과의 교전 중 조조를 도와 그의 천거로 토역장군(討逆將軍)의 칭호와 함께 오후(吳侯)의 작위를 받았다.

199

[유훈과 황조 세력 와해]

원술 사망 후 잔당을 규합한 유훈을 거짓 동맹으로 꾀어 상료를 치게 하고, 그 사이 비어있는 환성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황조의 원군까지 격파하고, 이어서 황조 본진을 공격하여 유표의 조카들까지 무찔렀다.

이로써 강동 주변의 위협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건안 4년(199년) 원술이 죽자 유훈이 원술의 잔당을 규합하고 유엽이 쳐 얻은 정보의 세력까지 얻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손책은 유훈을 꾀어 거짓으로 동맹을 맺고, 상료를 치도록 권했다. 식량이 부족한 유훈은 이 꾀임에 넘어갔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은 이때 황조를 토벌하러 가다, 유훈이 상료를 쳐 이기지 못했음을 듣고 빈 유훈의 거점 환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원술의 유족과 유훈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유훈은 팽택으로 회군하다 손분과 손보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 기수로 가서 황조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황조는 아들 황역에게 수군 5천을 파견하여 유훈을 구원하게 했으나, 손책은 황역의 원군이 오기 전에 유훈을 격파해 황역은 달아났다. 유훈은 조조에게로 달아났고, 손책은 황조를 공격하였다. 유표의 조카 유호(劉虎)와 한희(韓晞)가 유표에게서 파견되어 황조의 선봉을 맡았는데, 손책은 이들을 무찔렀다. 황조와 유훈을 격파하고 돌아오던 중 예장을 지나쳤다. 이미 양주자사 유요는 죽고 없으며, 예장태수 화흠은 겨우 스스로 지키고 있을 뿐이고, 단양 사람 동지(僮芝)가 예장군의 일부를 점거하고 스스로 여릉태수를 칭하고 있었으며 파양 지방도 화흠의 통치를 따르지 않았다. 손책은 예장태수 화흠을 상객으로 대우하고, 종형 손분으로 예장태수를 삼고 손분의 아우 손보까지 딸려 예장을 위임했으며, 손분 형제가 예장을 평정하자 손보를 옛 동지가 가지고 있던 여릉태수로 삼았다. 한편 유요의 유족들을 거두었다. 유요의 맏아들 유기(劉基)는 오나라의 중신이 되어, 후에 대사농이 되었다.

200

[허공 살해와 피습]

조조에게 대사마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해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후 헌제에게 가던 오군태수 허공의 사신을 붙잡아 '손책은 항우에 비길 만한 효웅'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발견하고 허공을 살해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허공의 식객에게 사냥 중 기습당해 중상을 입었다.

손책이 조조에게 대사마를 요구하였는데 조조가 거절하여, 두 세력의 사이는 냉소적으로 변하였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許)를 기습, 헌제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헌제에게 가던 오군태수 허공의 사신을 붙잡았다. '손책은 항우와 비길만 한 효웅으로 마땅히 중히 여겨 조서를 내려서 경읍으로 불러와야 하는데, 만약 외진에 그대로 두면 두고두고 세상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갖고 가던 사신이 손책에게 잡힌 것인데 손책의 불같은 성격에 허공이 용서받을 리가 없었다. 결국 손책은 허공을 거짓으로 청하여 만나고 무사를 시켜 허공을 교살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허공의 식객 허소(許昭)는 어느 날 손책이 홀로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했으나 손책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때 손책은 기습을 당한 탓에 중상을 당했고 생명이 위독했다. 뒤늦게 달려온 정보(程普)가 손책을 진중으로 데리고 가 치료하도록 조치를 취해서 손책은 일단 생명은 건졌다.

[26세 젊은 나이로 사망]

허공 식객의 피습으로 입은 중상으로 생명이 위독해졌다.

아우 손권에게 강동 방어를 당부하며,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이 여전한지 확인하다 상처가 터져 결국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장사환왕으로 추증되었다.

상처를 입은 후 손권을 불러 이르길, "강동의 병력을 이끌어 결단을 내려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는 것은 너가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너만 못하다."고 했다. 이후 밤이 되자 죽었고, 사망 당시 손책은 불과 26세였다. 사망 경위에 대하여 삼국지 배송지주에서 인용된 《오력》에 따르면, 상처를 입어 요양 중인 손책이 거울을 가져다 비춰보고 좌우에 말하길 “내 얼굴이 이와 같은데, 아직도 다시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 했다. 책상을 치고 크게 분격하니, 상처가 모두 파열되어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 배송지주에서 인용된 《수신기》에 따르면, 손책이 우길을 죽이고 난 이후 우길이 주변에 있는 듯이 바라보니 손책이 점차 평소의 모습을 잃게 되었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봤는데, 거울에 우길이 있는 것을 보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손책은 거울을 깨뜨리고 고함을 질렀고 이후 상처가 모두 터져 얼마 안되어 죽었다고 한다. 사후,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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