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고대 국가, 중국 왕조, 삼국 시대 국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22
유비가 후한의 정통성을 계승하며 세운 삼국시대 국가입니다. 수도는 성도였으며 제갈량의 지략과 북벌 시도가 유명합니다. 비록 끝내 한실 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한 황실의 마지막 후예가 세운 나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1
[유비, 촉한 건국]
후한의 실권을 잡은 조비가 헌제를 폐위하고 위나라를 건국하자, 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한'으로 선포했습니다.
이는 후한 멸망에 대한 저항이자, 한나라의 맥을 잇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220년 조비가 후한 헌제를 폐위시키고 위를 건국하자, 유비는 221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 연호를 '장무'로 정했습니다. 수도는 성도였습니다. 명분과 정통성을 중요시했던 당시 시대에 유비의 이러한 행보는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222
[이릉대전 대패]
의동생 관우의 죽음에 분노한 유비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육손의 지략에 의해 이릉에서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이 대패는 촉한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고, 유비는 결국 충격 속에 병사하게 됩니다.
222년에 발발한 이릉대전은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육손의 화공에 대패한 전투입니다. 촉한의 정예 병력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이 충격으로 유비는 백제성에서 병을 얻어 223년 사망했습니다. 이는 삼국정립의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225
[제갈량의 남만 정벌]
이릉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촉한을 안정시키기 위해 승상 제갈량은 남쪽의 이민족(남만)을 토벌했습니다.
맹획을 일곱 번이나 잡았다가 놓아주는 '칠종칠금'의 전술로 그를 감복시켜 항복을 받아냈고, 이로써 촉한의 남방은 안정되어 북벌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225년 제갈량은 유비 사후 불안정했던 촉한의 남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남만 정벌에 나섰습니다. 단순히 무력으로 정복하는 대신,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며 민심을 얻는 방식으로 남만을 평정하여 후방의 우환을 제거하고 북벌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27
[제갈량의 북벌 시작]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위나라를 정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려 결연한 의지를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촉한의 국력만 소모시켰습니다.
227년부터 제갈량은 생애 마지막까지 한실 부흥을 목표로 수차례 북벌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처음 북벌에 앞서 올린 '출사표'는 그의 충정을 보여주는 명문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비록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은 후대까지 회자되며 촉한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263
[촉한의 멸망]
제갈량 사후 촉한은 황호와 같은 간신들의 전횡과 거듭된 북벌 실패로 국력이 점차 약해지며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결국 263년, 위나라의 대규모 침공으로 수도 성도가 함락되며 후주 유선이 항복하며 촉한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제갈량 사후 유선 통치 말기에는 황호 등의 간신이 국정을 농단하여 정치 부패가 심화되고 국력이 쇠약해졌습니다. 263년, 위나라의 종회와 등애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촉한을 침공, 성도를 함락시키자 후주 유선이 항복하며 촉한은 건국 42년 만에 멸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