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견
군인, 군웅, 황제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18
중국 후한 말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며 무용을 떨친 군웅. 오나라를 건국한 손권의 아버지로 황건적의 난 진압부터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까지 굵직한 전장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동탁 토벌전에서 보여준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황폐해진 낙양에서 전설의 전국옥새를 습득하기도 했다. 성품이 거칠고 조급했으나 그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치며 후한 말 영웅호걸 중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사후 아들 손권에 의해 동오의 추존황제(시조 무열황제)가 되었다.
156
[오군 부춘현에서 출생]
오군 부춘현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문대입니다. 후일 그의 차남 손권에 의해 동오의 황제로 추존되며 묘호는 시조, 시호는 무열황제로 불리게 됩니다.
손견은 156년경 양주 오군 부춘현(현 저장성 항주시 부양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문대입니다. 그는 후한 말 혼란기에 활약한 군웅으로, 훗날 그의 차남 손권에 의해 동오의 황제로 추존되며 시조 무열황제라는 묘호와 시호를 받게 됩니다.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156년으로 추정됩니다.
172
[허창의 난 진압 및 승진]
회계에서 허창이 일으킨 만 명 규모의 난에 군사마로 종군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염독승, 우이승, 하비승 등을 역임하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172년, 회계 구장현에서 허창이 약 만 명을 모아 스스로 양명황제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손견은 군사마로서 난 진압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염독승이 되었습니다. 이후 우이승과 하비승을 차례로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해적 토벌과 관리 등용]
17세에 해적들을 지혜롭게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지방 관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의 첫 무공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사건입니다.
손견은 17세에 아버지와 배를 타고 가던 중 해적들이 상인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아버지가 만류했음에도 홀로 칼을 들고 강가에 올라 병사들을 지휘하는 척 연기하여 해적들을 도망치게 하고, 한 명을 베어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유명해져 현의 관리가 되면서 그의 첫 무공을 세웠습니다.
184
[황건적의 난 진압 참여]
황건적의 난에 중랑장 주준 밑에서 좌군사마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별부사마로 승진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그의 군사적 재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84년, 전국을 휩쓴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손견은 중랑장 주준의 휘하에서 좌군사마로 참전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별부사마 직위를 제수받았습니다.
185
[동탁 처형 주장]
장온의 호출에 늦고 불손한 태도를 보인 동탁을 군율에 따라 처형할 것을 장온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동탁과의 첫 대립이자 손견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양주 토벌군 종군 중, 장온이 호출한 파로장군 동탁이 늦게 오고 태도까지 불손하게 굴었습니다. 손견은 군율에 따라 동탁을 참수해야 한다고 장온에게 강력히 진언했으나, 동탁이 당시 농과 촉 지역에서 큰 위세를 떨치고 있었기에 장온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양주 토벌군 참군사 임명]
양주에서 변장, 한수 등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러 가는 거기장군 장온의 참군사로 임명되어 종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탁과 처음으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185년 8월, 양주에서 변장과 한수 등이 난을 일으키자, 거기장군 장온이 이들을 토벌하러 나섰습니다. 손견은 장온의 참군사로 임명되어 토벌군에 합류했습니다. 이 시기에 동탁의 불손한 태도를 지적하며 그의 처형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양주 토벌전 고전 및 퇴각]
미양 전투에서 고전하며 병력과 인수까지 잃었습니다. 반군 격파 후 보급로 차단을 제안했으나 주신의 거부로 실패, 오히려 보급선이 끊겨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장온의 군대는 미양에서 변장과 한수의 반군과 싸우며 고전을 면치 못했고, 손견 또한 1천 명의 병력과 인수까지 잃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동탁이 반군을 크게 격파하자, 손견은 달아나는 반군의 보급로를 끊자고 제안했으나, 주신이 이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반군이 역으로 토벌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자 주신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7
[장사태수 임명 및 반란 진압]
의랑으로 있다가 장사, 영릉, 계양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장사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지방의 안정에 기여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양주 토벌전에서 돌아온 손견은 의랑 직위를 얻었습니다. 187년, 장사군에서 구성이, 영릉군과 계양군에서 주조, 곽석, 관곡 등이 연이어 난을 일으키자, 손견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장사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의춘현장 구원 및 오정후 봉작]
주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춘현장 구원 요청에 출병하여 반란군을 평정했습니다. 이 공으로 오정후에 봉해지며 그의 군공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의춘현장이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구원을 요청하자, 주부가 주군의 경계를 넘는 것은 죄가 된다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손견은 "나는 무공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니, 다른 군국을 돕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는가?"라며 출병하여 모든 반란을 평정했습니다. 이 공으로 오정후에 봉해졌습니다.
190
[원술 귀부 및 파로장군 겸 예주자사 임명]
수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원술에게 귀부하여, 원술의 표로 파로장군과 예주자사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원술 휘하의 주요 장군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낙양 진군 중 손견은 수만 명에 이르는 자신의 군세를 이끌고 동탁을 피해 남양에 주둔하던 후장군 원술에게 귀부했습니다. 원술은 이에 손견에게 표를 올려 파로장군과 예주자사 직위를 겸하도록 했습니다.
[서영에게 대패 및 조무의 희생]
노양에서 군대를 조련하던 중 동탁의 군대를 물리쳤으나, 양으로 이동 후 서영의 공격에 대패하여 조무의 희생으로 겨우 탈출했습니다. 이는 손견에게 큰 패배이자 충성스러운 부하의 희생이었습니다.
손견은 노양에서 군대를 조련하며 동탁의 수만 명 병력에 맞설 철저한 방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양으로 옮겼다가 서영의 공격에 크게 깨져 수십 기병만 이끌고 탈출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손견은 자신의 붉은 융단 두건을 조무에게 씌워 추격을 따돌리게 하고 자신은 무사히 도주했으나, 조무는 동탁군에게 붙잡혀 희생되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 참여 및 왕예, 장자 살해]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이에 호응하여 낙양으로 진군했습니다. 진군 중 연합군 동료인 형주자사 왕예와 남양태수 장자를 살해하는 과감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190년 1월,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손견은 이에 호응하여 낙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진군 도중 그는 자신을 가볍게 대했던 형주자사 왕예를 "모르는 것이 죄"라 답하며 살해했고, 보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던 남양태수 장자를 유인하여 살해하는 과단성을 보였습니다.
191
[원소와의 대립 및 예주 방어]
반동탁 연합군 해체 후 원술 편에 서서 원소-유표 연합군과 대립했습니다. 원소가 보낸 주씨 삼형제의 예주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이 분열되면서 원술과 공손찬이 동맹을 맺고, 원소는 형주자사 유표와 손잡아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손견은 원술의 편에 서서, 원소가 주흔, 주앙, 주우 형제를 시켜 자신을 공격하고 예주를 빼앗으려 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원술의 보급 중단 해결]
낙양 점령 후 야심을 품을까 의심한 원술이 보급을 중단하자, 직접 찾아가 계획을 설명하며 사심이 없음을 밝혀 의심을 풀게 했습니다. 이로써 원술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양인 전투 후 손견이 낙양으로 진격하자, 원술은 손견이 낙양을 점령한 뒤 다른 야심을 품을까 의심하여 보급을 중단했습니다. 이에 손견은 양인에서 노양까지 100여 리를 밤새 달려가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사심이 없음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원술의 의심을 풀었습니다.
[동탁군 격퇴, 낙양 입성 및 전국옥새 획득]
동탁의 화친 제의를 거절하고 대곡에서 동탁을, 낙양에서 여포를 격파하며 낙양에 입성했습니다. 훼손된 종묘를 바로 세웠고, 이때 전국옥새를 습득했습니다. 보급 문제로 노양으로 회군했습니다.
동탁은 손견의 진격에 부담을 느껴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그의 아들들에게 자사나 태수 직위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손견은 "동탁의 삼족을 멸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며 강경하게 거절하고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낙양 90리 앞 대곡에서 직접 출진한 동탁을 패주시키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까지 물리쳤습니다. 마침내 낙양에 입성하여 훼손된 종묘와 여러 능을 바로 세웠고, 이 과정에서 전국옥새를 습득했으나 이는 후에 원술에게 넘어갔습니다. 낙양이 동탁에 의해 심하게 황폐해져 보급이 어려워지자 곧 노양으로 회군했습니다.
[양인 전투 승리 및 화웅 참수]
양인에서 군을 수습하고 동탁이 보낸 호진과 여포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동탁군의 도독 화웅 등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며 그의 군사적 역량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91년 2월, 손견은 양인에서 흩어진 군대를 다시 수습했습니다. 동탁은 호진과 여포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손견을 공격하게 했으나, 호진과 여포가 서로 반목하는 틈을 타 손견은 이들을 격파하고 동탁군의 도독 화웅 등을 참수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2
[양양 전투 중 전사]
원술의 명으로 유표를 공격하던 중, 양양을 포위하고 황조와 여공을 추격하다가 화살과 돌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환계가 유표에게 청하여 되찾아왔습니다.
원술의 명령을 받아 유표를 공격하던 손견은 번성과 등성 사이에서 요격 나온 황조를 무찌르고 한수를 건넜습니다. 유표의 본거지인 양양을 포위한 후, 현산으로 달아난 황조와 여공을 추격하던 중 매복에 걸려 화살과 돌 세례를 맞고 전사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찍이 손견이 효렴으로 추천했던 환계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청하여 받아왔습니다. 손견의 사망 시기는 191년, 192년, 193년 등 여러 설이 있으나, 192년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곡아 안장 및 무열황제로 추존]
전사 후 조카 손분에 의해 곡아에 안장되었으며, 후일 그의 차남 손권에 의해 동오의 시조 무열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들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양양 전투에서 전사한 손견의 시신은 그를 따르던 조카 손분이 영구하여 곡아(현 장쑤성 단양시)에 안장했습니다. 이후 그의 차남 손권이 오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면서, 손견은 동오의 시조 무열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