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군벌, 정치인, 문인, 추존황제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00:19:53
난세 후한 말 비범한 재능으로 중국 대륙의 기틀을 다진 조조! 위나라 건국의 초석을 놓은 그는 군사 정치 문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습니다. 신분 불문 능력 위주 인재 등용 둔전제 시행으로 경제 재건까지. 하지만 서주 대학살 황실 핍박 등 잔혹한 행보로 난세의 간웅이자 학살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습니다. 역사 속 가장 복합적이고 흥미로운 영웅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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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 출생]
후한 예주 패국 초현에서 환관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이름은 길리, 소자는 아만이었으며, 유방의 심복 조참의 후손이라는 설과 하후씨라는 설이 동시에 전해집니다.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고조 유방의 심복이자 재상을 지낸 조참의 후손인 조등의 양자로 조숭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후한서》〈조등전〉에는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어 위의 선양을 윤색하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조만전》의 일설에는 조숭이 하후씨이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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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 토벌]
30세에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기도위에 임명되어 영천에서 황건적을 토벌합니다.
이 공으로 제남의 상으로 승진, 강력한 법을 세워 뇌물에 물든 관리들을 파면하고 사이비 종교를 금지했습니다.
이후 동군 태수 임명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은거했습니다.
제남 상 재직 시,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하는 등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동군 태수 부임을 거부하고 사퇴한 후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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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의 난과 동탁]
영제 사후 대장군 하진과 원소가 환관 주살을 계획하자, 조조는 제후들을 부르지 않고 환관 우두머리만 처형할 것을 진언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환관들은 원소에게 주멸되는 십상시의 난이 발생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실권은 동탁에게 넘어가자, 조조는 동탁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습니다.
원소가 환관 주살을 위해 동탁 등 제후 소집을 계획할 때 조조는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하면 일이 탄로 나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과연 동탁이 도착하기 전 하진이 환관에게 주살되었고, 환관들도 원소에게 전멸당했습니다. 이후 진군교위였던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갔으나, 권력을 장악한 동탁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고 낙양 성을 탈출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 가담]
진류에 도착해 위자의 후원을 받아 군사를 모아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 분무장군을 맡았습니다.
동탁군의 강함에 연합군이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장막과 힘을 합쳐 형양에서 동탁군과 싸워 적장 서영의 부대를 물리치는 무훈을 세웠습니다.
이후 연합군이 유기적 협력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산조에 집결해 있던 제후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하자, 조조는 장막과 함께 형양에서 동탁군과 싸워 적장 서영의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산조로 돌아와 동탁 격파 전략을 제시했으나, 유력자들의 이합집산인 연합군에게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원소가 명망 높은 유우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던 계책은 유우 본인의 거절로 실패했고, 이후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해산되었습니다. 조조는 이 과정에서 황제를 구출하려 한 이미지로 인망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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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적 토벌 및 동군 태수]
원소와 제휴하여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하고, 원소의 대리 교서에 의해 동군 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중원 구출의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원소의 대리 교서(통감 등에서는 矯制라고 비난)에 의해 동군 태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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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목 취임과 청주병]
청주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하여 연주 자사 유대가 전사하자, 제북상 포신의 추대로 연주 목이 되었습니다.
황건적과 박전 끝에 승리하고, 백성 백만 구와 병사 30만을 흡수하여 ‘청주병’으로 불리는 정예 병력을 확보하며 강력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포신이 전사하고 조조 자신도 오른손에 화상을 입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상벌을 확언하며 적의 퇴로를 예상해 기병을 풀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황건적을 자기 세력으로 영입, 정예 병력을 '청주병'으로 편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반동탁 영수였던 원소에 대해 자신의 치소 연주에 할거하며 중원 구출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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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대학살]
도겸과의 분쟁 중 아버지 조숭이 살해당하자, 193년부터 194년에 걸쳐 2차례 서주를 침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 없이 도살하여 사수(泗水)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최대의 오점으로 평가됩니다.
원소와 원술의 분쟁이 재점화되자 조조는 원소와 연대하여 원술 연합군을 격파하고 원술이 양주로 도망가게 했습니다. 이 직후 도겸이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했고, 이때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당했습니다. 조조의 서주 침공으로 제갈근, 제갈량 형제, 노숙, 태사자 등 여러 인재들이 조조와 불구대천이 되었습니다. 이 학살은 이후 조조의 후방을 10년 가까이 위협하는 세력을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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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의 연주 반란 진압]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동안 친우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연주 목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복양에서 궁지에 몰리고 메뚜기 피해로 병력까지 타격을 입었으나,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흉년을 만나 병사 1천도 남지 않았으나, 여포의 구원군을 대파하고 치중을 획득하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메뚜기 피해로 갑병까지 타격을 입었으며, 둔전병을 데리고 다니던 중 흉년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가고 남은 병사는 고작 1천도 셀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수 병력으로 여포가 이끄는 진궁의 구원군 1만을 대타격하고 보급품을 획득했습니다. 손자병법 주석에 따르면 논밭 근처 제방에서 적을 도발하여 역격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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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제 옹립과 둔전제 시행]
헌제를 옹립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으로 옮겼으며, 대장군에 임명되어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조지, 한호의 건의로 둔전제를 시행하여 농민들을 모집, 허도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100만 석의 곡물을 확보하며 천하 장악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 시기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에게 도망쳐 오자, 참모 정욱은 유비가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며 제거를 진언했으나, 조조는 유비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며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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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전투와 전위의 죽음]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를 항복시켰으나, 장수가 배신하여 조조를 공격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충성스러운 부하 전위를 잃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조조는 조앙의 죽음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여 아내와 이혼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장수가 항복했을 때, 조조가 장수의 가족인 추 씨를 취하려다가 분노한 장수의 역습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들과 최측근을 잃는 등 조조의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이 큰 피해를 초래한 사례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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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 처형 및 장수 재항복]
장수와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훗날 관도 대전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장수와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며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이후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함으로써 오랜 적대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다음 해인 199년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항복시키는 등 중원에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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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반란 진압]
원술 토벌에 파견했던 유비가 서주 자사 차주를 습격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항복시켰습니다.
이로써 원소와의 천하 패권을 다투는 대결이 임박하게 됩니다.
유비는 조조에게 버림받은 처자식을 남기고 원소에게 도망쳤습니다. 이 사건은 조조와 원소 간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천하의 향방을 가를 관도 대전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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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 대전 승리]
천하 패권을 다투는 원소와의 관도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백마에서 원소의 맹장 안량과 문추를 죽이고, 유엽의 진언에 따라 투석기와 참호로 적에 대응하며 천재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군량 부족에 시달릴 때 순욱의 격려로 버텼습니다.
이후 허유의 투항으로 오소의 병참사령부를 5천 특공대와 함께 기습하여 모조리 불태워 형세를 역전시켰고, 원소군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이때 원소와 내통한 부하들의 편지를 불태워 용서하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이 전투로 조조는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부상했습니다.
조조는 군량과 병참 부족으로 마음이 약해져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순욱은 격려의 답장으로 그를 버티게 했습니다. 오소 기습전에서 원소의 본진 습격에 대비해 방비를 단단히 한 후 원소군으로 위장하여 잠입, 오소의 식량과 군수 물자들을 불살랐습니다. 몰수한 전리품 중 원소와 내통한 조조 부하들의 편지가 나오자, 그는 '원소의 대군이 강했을 때는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러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느냐?'며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소각하며 용서했습니다. 이후 원 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하며 북진을 계속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만리장성을 넘어 모돈을 죽였다는 내용은 나관중의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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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 대전 패배]
관도 대전 승리 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승상 지위에 오르며 후한 조정의 모든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형주의 유종을 항복시켰으나,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의 적벽 대전에서 패배하며 후퇴했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적벽 대전 전, 아들 조비가 화용도를 정비하고 오림에 도착하여 조조가 수월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주유는 적벽에서 조조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어 형주와 촉을 병합하려 했으나, 조비의 길 정비로 인해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파괴한 조조의 병선은 대부분 형주 병선이었고, 도망친 병사들은 유표의 수군이었습니다. 참전군 대부분이 역질에 감염되어 재정비를 위해 군을 물린 후 주유의 화공으로 연결된 선박이 화재를 입었다는 《후한기》의 서술이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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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령과 술지령 공포]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구현령'과 제위 찬탈 야망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술지령'을 공포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저축한 막대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기부하며 훌륭한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이는 고위 관직층 신하들의 기부로 이어졌습니다.
구현령과 술지령은 조조의 파격적인 인재 등용 철학과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특히 술지령은 제위 찬탈 의지를 부정하는 공개적인 선언으로, 당시 민심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전략적 행보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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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한수 반란 토벌]
마초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에 나섰습니다.
가후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를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했습니다.
이때 흙을 쌓아 올리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 성을 완성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습니다.
마초와 한수가 산과 요새에만 머무르며 견벽거수를 일관하자, 서황의 진언에 따라 진(津)을 건너는 척하며 대기하던 병사로 그들을 습격하여 대파했습니다. 이간책으로 적을 분열시키는 지략은 조조의 심리전 달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누규가 얼음 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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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장로 토벌]
오나라 정벌에 나섰고, 이듬해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했습니다.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지칠 줄 모르고 반란군을 상대로 매년 정벌을 완수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212년 오나라 정벌은 직접적인 큰 성과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조조의 지속적인 확장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213년 마초 재토벌과 215년 장로 항복은 조조가 북방과 서북방의 주요 위협을 제거하며 위나라 건국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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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공 책봉과 재산 기부]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으며, 조조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모두 기부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도왔습니다.
이 영향으로 고위 관직층 신하들도 재산을 기부하며 훌륭한 군주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위공 책봉은 조조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때 조조는 4현 3만 호 중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며 제위 찬탈 의지가 없음을 다시금 밝혔습니다. 동시에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여 민심을 얻고 사회적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 구축과 민심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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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왕 책봉]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훗날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지만, 조조는 황제가 되지 않고 주 문왕의 고사를 따르며 위왕으로서 붕거(추숭 전 훙거)했습니다.
위왕 책봉은 조조가 사실상 후한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황제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제위에 오르지 않았는데, 이는 주 문왕이 주나라 건국 전 서거했음에도 아들 무왕에 의해 추존된 고사를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지략과 동시에 후대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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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전투 패배와 동맹]
손권과 다시 싸웠고, 219년에는 유비와의 한중 전투에서 아끼던 장수 하후연을 잃고 물러나는 쓰라린 패배를 겪었습니다.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하자 사마의의 권유로 오나라 손권과 동맹을 맺고 관우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217년 손권과의 재전투는 큰 전과가 없었습니다. 219년 한중 전투는 조조가 직접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후연이라는 핵심 장수를 잃고 물러난 중요한 패배였습니다. 유비의 한중왕 즉위는 조조의 위상에 큰 도전이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사마의의 전략에 따라 손권과 손을 잡아 관우를 공격하게 한 것은 삼국 간의 역학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우금과 방덕을 보내 구원하게 했으나, 우금은 사로잡히고 방덕은 처형당하는 등 피해가 컸습니다. 결국 손권에게 형주를 공격하게 하여 번성의 어려움을 풀고 양양을 되찾았으며, 관우의 목을 받아 왕후의 예로 제사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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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서거]
낙양에서 66세의 나이로 서거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삼국시대의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아들 조비가 위왕에 즉위한 후 아버지 조조를 태조 무황제로 추존하여 위나라 건국의 정통성을 확립했습니다.
조조는 조비, 조식과 함께 '삼조'라 불리며 당대 최고 문인으로도 평가받았습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건시전을 지을 때 신목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기절했다든가, 배나무를 옮겨 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를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여러 일화가 전해집니다. 사후 아들 조비가 위왕에 즉위하자 무왕으로 추증했다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등극하여 위나라를 건국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로 추증했습니다. 정치, 군사뿐 아니라 문학적 업적도 뛰어나 악부를 공식 문학 장르로 정착시켰고, 《단가행》, 《구수수》 등 수십 편의 작품이 전해집니다. 특히 손자병법 전문에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한 군사학적 업적도 남겼습니다.
2009
[조조 고릉 발굴 소식]
중국 허난성 안양 현에서 동한 시대 무덤 발굴 중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릉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무덤은 지하 15m에 위치하며 금과 각종 보석 200여 점, 조조가 사용하던 창과 돌베개 등의 명문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60세 전후 남성 유골이 발견되어 조조의 사망 연령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무덤은 길이 39.5m, 넓이 9.8m, 전체 면적 740m²의 비교적 작은 규모였지만, 도굴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위무왕'이라 새겨진 두 비석의 진위 여부와 성급한 결론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의문 제기가 있었습니다.
2010
[조조 무덤 공식 인정]
중국 국가문물국이 조조 고릉 발굴의 학술적 검증 절차에 문제가 없었다며 조조 무덤인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발표라는 의심을 제기하며, 조조 무덤의 진위 논란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발굴 절차가 고고학계 규칙에 부합한다고 밝혔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발표가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이는 조조의 역사적 위상과 대중적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