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
중국, 후한 말, 정치인, 모사, 전략가, 충신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02
- 조조의 패업을 이끈 최고 공신이자 공동 설계자. - 어릴 적부터 왕을 보좌할 재주를 가졌다고 평가받은 선견지명의 모사. - 난세 속 백성들을 구했으나 한나라 유지를 위한 이상을 지키려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충신. - 삼국지 최고의 브레인 중 한 명으로 조조는 그를 제갈량과 주유에 견줄 만큼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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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 출생]
후한 말, 조조 휘하의 뛰어난 정치인이자 책사 순욱이 영천군 영음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자는 문약이며, 어려서부터 '왕좌의 재주'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순욱은 163년 예주 영천군 영음현(현재 허난성 쉬창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자는 문약(文若)입니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위장부이기도 하여 젊은 시절 하옹으로부터 '왕좌의 재주를 가졌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의 조부 순숙은 신군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고, 숙부 순상은 동탁에게 사공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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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당형의 딸과 혼인 결정]
순욱이 4살 때,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청류파 명문가의 자제가 환관 일족과 맺어지는 것에 대해 비판이 있었습니다.
순욱이 4살 때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청류파 명사였던 순씨의 자제가 환관 일족과 맺어지는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4살의 순욱이 혼인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당형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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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정권 시기, 조조와 첫 만남]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할 무렵,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기주목 한복을 찾아 피난했습니다. 이후 조조를 찾아가 '나의 자방이 왔구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합류했습니다.
중평 6년(189년), 동탁이 후한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때,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궁중의 종이, 먹, 붓 등의 관리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던 시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기주목 한복의 초빙을 받아 기주로 피난했습니다. 순욱이 기주에 도착할 때쯤 기주는 원소에게 빼앗겼습니다. 원소는 순욱을 크게 예우하였으나, 순욱은 원소가 대업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를 뿌리치고 조조에게로 갔습니다. 순욱을 맞이한 조조는 '나의 자방(전한의 건국공신 장량의 자)이 왔구나!'라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자신의 책사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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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의 연주 침공 저지]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순욱은 조조의 본거지 연주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자, 순욱은 여포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하후돈과 함께 조조 진영의 3개 성을 사수하여 조조군이 의지할 곳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흥평 1년(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 때, 순욱은 정욱과 더불어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의 수비를 담당했습니다.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자, 연주는 대부분 여포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순욱이 지키는 성에 '여포가 조조의 원군으로 왔으니 성문을 열어라'라는 사자가 왔는데, 순욱은 이미 모반을 간파하고 하후돈에게 사자를 보내 합류하고 조조 진영에 남겨진 3개의 성을 조조의 귀환 때까지 사수했습니다. 만약 이때 이 3개의 성도 빼앗겼다면 조조군은 완전히 의지할 곳 없는 군대가 되어 역사도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귀환한 조조는 근거지를 빼앗기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순욱은 연주를 확실히 다스리는 것이 먼저라고 조언하여 조조는 여포를 격파하고 연주를 평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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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제 영입, 조조의 정치적 입지 강화]
장안을 탈출한 헌제가 낙양으로 도망치자,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헌제를 허창으로 영입했습니다. 이로써 조조는 대장군이 되고 순욱은 시중, 상서령이 되었습니다. 이는 조조에게 도의적인 방패를 제공하여 이후 정치와 전략에서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건안 1년(196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헌제를 허창으로 맞이했습니다. 이 공적으로 인해 조조는 대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시중(황제의 곁에서 질문에 답하는 직책), 상서령(문서 발행을 관장하는 정치의 핵심 직책)이 되었습니다. 헌제를 맞이한 것으로 인해 조조는 도의적으로 크나큰 방패를 얻어 이후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것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200
[관도 대전, 조조의 위기 극복 조언]
관도 대전 당시, 순욱은 원소군의 약점을 설명하고 본거지 수비를 맡았습니다. 조조가 전황이 불리해 돌아갈까 고민할 때 이를 반대하고 격려했으며, 원소 사후 유표와의 전투보다 하북 평정을 먼저 할 것을 조언하여 조조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건안 5년(200년), 관도 전투에 이르러, 공융이 원소군의 강력함을 이야기하자 순욱은 원소군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약점을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실제 관도 전투에서 순욱이 이야기한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순욱은 관도 전투에서 본거지의 수비를 맡았는데, 조조가 전쟁 도중 약세라고 느껴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에게 문의할 때가 있었습니다. 순욱은 이것에 반대하고 조조를 격려했습니다. 또 조조가 원소에게 일단 승리한 후에 원소와의 결전은 중지하고 남쪽의 유표와 싸우려고 하자, 순욱은 '원소가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 빈틈을 이용한다면 공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반대했습니다. 이 진언에 따라 조조는 황하를 두고 원소와의 대치를 계속했고, 원소가 죽은 뒤 원소의 세력이 내분에 빠지자 이 틈을 공격하여 하북의 대부분을 세력권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203
[만세정후 봉해짐, 조조와의 갈등 시작]
그간의 공적으로 만세정후에 봉해졌으나, 이때부터 조조가 위공의 지위를 욕심내고 구석을 받으려 하자 한나라 유지를 염원했던 순욱은 맹렬히 반대하며 조조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건안 8년(203년), 이때까지의 공적으로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지고, 그 후에도 봉록이 증가했습니다. 이때부터 조조는 서서히 찬탈 의사를 비추기 시작했고, 위공(魏公)의 지위를 욕심내어 구석(九錫)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은 이에 맹렬히 반대하였고, 그 일로 조조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212
[조조와의 갈등 속에 사망]
조조의 손권 정벌에 동행했으나, 조조와의 불화가 깊어지던 중 5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병사설과 조조가 보낸 빈 찬합을 보고 자살했다는 설 등 여러 기록이 있으나, 죽음의 배경에는 조조와의 불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안 17년(212년), 조조의 손권 정벌에 따라 함께 출정하여 시중·광록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조와의 불화 속에 수춘에 머무르다 서거했습니다. 항년 50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역사서마다 그 서술이 다른데,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수춘에 병으로 머무르다 근심 속에 죽었다'라고 기록했고, 후한서와 배송지의 주석에서는 조조와의 불화로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조조가 순욱에게 빈 찬합을 보내자 이를 보고 조조의 뜻을 간파한 순욱이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라도 그의 죽음의 배경에 조조와의 불화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순욱이 죽은 다음 해 조조는 위공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