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합

장군, 삼국시대 인물, 오자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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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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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삼국시대 인물, 오자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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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위나라의 명장이자 오자양장 중 한 명. 황건적의 난부터 위 건국까지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 관도대전 중 조조에게 투항하며 지략과 용맹을 인정받음. 제갈량의 북벌군을 모두 막아낸 유일한 위나라 장수로 명성을 떨침. 변화에 능통하고 지형을 활용한 계략에 뛰어나 촉한 장병들이 두려워한 인물. 231년 제갈량군 추격 중 전사하며 장후(壯侯) 시호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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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장합 탄생]

장합,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

184

[황건적의 난 참전]

젊은 시절, 황건적의 난 진압을 위한 모병에 응해 한복 휘하에서 활약하며 무장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1

[원소 휘하로 이동]

한복의 몰락 이후, 원소를 섬기며 교위에 임명되었다.

공손찬과의 싸움 등에서 공을 세워 영국중랑장까지 승진하며 원소군의 주요 장수가 되었다.

200

[관도대전 배신 및 투항]

관도대전 중 오소 공방전에서 원소의 오판에 이견을 제시했으나 묵살당했다.

오소가 함락되자, 장합은 고람과 함께 원소를 배신하고 진영을 불태운 뒤 조조에게 투항하며 전세를 조조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장합은 조조군의 강함을 인정하여 오소에 원군을 보낼 것을 진언했으나, 곽도의 반대와 원소의 오판으로 오소가 먼저 함락되었다. 이에 그는 총대장의 생사마저 불확실해진 원소군의 붕괴를 촉진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조조에게 넘어갔다. 조조는 장합의 항복을 기뻐하며 그를 오자서나 한신에 비유하며 편장군과 도정후에 임명했다.

207

[오환족 토벌 선봉]

조조 휘하에서 원상·원담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오환족과의 전투에서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아 활약하여 평적장군에 임명되었다.

211

[마초·한수 연합군 격파]

마초와 한수의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양추를 항복시키는 등 중요한 공적을 세우며 조조의 서량 평정에 기여했다.

215

[한중 전투 및 장비 패배]

장로와의 전투에서 저족을 격파하여 본군의 진격로를 확보했다.

이후 하후연과 함께 한중 수비를 맡았고, 촉 정벌을 건의해 파군 지역으로 진출했으나 장비에게 보급로를 끊겨 전군을 잃고 겨우 한중으로 돌아왔다.

출전 전 군령장을 써 처형 위기에 처했지만, 조조의 사면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 사건은 장합이 공격적인 전략을 펼쳤으나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은 중요한 전례이다.

219

[하후연 사후 위군 수습]

하후연이 유비군의 황충에게 전사하며 위군이 혼란에 빠지자, 곽회의 추천으로 총대장을 맡아 동요하는 전군을 성공적으로 수습했다.

이후 조조가 한중에 도착해 유비군과 대치했으나, 큰 충돌 없이 철수했으며 장합은 진창에 주둔하게 되었다.

220

[조비 즉위 후 승진 및 활약]

조조의 아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좌장군에, 이후 제위에 오르자 막후에 봉해지는 등 높은 관직에 올랐다.

노수호와 동강을 토벌하고, 오나라와의 강릉 전투에서 함대를 통솔해 손성을 격파하는 등 계속해서 큰 공적을 세웠다.

228

[가정 전투 대승]

제갈량의 북벌군 선봉장 마속을 가정 전투에서 완벽히 격파했다.

마속군이 산에 포진하고 요새도 세우지 않는 허점을 파고들어 식수원을 끊은 뒤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로 인해 촉한군은 철수했다.

항복했던 천수, 남안, 안정의 삼군을 평정하며 식읍이 4,300호로 증가하고 정서거기장군에 임명되었다.

가정 전투에서의 승리는 장합의 지략과 전술적 탁월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이 승리로 그는 '제갈량의 북벌군을 모두 막아낸 유일한 위나라 장수'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231

[최후 및 사망]

제갈량의 촉한군이 철수할 때 사마의의 무리한 추격 명령을 받았다.

장합은 매복을 우려해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복병의 공격을 받아 화살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조예 황제는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합은 적을 궁지에 몰아넣은 군대를 추격하는 것을 반대하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으나, 사마의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위나라의 큰 손실로 평가되며, 장합이 지닌 군사적 역량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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