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황

장군, 군인, 삼국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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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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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군인, 삼국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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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오자양장 중 한 명으로 절체절명의 번성 전투에서 관우를 격파하며 조인을 구원한 명장입니다.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면서도 호기를 잡으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뛰어난 용병술을 자랑했습니다. 검약하고 공사를 분명히 하는 성품으로 조조에게 주아부의 풍격이라 극찬받았습니다. 227년 병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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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헌제 탈출전 조력 및 도정후 봉작]

양봉 휘하에서 하동군 관리였던 서황은 이각과 곽사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장안에서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갈 것을 양봉에게 진언했습니다. 헌제 일행이 황하를 건너 안읍에 당도하자 서황은 공을 인정받아 도정후에 봉해졌습니다.

195년(흥평 2년), 이각과 곽사의 내전으로 수도 장안이 혼돈에 휩싸이자,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자고 진언했습니다. 여러 어려움을 겪은 끝에 헌제 일행은 황하를 건너 안읍(지금의 산시성 샤현)에 당도했고, 서황은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습니다.

196

[조조에게 귀순]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온 후, 서황은 양봉에게 조조와 손잡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조조가 헌제를 허창으로 빼돌리자 양봉이 격돌했으나 패배했고, 서황은 양봉을 떠나 조조에게 귀순했습니다.

196년(건안 원년), 헌제는 마침내 낙양으로 돌아왔고 양봉은 하남윤 양현에 주둔했습니다. 서황은 양봉에게 조조와 손잡을 것을 제안했으나, 조조는 양봉을 지원하는 척하며 헌제를 허창으로 빼돌렸습니다. 양봉이 후회하며 조조와 격돌했으나 무참히 패배했고 원술에게로 달아났으며, 서황은 이때 조조에게 귀순했습니다.

198

[여포 토벌전 참여]

조조에게 귀순한 후, 서황은 하남윤의 권현과 원무현을 평정했습니다. 이후 여포 토벌전에 참여하여 조서와 이추 등을 항복시키는 공을 세웠고, 비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조에게 귀순한 후, 하남윤 권현(卷縣)과 원무현(原武縣)을 평정하고 비장군(裨將軍)을 받았습니다. 198년 여포 토벌에 참여하여 따로 조서(趙庶), 이추(李鄒) 등을 항복시켰습니다.

199

[하내군 수고 토벌]

199년에 서황은 사환, 조인과 함께 하내군의 수고(휴고)를 쳐부수고 그들을 참수하며 공을 세웠습니다.

199년, 서황은 사환, 조인과 함께 하내군(河內郡)의 수고(휴고)를 쳐부수고 참하였습니다.

200

[관도 대전 초기 활약 및 편장군 임명]

서황은 200년에 유비, 안량, 문추 등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활약하여 편장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조홍과 함께 유비 및 유벽의 교란군을 무찔렀고, 순유의 추천으로 한순의 운송대를 습격해 물자를 불태워 도정후에 봉해지는 등 관도 대전의 주요 사건에서 맹활약했습니다.

200년, 서황은 서주에서 거병했던 유비를 공격했고, 백마(白馬)에서 원소의 선봉장 안량을, 연진(延津)에서 문추를 칠 때도 활약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었습니다. 유벽, 유비 등이 여남군 은강현 등 허도 근방을 교란하자 조홍과 같이 가 축비(祝臂)를 무찔렀습니다. 순유가 한순(한맹)의 운송대를 습격하자며 적임자로 서황을 추천했고, 사환과 함께 가 그 물자들을 불사르고 도정후에 봉해졌습니다.

204

[업 포위 중 한단현, 모성 점령]

조조가 업을 포위하는 동안, 서황은 한단현을 함락시켰습니다. 역양현령 한범의 항복을 설득하고, 조조에게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임을 역설하여 승인받았습니다. 이어서 복병을 활용한 기습으로 모성도 접수하며 탁월한 전략적 판단을 선보였습니다.

204년, 조조가 업을 포위해두고 한단현(邯鄲縣)을 함락하였습니다. 역양현령 한범은 일단 항복했다가 다시 무기를 들었는데, 서황이 편지를 단 화살을 날려 설득했습니다. 한범은 무기를 내렸고, 서황은 조조에게 “원담과 원상이 아직 망하지 않았고 많은 성들이 추세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역양을 밀어버린다면 다른 성들은 죽음을 불사할 것이고, 항복을 허락한다면 우러러보지 않는 성이 없을 것입니다.”라 견해를 밝혔습니다. 조조가 옳다고 하여 그의 전략적 안목을 인정했습니다. 이어서 복병을 활용한 기습으로 모성(毛城)도 접수했습니다.

205

[남피 전투 참여]

205년에 서황은 남피에서 원담을 격멸하는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평원국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도 기여하며 조조의 하북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05년, 남피(南皮)에서 원담을 격멸하는 데 공을 세우고 평원국(平原國)의 잔당들도 소탕하였습니다.

207

[백랑산 전투 참여]

서황은 207년 백랑산에서 오환족의 답돈을 정벌하는 백랑산 전투에 조조군과 함께 참여하여 큰 활약을 펼쳤고, 이 공로로 횡야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207년, 백랑산(白狼山)에서 답돈을 정벌할 때도 따라가 횡야장군(橫野―)에 임명되었습니다.

208

[형주 정벌 참여 및 남군 전투 패배]

208년, 서황은 형주 정벌에 나서 중려, 임저, 의성 방면을 정리했습니다.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물리쳤으나, 조인과 더불어 강릉을 방어하던 중 주유에게 패배하는 쓴맛을 보았습니다.

208년, 형주 정벌을 수행하여 중려(中廬), 임저(臨沮), 의성(宜城) 방면을 정리하였습니다. 만총과 한진(漢津)에서 관우를 물리치고 조인과 더불어 강릉(江陵)을 방어했으나 주유에게 패하였습니다.

211

[상요 진압과 동관 전투에서 황하 도하 작전 성공]

211년, 서황은 태원군의 상요를 진압하는 데 참여했고, 한수와 마초 연합군과의 동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황하를 건너 관중군 서쪽을 확보하자는 전략을 제안하고, 야간 기습 작전으로 5천 명의 양흥군을 격퇴하며 성공적으로 황하를 도하했습니다.

211년, 태원군 대릉현을 근거지로 들고일어난 상요를 하후연의 지휘 하에 진압하고 참하였습니다. 조조군의 한중을 향한 기동에 위협을 느낀 한수와 마초 등 관중 세력들이 동관으로 동진해왔습니다. 서황은 분음현에 머무르며 하동군을 진무했습니다. 7월(음력)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동관 앞에서 대기하자 관중군도 황하 서쪽을 비우고 남쪽에 전력을 집중했습니다. 서황이 포판진을 건너 그 서쪽을 확보하겠다며 병사를 청하니 조조가 승낙했습니다. 밤중에 주령과 아울러 보병, 기병 4,000명으로 황하를 넘어갔습니다. 해자와 울짱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는데 5,000명으로 강습해온 양흥을 격퇴하였습니다. 하후연과 같이 우부풍 유미·견현의 저족을 평정하고 안정에서 조조와 합류하였습니다. 섣달 조조는 업으로 귀환하고 서황은 하후연 등과 장안에 남았습니다.

212

[부, 하양 잔당 처치]

212년에 서황은 부와 하양의 잔당들을 처치하고, 전년도 동관 전투에서 격퇴했던 양흥을 베는 데 성공하며 안정적인 서쪽 방어에 기여했습니다.

212년, 부(鄜), 하양(夏陽)의 잔당들을 처치하고 양흥을 베었습니다.

215

[장로 정벌 및 한중 수비]

215년, 서황은 장로 정벌을 위한 양평관 전투에 종군하여 독과 구이의 저족을 격파하고 평구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하후연과 함께 한중을 수비하며 유비군의 마명각도 확보 시도를 분쇄하는 등 한중 방어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215년, 장로 정벌에 종군하였습니다. 별도로 독(櫝), 구이(仇夷)의 저족들을 깨트리고 평구장군(平寇―)으로 옮겼습니다. 장순(張順)의 포위를 풀고 진복(陳福) 등 30여 둔을 격파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하후연 밑에 남아서 한중을 수비하였습니다. 유비가 진식 등 10여 영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확보하려는 것을 분쇄하였습니다. 조조가 그 잔도는 한중의 험하고 중요한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며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219

[번성 구원 초기 대응]

219년 8월, 관우가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우금의 칠군을 수몰시키는 등 번성 전선이 위태로워지자, 서황은 완현에 주둔하며 조인 구원 명령을 받았습니다. 병력이 충분치 않아 일단 양릉피에 진을 치고 원군 도착 사실을 알리는 전략으로 상황을 주시했습니다.

219년(건안 24년) 번성(樊城)의 조인을 뒷받침하여 남양군 완현(宛縣)에 주둔했습니다. 8월(음력) 억수로 불은 한수(한강)에 우금군은 수몰당하고 번성과 양양성은 관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서황에게 조인을 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다수가 신병이라 육탄전을 치르기 어려워 일단 양릉피(陽陵陂)에 진을 쳐놓고 조인에게 원병이 왔다는 사실만 알렸습니다. 장수들은 얼른 나아가지 않는다고 비난과 불평을 쏟았습니다.

[번성 전투, 관우군 대파 및 조인 구원]

219년 10월, 조조의 증원군과 손권의 움직임을 알리는 첩보를 활용하며 서황은 거짓으로 해자를 파는 기만술로 관우군을 후퇴시켰습니다. 이후 양릉피와 언성을 연결하며 전진, 위두와 사총에 있던 관우군을 기습하여 대파했습니다. 관우가 직접 5천 명을 이끌고 달려왔으나 서황에게 완전히 무너져 퇴각했고, 서황은 번성 포위망을 돌파하며 조조로부터 손무와 전양저를 뛰어넘는 공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219년 10월(음력), 조조가 서상·여건 등을 보내와 병마가 전부 집결하면 전진하라 하였습니다. 이내 은서·주개 등의 열두 영도 도착했고, 동소의 조언을 채택한 조조의 지시에 따라 손권이 강릉과 공안으로 진격한다는 것까지 조인과 관우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거짓으로 해자를 파며 언성(偃城)의 뒤를 끊는 척하였고, 언성의 관우군이 진지를 불태우고 철수하였습니다. 양릉피와 언성을 연결하고 점차 전진하여 관우군의 포위망에 3장 거리까지 다다랐습니다. 관우군은 위두와 사총에 진영이 있었는데, 서황은 위두를 친다고 선전하고는 사총을 강타하였습니다. 사총의 급작스런 사태에 관우가 몸소 보병과 기병 5,000명을 데리고 달려왔으나, 서황이 여지없이 박살 내고 그대로 포위망 깊숙이까지 짓쳐 들어가 모두 무너트렸습니다. 마피(摩陂)로 개선하자 조조가 7리 밖에서 맞이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치하하며 "장군의 공은 손무와 전양저를 뛰어넘는다"고 극찬했습니다.

220

[위왕 조비 즉위 후 승진 및 봉작]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위왕에 오르자 서황은 우장군에 임명되고 녹향후로 진봉되었습니다. 이후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다시 양후로 봉작이 올려지는 등 위나라 건국 초기에 높은 신뢰와 대우를 받았습니다.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를 이어 위왕에 올라 서황을 우장군(右將軍)에 앉히고 녹향후(逯鄕侯)로 진봉하였습니다. 얼마 안 가 황제에 즉위하고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습니다.

[상용 전투 유봉 축출]

220년, 서황은 하후상, 맹달과 함께 상용으로 진격하여 촉한의 유봉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위나라의 남방 방어선을 강화하는 중요한 군사적 성과였습니다.

220년, 정남장군 하후상, 건무장군 맹달과 함께 상용(上庸)으로 가 유봉을 축출했습니다.

221

[진소 격파 및 양양 탈환]

221년(황초 2년), 서황은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를 물리치고 전략적 요충지인 양양을 되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형주 지역의 위나라 세력권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21년(황초 2년), 조인과 힘을 합쳐 진소(陳邵)를 물리치고 양양을 되찾았습니다.

222

[조비 남정 참여]

222년, 서황은 조비의 남정(오나라 공격)에 참여하여 조진, 하후상, 장합과 함께 남군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남군을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회군했습니다.

222년, 조비가 남정을 개시하여 서황도 조진, 하후상, 장합과 더불어 남군(南郡)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224

[양평 진수 및 양평후 이봉]

황초 연간(220~226년) 중 서황은 양평 지역을 진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시기에 양평후로 작위가 옮겨 봉해졌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기록에 없지만 그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습니다.

앞뒤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황초 연간에 양평(陽平)을 진수하며 양평후로 이봉되었습니다.

226

[제갈근 격퇴]

226년, 조비 사후 조예가 즉위하며 위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제갈근이 양양으로 북진해오자, 서황은 사마의 아래서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공로로 식읍 200호를 추가로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습니다.

226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위를 계승해 어수선한 틈을 타 양양으로 북진해온 제갈근을 무군대장군 사마의 아래서 격퇴하고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가 되었습니다.

227

[병사]

227년(태화 원년)에 서황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공로를 기려 시호는 장후(壯侯)로 내려졌습니다.

227년(태화 원년)에 병사해 시호는 장후(壯侯)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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