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황제, 군웅, 창업군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00:26:13
✅ 촉한의 초대 황제로 혼란한 후한 말 삼국시대에 인의를 중요시하며 기반을 다졌다. ✅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탁월한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포용력으로 제갈량 관우 장비 등 당대 최고 인물들을 휘하에 두었다. ✅ 적벽대전과 익주 점령 등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며 촉한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관우의 죽음 이후 이릉대전에서 크게 패하며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다. ✅ 한 고조 유방에 비견될 만큼 영웅의 기개를 지녔다고 평가받으며 후세에 유황숙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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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탄생 및 어린 시절]
촉한의 초대 황제 유비가 유주 탁군 탁현에서 태어나다.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황실 혈통을 이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짚신,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렸다.
집안에 황제가 탈 가마처럼 생긴 큰 뽕나무가 있어 '귀한 인물이 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유비는 팔이 길어 무릎까지 닿고 귀가 커서 거울 없이도 볼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는 후대에 민중의 염원이 담겨 만들어진 영웅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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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식 문하에서 수학]
집안 어른 유원기의 지원으로 15세에 당대 석학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공손찬과 동문이 된다.
독서는 즐기지 않았으나 말과 화려한 의복에 관심이 많았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명마를 감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후 간옹, 장비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특히 관우, 장비와는 형제처럼 지내며 젊은이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어린 시절 유비는 옆집에 살던 장비에게 밥을 먹여주고 방을 내어주었으며 '익덕(益德)'이라는 자(字)까지 지어주었다. 이는 훗날 위대한 의형제 관계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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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 참전]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의병을 모집해 교위 추정의 군대에 합류하여 난 진압에 참여한다.
이 공로로 중산국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며 관직에 진출한다.
관직에 오른 후 유비는 자신을 쫓아내려던 독우(감찰관)를 현 경계까지 끌고 가 곤장 200대를 때린 후 떠나기도 했다. 이후 단양에서 관구의의 모병에 응해 하비에서 적을 무찌르는 공로를 세웠으나, 이내 다시 관직을 버렸다. 이후 고당위로 임명되었다가 현령으로 승진하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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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과의 절교]
동문이자 친형처럼 여겼던 공손찬이 황족인 유우를 죽이자, 유비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공손찬과 절교를 선언하고 서주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공손찬의 천거로 별부사마에 제수되고 평원 상(相)으로 임명되며 원소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유우의 죽음은 둘의 관계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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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점거 및 예주자사]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의 요청으로 구원군을 이끌고 돕는다.
이후 도겸이 병으로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주위의 권유로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소패에 주둔하며 기반을 다진다.
서주를 차지한 유비는 하비의 호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등 불안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훗날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기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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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에게 하비 피탈]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과 대치하며 하비성을 비운 사이, 하비의 호족 조표가 여포와 내통하여 하비를 기습당한다.
유비의 처자가 여포에게 사로잡히는 수모를 겪는다.
유비가 화친을 청하자 여포는 처자를 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물러난다. 그러나 소패에서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으자, 여포는 이를 경계해 공격하고 유비는 조조에게 귀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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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와 함께 여포 토벌]
조조에게 귀부한 유비는 그와 함께 하비를 포위하여 여포를 정벌한다.
여포의 부장들이 배신하고 조조의 군세를 성 안으로 맞이하자, 유비는 여포의 패악을 조조에게 귀띔하여 여포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후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로 귀환하여 좌장군에 임명되고 후한 대우를 받게 된다. 조조의 참모 정욱 등은 유비를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었으므로 죽여야 한다고 권하였으나,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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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천하 영웅' 발언]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한다.
유비는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리지만 천둥 탓으로 돌린다.
이때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에 은밀히 가담한 상태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가 유비의 가계도를 조사하여 그가 황실 후손임을 알고 '유황숙'이라 부르며 총애했다고 묘사한다.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 나기 전, 원술 토벌을 명분으로 조조 밑을 떠나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자사 차주를 죽인 뒤 관우를 남기고 소패로 돌아간다. 수만 명의 군세로 세력을 키우며 원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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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에게 의지하다]
조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유비는 수하 장수들과 흩어져 홀로 청주로 달아난다.
과거 유비가 천거했던 청주자사 원담의 도움으로 원소에게 영접받아 그의 휘하에 들어간다.
한편 조조는 승리 후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허도로 귀환한다.
이후 관도대전에 앞서 원소의 명으로 유벽과 함께 허도 남쪽을 공략하며 조조를 위협한다.
이 시기 조조로부터 달아난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온다.
채양과의 일화는 삼국지연의에서 각색된 것으로, 관우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채양의 목을 베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사에서는 채양이 유비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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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에게 귀의]
원소 밑을 벗어나기 위해 형주의 유표와 협공을 진언하고, 여남에 파견되어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끈다.
이후 조조에게 패배하자 형주의 유표에게 귀의하여 그의 환대를 받는다.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 시기 유비가 허벅지에 살이 붙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비육지탄' 고사가 전해진다. 이는 세월 속에 공적을 세우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이다. 또한 유표의 부하들이 유비를 살해하려 하자, 명마 '적로'를 타고 단계를 뛰어넘어 무사히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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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망파 전투 승리]
조조가 하후돈과 이전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하자, 유비는 박망 지역에서 복병 전술을 활용해 조조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한다.
이는 삼국지연의와 달리 제갈량이 아닌 유비가 직접 지휘하여 거둔 승리였다.
제갈량은 207년에 유비를 만났으므로, 박망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유비의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준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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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와 제갈량 영입]
서서의 추천을 받아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간 끝에 만난다.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유비는 크게 기뻐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며 '수어지교'라는 고사의 유래가 된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가 제갈량과 가까워지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나 유비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다. 일부 사서에는 제갈량이 유비를 직접 찾아갔다는 기록도 있으나, 진수는 출사표를 인용하여 삼고초려가 사실임을 주장했다. 제갈량은 소설과 달리 지략가보다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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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 패배 및 적벽대전 승리]
조조의 대군이 남하하자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며 행군이 느려진다.
유비는 백성을 버릴 수 없다며 함께 이동한다.
당양의 장판교에서 조조의 정예 기병에게 추격당해 크게 패하지만, 유표의 아들 유기가 있는 하구로 도망친다.
이후 손권과 동맹을 맺고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세계 최초 화공으로 격파한다.
적벽대전은 중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 유비-손권 연합군이 조조의 압도적인 대군을 물리치며 삼국 정립의 기반을 다진다. 유비는 이 승리로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형주 4군을 평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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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 자사 추대 및 혼인]
유기가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유비는 형주자사로 추대된다.
손권은 유비를 견제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손부인과 유비를 결혼시킨다.
손부인과의 결혼은 유비와 손권 연합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으나, 손부인의 권위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유비는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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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입촉 시작]
익주자사 유장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 장송은 장로 토벌을 명분으로 유비를 익주로 불러들일 것을 진언한다.
이는 실제로는 장송과 법정이 유비를 익주의 새로운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였다.
유비는 방통과 함께 익주로 들어가고, 유장은 몸소 마중 나와 환대한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례교위로 천거하고 군사를 증강시켜 백수 주둔군을 지휘하게 한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며 익주 백성들의 인심을 얻는 데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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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과의 대립 격화]
손권이 조조의 침공으로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유비는 유장에게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한다.
그러나 유장이 절반만 보내자 유비는 격노한다.
이때 장송의 배신 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되면서 유비와 유장의 관계는 악화된다.
유비는 백수관의 양회, 고패를 참살하고 황충,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하여 부성을 점거한다. 유장이 보낸 군대도 모두 격파되며, 이엄이 유비에게 항복하며 군세는 더욱 강해진다.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강을 거슬러 백제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관우만이 형주를 진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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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주 점령 및 기반 구축]
1년간의 포위 끝에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여 유장의 항복을 받아낸다.
유비는 익주자사를 겸하며 유장의 옛 신료들을 그대로 고관으로 임명하고, 백성들에게 전답과 집을 돌려주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의 이러한 조치로 익주 백성들이 화목해졌으며, 이로써 유비는 훗날 촉한 건국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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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과의 형주 분할]
익주 점령 이후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합의하며 일시적으로 긴장을 해소한다.
형주 분할 합의는 촉한의 국경을 확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훗날 관우의 죽음과 이릉대전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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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공략 개시]
마초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이민족과 연계하여 혼란을 야기한다.
조조는 조홍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며 한중 공략의 서막을 연다.
한중은 익주와 관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유비는 이곳을 장악하여 촉한의 방어를 강화하고 북벌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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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사망 및 형주 상실]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위나라의 번성을 공격하던 중 손권의 배후 공격을 받아 참수당한다.
이로 인해 촉한은 형주를 오나라에 빼앗기고 만다.
유비는 의형제 관우의 죽음에 큰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의 삶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으며, 훗날 이릉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형주의 상실은 촉한의 북벌 전략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중왕 등극]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
황충의 활약으로 하후연을 무찌르고 죽인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끝까지 한중을 사수하고 상용까지 공략한다.
같은 해 7월, 위왕 조조에 맞서 스스로 한중왕에 등극하며 명실상부한 군웅의 수장이 된다.
한중왕 등극은 유비가 황제 즉위 전 이룬 최고 작위로, 조조와 대등한 위치에 섰음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승리로 촉한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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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황제 시호 추증]
조비가 후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 받아 황제가 되자,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촉한에 전해진다.
이에 촉한은 헌제에게 '효민황제'라는 시호를 올린다.
(실제 헌제는 234년까지 생존).
이 소식은 유비가 한실 부흥의 대의를 명분으로 황제에 즉위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한 황실의 정통성을 자신이 잇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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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건국 및 황제 즉위]
제갈량 등 신하들의 권유로 유비는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한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아들 유선을 황태자로 세운다.
이는 조비의 위나라 건국에 대항하여 한실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즉위를 반대했던 전부사마 비시를 좌천시키기도 한다. 한편, 유비의 또 다른 의형제인 장비가 오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중 부하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당하며 유비의 슬픔과 분노는 극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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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정벌 개시]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형주 탈환을 위해, 여러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 정벌에 나선다.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르고, 육손이 이끄는 오군과 이릉에서 맞선다.
연의에서는 75만 대군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4만~8만 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조운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은 위나라를 의식하여 정벌을 만류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릉 대전 대패]
이릉 대전에서 육손의 화공과 동시 공격으로 촉한군은 40여 곳의 진영이 격파되고, 장남, 풍습 등의 촉한 장수들이 죽임을 당한다.
죽은 군사가 8만이 넘는 세계적 규모의 대패를 당한 유비는 겨우 백제성으로 달아난다.
육손은 촉한군을 계속 추격하려 했으나, 조비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자 군사를 돌려야 했다. 이 대패는 촉한의 국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비의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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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붕어]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대전의 패배로 병이 깊어진 유비는 백제성 영안궁에서 63세의 나이로 붕어한다.
임종 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는다.
유비의 유해는 8월에 혜릉으로 이장된다.
유비의 죽음은 촉한에게 큰 상실이었으나,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는 '백제성 고사'는 군신 간의 지극히 공정한 본보기로 평가받는다. 유비의 후손들은 촉한 멸망 후 위나라로 옮겨졌고, 일부는 영가의 난에 절멸당했지만, 동생 유영의 후손 유현이 살아남아 혈통을 이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