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연
야구 선수, 스포츠인, 해태 타이거즈 선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56:24
• KBO 리그 해태 타이거즈의 원년 멤버이자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를 수놓은 오른손 거포. • 프로 원년 홈런왕과 타점왕을 두 차례씩 석권하며 KKK포의 핵심으로 활약. • 1983년 대형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투혼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며 팀의 첫 우승을 이끈 불굴의 정신력 보유자. • 선수 은퇴 후 코치와 교수로 활약하며 야구계와 교육계에 기여한 학구파 스포츠인.
1952
[야구 스타의 탄생]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훗날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이 될 김봉연 선수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975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1979
[아마추어 홈런왕 등극]
실업 야구 한국화장품 소속으로 활약하며 아마야구 최고 강타자 김우열을 제치고 대통령배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아마야구 역사상 단 6개밖에 없는 3연타석 홈런 중 절반을 자신의 이름으로 채우는 압도적인 파워를 선보였습니다.
1981
1982
[최초의 홈런왕 탄생]
프로야구 출범 원년, 압도적인 파워를 선보이며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당시 어퍼 스윙의 대명사로 불리며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또한 1982년 시즌 베스트 10(1루수)과 베스트 올스타 최다득표자에 선정되며 원년 최고 스타임을 입증했습니다.
[프로야구 해태 입단]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연고지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 나이 31세로 이미 전성기를 약간 넘긴 시점이었으나, 프로야구 원년 돌풍의 주역으로 떠오릅니다.
[KBO 리그 첫 출장]
KBO 리그 구덕 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역사적인 첫 프로 경기에 출장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1983
[불굴의 한국시리즈 MVP]
동승자가 사망할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 300바늘 넘게 꿰맨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여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을 이끌고 '최우수 선수(MVP)'에 등극하는 불굴의 투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부상 부위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던 일화는 그의 강한 의지를 상징합니다. 또한 1983년 시즌 베스트 10(지명타자)과 베스트 올스타 최다득표자로 선정되었습니다.
1985
[최고 인기 스타 입증]
1985년에도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 올스타 최다득표자에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꾸준히 사랑받는 프로야구의 대표 스타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986
[두 번째 홈런/타점왕]
1982년에 이어 다시 한번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KBO 리그 통산 두 번째 홈런왕에 올랐습니다.
동시에 타점왕까지 거머쥐며 리그 최고의 강타자임을 재차 입증했습니다.
이는 그의 꾸준한 기량과 압도적인 파워를 보여주는 기록적인 성과입니다.
또한 1986년 시즌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베스트 올스타 최다득표자에 선정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1988
[화려한 선수 생활 마감]
KBO 리그 통산 630경기 출장, 110홈런, 334타점의 기록을 남기고 7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7년 연속 베스트 올스타에 선정되는 진기록을 남기며,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로 기억됩니다.
1989
[친정팀 코치로 복귀]
선수 생활을 마친 후 곧바로 친정팀 해태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하여 팀의 또 다른 황금기를 지도자로 함께했습니다.
지도자로서도 4번의 우승에 기여하며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1990
[체육학 석사 학위 취득]
원광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과에서 '심한 운동이 자연치사 세포능과 T-세포 아형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구파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94
1997
2000
2001
[극동대학교 교수 임용]
극동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정년 퇴임할 때까지 교육계에 몸담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야구 선수와 지도자를 넘어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