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야구 행정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55:52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손꼽히며 해결사 별명을 얻었습니다. 3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역대 최다인 8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6회 한국시리즈 우승과 LG 트윈스의 1회 우승을 이끈 우승 청부사입니다. 은퇴 후에는 프로 선수 출신 최초로 대학 감독을 역임했으며 프로 코치 감독을 거쳐 현재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1960
대전광역시 동구 출신이다.
1982
[세계를 뒤흔든 홈런]
동국대 4학년,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한일 결승전에서 2-2 동점 상황, 좌측 폴대를 맞추는 극적인 3점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원래 유격수였지만 김재박 때문에 3루수로 뛰게 되었다.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경기에서 승리했다.
1983
[프로 입성]
OB 베어스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프로 데뷔 첫 경기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마추어 시절과 마찬가지로 유격수 포지션이었다.
1986
[해태 왕조의 시작]
해태 타이거즈 이적 첫 해부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전무후무한 리그 4연패(1986~1989)의 시작을 함께 했다.
'KKK포' 김봉연을 잇는 4번 타자로 김성한, 이순철 등과 함께 해태의 막강 타선을 구축했다.
언론은 그를 '해결사'라고 불렀으며, '승리 타점'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곤 했다. 투수 선동열과 투타에서 단짝을 이루었다.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3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역대 최다인 8차례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그의 압도적인 실력과 꾸준함을 증명하는 지표다.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3년, 1994년 총 8회 수상했다.
[해태 해결사의 탄생]
김성근 감독과의 마찰과 간염으로 인한 건강 악화 끝에 황기선, 양승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연고팀 OB가 서울로 이전한 후 연고팀에서 뛰지 못하게 되어 아쉬움도 있었으나, 김인식 수석코치의 설득으로 해태에 합류했다.
한때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빙그레 이글스에 가기를 원하여 임의탈퇴 1호 선수로 공시되기도 했다. 이 트레이드는 OB에게는 마이너스가 되었다.
1988
[올스타전의 별]
KBO 올스타전 3루수 부문 역대 최다인 11차례 참가 중 1988년 올스타전에서 MVP로 뽑히며 최고의 인기와 실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1990
[타격 2관왕 달성]
1990년 KBO 리그에서 타격왕(타율 0.335)과 최고 출루율(0.432)을 동시에 석권하며 최고의 타자임을 입증했다.
1989년에도 최고 출루율(0.409)을 기록했다.
1993
[해태 왕조의 마지막 우승]
해태 타이거즈 소속으로 6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하며, 해태 왕조의 황금기를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다.
[LG 트윈스로의 새 출발]
연봉 갈등 문제로 김응용 감독과의 오해와 발길질 사건에도 불구하고,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 트레이드는 한대화, 신동수와 허문회, 김봉재 지명권이 LG로, 김상훈, 이병훈이 해태로 가는 3:2 트레이드였다.
1994
[LG 우승 견인과 대기록]
LG 트윈스의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주전 3루수로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프로 통산 600타점(역대 3번째)과 1000안타(역대 6번째)를 달성하며 대기록을 세웠다.
600타점은 6월 3일 잠실 삼성전에서, 1000안타는 6월 7일 전주 쌍방울전에서 달성했다.
1996
[쌍방울로의 마지막 여정]
LG 트윈스에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중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수 신영균과 트레이드되며 현역 마지막 팀으로 이적했다.
한대화-신영균 트레이드는 양측 모두에게 실패작이 되었다.
1997
[최초의 대학 감독]
현역 은퇴 후 모교인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며, 프로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학 팀 감독을 맡는 기록을 세웠다.
박한이, 박정권 등 많은 후배들을 양성했다.
[쓸쓸한 현역 은퇴]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김성근 감독과 마찰을 빚은 후 2군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3개월치 월봉을 선납 받고 임의탈퇴 공시되며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쓸쓸하게 마무리했다.
마지막 경기는 전주에서 OB전이었다.
2004
[프로 코치 변신]
선동열이 주니치 코치 연수를 마치고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부임할 때, 삼성의 타격 코치로 합류하며 프로 무대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5
2009
[고향팀 한화 감독 부임]
삼성 수석코치 활동을 마치고,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연고 팀인 한화 이글스 제 8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한화 이글스 역사상 최초의 대전 출신 감독이다.
정원석, 이대수 등을 영입하며 리빌딩을 시도했다.
송광민의 군 입대 등 악재가 겹치며 난관에 부딪혔다.
2011
["예끼!" 한화 반전의 시작]
LG전에서 홈 아웃 판정에 격분하여 심판에게 욕설한 것이 알려지면서, 팀 분위기가 급반전되어 5월에 준수한 성적을 내며 최하위에서 탈출했다.
그의 욕설은 한화 이글스의 응원 구호가 될 정도로 큰 임팩트를 주었다.
전현태와 조인성의 홈 충돌이 발단이 되었다. 시즌 시작 후 4월까지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디시인사이드 유저들은 그를 '돌대화'라고 비꼬기도 했다.
2012
[KIA 2군 총괄코치]
한화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선동열 감독의 요청으로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2군 총괄코치(실질적 2군 감독)로 임명되며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감독직 불명예 경질]
박찬호, 김태균 등을 영입하며 4강 전력으로 평가받았으나 부진이 겹쳐 최하위를 전전하다 계약 만료를 앞두고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구단 측은 자진 사퇴로 공식 발표했다.
유창식, 이여상, 송신영의 부진 등 리빌딩 실패 악재가 겹쳤다. 한화그룹의 이례적인 조치였다. 한용덕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2013
2014
[KIA 동반 사퇴]
선동열 감독이 안치홍과의 갈등으로 사퇴하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직에서 동반 사퇴했다.
2015
[KBO 행정가 변신]
지도자 생활을 마무리하고 2015년부터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선임되어 야구 행정가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