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코치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55:36
*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한국 프로 야구의 전설적인 외야수입니다. * KBO 리그 통산 최고 타율(.330)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선구안으로 시대를 풍미하며 한국 야구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 그의 등번호 10번은 삼성 라이온즈의 최고 타율 타자에게 계승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 2011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팬들에게 최고의 타격 천재로 기억됩니다.
1956
[타격의 달인, 탄생]
한국 프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야구 인생은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6
[대구 이주와 야구 시작]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0세의 나이에 대구로 이주했습니다.
대구삼덕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며 작은 키에도 빠른 발과 기민함으로 야구부 감독의 눈에 띄었습니다.
1970
[삶의 전환점]
대구중학교 2학년 시절, 서울에 계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겪은 고난은 그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2
[고교야구의 혜성]
대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교야구 무대에서 혜성처럼 등장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73
[고교야구 무대 휩쓸다]
고교 2학년으로서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등 주요 대회에서 대구상고를 정상에 올려놓는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황금사자기에서 타율 1위와 최다안타상을 수상했고, 일본과의 고교야구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한국의 승리에 기여하며 '타격 천재'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1974
[고교야구 타격 지배]
그는 봉황기에서 다시 타격왕과 최다안타상을 수상했고,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5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그 해 출전한 네 개 고교야구대회에서 0.383이라는 경이로운 타율로 고교야구 무대를 지배했습니다.
1975
[대학 무대 국가대표]
한양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하자마자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대학 무대에서도 곧바로 인정받았습니다.
1976
[경이로운 백호기 타율]
백호기 대회에서 14타수 10안타, 무려 0.714라는 경이로운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왕을 달성했습니다.
4연타석 2루타를 쳐내는 등 압도적인 활약으로 '크게 성장할 선수'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1981
[월드 게임 야구 은메달]
미국 샌타클래라에서 열린 월드 게임 야구 종목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의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1982
[야구 월드컵 금메달 주역]
서울에서 개최된 야구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우승하며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한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이자 그의 중요한 국제대회 이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83
[KBO 역사상 최고 데뷔]
실업팀 포항제철과 육군 경리단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는 데뷔 첫해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타율 0.369(1위), 18홈런(공동 1위), 22도루(4위), 출루율 0.475(1위), 장타율 0.618(1위)을 기록하며 '천재'임을 증명했습니다.
특히 5월에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타율이 0.414까지 치솟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85
[삼성 통합 우승 이끌다]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끈 핵심 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처럼 꾸준하고 정교한 타격으로 팀의 역사적인 우승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88
[충격의 롯데 트레이드]
트레이드설과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겪다가, 좌완 투수 장태수와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최동원, 김시진 선수가 트레이드된 지 한 달 뒤에 벌어진 일로, 야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는 롯데 이적 후 지명타자로 주로 뛰었습니다.
1991
[타율 3할 복귀와 투혼]
대구상고 후배였던 이정훈 선수와의 타격왕 경쟁 과정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하며 맥주까지 끊는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그 결과, 0.347의 타율을 기록하며 2년 만에 다시 3할대 타율을 달성하며 '격년제 징크스'를 깨고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1992
[첫 우승 후 전격 은퇴]
프로 데뷔 9년 만에 처음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며 선수 생활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는 영광의 순간에 전격 은퇴를 선언하며 '최고일 때 떠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택했습니다.
[역대 최소 타석 1000안타]
롯데 소속으로 사직 구장에서 열린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KBO 리그 역대 4번째로 10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그는 951경기, 3606타석이라는 최소 타석 만에 이 기록을 달성하며 자신의 정교한 타격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그는 KBO 리그 통산 타율 0.330으로 역대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삼성의 등번호 10번은 장효조 선수에 이어 양준혁 선수에게 물려져 '삼성 최고 타율 타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1
[KBO 30주년 레전드 선정]
KBO 리그 출범 30주년을 맞아 한국 야구를 빛낸 '레전드 올스타'에 선정되며 그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이 행사는 그의 마지막 공식적인 영광이 되었습니다.
[야구계의 큰 별 지다]
레전드 올스타 행사 직전, 병원 검진 결과 간암과 위암이 동시에 발견되어 투병하다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부산 동아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야구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으며, 일주일 뒤에는 최동원 선수도 별세하여 한국 프로야구계는 두 명의 전설을 동시에 잃었습니다.
2011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그의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를 하며 아버지를 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