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영화감독, 영화각본가, 영화제작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52:54
한국 영화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거장 101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음 칸 영화제 감독상 베를린 영화제 명예황금곰상 등 세계 유수 영화제 수상 흥행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작품으로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인정받음 수많은 배우를 발굴하고 한국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
1934
[거장의 탄생]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불화,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집안 환경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부유했던 할아버지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 사이의 갈등,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1953
[영화계 첫 발걸음]
소품 보조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중 군화 장사를 하던 인연으로 영화 제작 현장의 잡일을 맡게 됩니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 부산에서 20살에 가출하여 지게꾼, 군화 장수 등 힘든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군화 장수 시절 인연이 된 이들이 영화 제작에 뛰어들면서 임권택 감독에게 촬영 현장 잡일을 부탁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에 흥미를 느껴 영화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1962
[첫 장편 영화 감독 데뷔]
독립군 소재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첫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발판 삼아 1960년대에만 50여 편의 작품을 쏟아내며 다작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영화계 입문 후 4~5년 만에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부 일을 하며 영화 연출법을 배웠고, 1962년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 감독 제의를 받게 됩니다. 흥행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김석훈, 엄앵란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설에 개봉하여 크게 흥행했습니다.
1973
[한국적 영화의 시작]
영화 '잡초'를 통해 미국 영화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를 담아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도는 10년이 넘게 걸렸고, 초기에는 흥행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한국 영화계는 미국 영화의 아류작들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이러한 체질을 개선하고 한국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잡초'를 시작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그는 훗날 '잡초 이전의 영화는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1981
['만다라', 세계 첫 발]
김성동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만다라'를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임권택 감독과 한국 영화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술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만든 '만다라'는 안성기, 전무송 주연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영화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한국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86
['씨받이' 강수연 베니스 수상]
'씨받이'를 제작하며 배우 강수연이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한국 배우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됩니다.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 만든 영화 '씨받이'는 개봉 당시 강수연의 출산 장면 등 파격적인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영화진흥공사 직원이 대리 수상할 만큼 예상치 못한 수상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은 더욱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89
[보관문화훈장 수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3등급)을 수훈했습니다.
이는 그의 업적에 대한 국가적 치하입니다.
수상 목록에 따르면 보관문화훈장은 1989년에 수훈되었습니다.
1990
['장군의 아들' 역대급 흥행]
영화 '장군의 아들'이 68만 7천 명을 동원하며 당시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영화는 3편까지 제작되어 모두 흥행에 성공하며 박상민, 신현준 등 수많은 스타 배우를 배출했습니다.
'겨울 여자' 이후 13년 만에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장군의 아들'은 176일 동안 극장가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의 실제 출연 등 촬영 비화로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1991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수훈]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예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습니다.
이는 국제적으로 그의 예술적 업적이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수상 목록에 따르면 1991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습니다. 이는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993
['서편제' 단일관 100만 돌파]
이청준 작가의 '남도사람'을 영화화한 '서편제'가 단일관 기준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이 작품은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각층의 관람으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개봉 초기에는 미미한 반응을 보였으나, 판소리를 담은 건강한 영화라는 입소문과 언론의 홍보에 힘입어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다른 극장들의 흥행 기록까지 합하면 실제 관객 수는 100만 명을 훨씬 웃돌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정해는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2000
['춘향뎐' 칸 영화제 초청]
영화 '춘향뎐'이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영화의 예술적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조승우, 이효정 주연의 '춘향뎐'은 한국 고전 소설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칸 영화제 초청은 한국 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2002
['취화선' 칸 감독상 수상]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의 삶을 그린 '취화선'으로 '한국인 최초'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수훈했습니다.
최민식 주연의 '취화선'은 임권택 감독의 예술적 깊이를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은 한국 영화의 쾌거이자 임권택 감독의 세계적인 명성을 확고히 한 사건입니다. 금관문화훈장 수훈은 그의 업적에 대한 국가 최고 수준의 예우입니다.
2005
[베를린 명예황금곰상 수상]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평생의 업적을 기리는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가 아시아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과 세계 영화사에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명예황금곰상은 한 영화인의 일생에 걸친 업적과 공로를 기리는 베를린 영화제의 최고 영예 중 하나입니다. 임권택 감독은 이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2007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수훈]
프랑스 최고 훈장 중 하나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성취가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으로, 외국인에게도 수여될 수 있습니다. 이 훈장 수훈은 임권택 감독의 영향력이 유럽에서도 얼마나 지대한지를 상징합니다.
2008
['임권택 영화예술대학' 설립]
동서대학교에 '전국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건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이 신설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영화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그의 업적이 후학 양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아시안 필름 아카데미를 추진하는 등, 한국 영화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영구적으로 기려지는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총감독]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아 예술감독 장진과 함께 대규모 국가 행사를 성공적으로 연출했습니다.
이는 그의 연출 역량이 영화를 넘어선 영역에서도 빛을 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총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아 한국의 문화와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참여는 행사의 권위와 예술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