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배우, 정치인, 교수

num_of_likes 72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6:47:5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신성일
배우, 정치인, 교수
report
Edit

• 대한민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배우 신성일은 1960년대 청춘의 아이콘이었습니다. •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최다 출연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 배우 엄앵란과의 세기의 결혼으로도 유명합니다. •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다채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 2018년 폐암으로 별세 한국 영화계의 큰 별로 기억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37

[신성일, 대구에서 출생]

한국 영화계의 전설, 신성일이 대구에서 강신영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회 활동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쳤습니다.

경상북도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강병오와 김연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김연주는 대한부인회 조직에 참여한 인텔리 여성으로, 아버지 사망 후 경상북도청 초대 부녀계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구수창초, 영덕중, 경북고를 거쳐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0

[로맨스 빠빠로 데뷔]

영화 <로맨스 빠빠>로 스크린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데뷔와 함께 '신필름'에서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의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얻으며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습니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소속으로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본명은 강신영이었다.

1964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

영화 <맨발의 청춘> 등으로 배우 엄앵란과 함께 청춘 멜로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같은 해, 두 사람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팬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스타 부부'로 등극했습니다.

영화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청춘 멜로 영화에서 엄앵란과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1964년 엄앵란과 결혼했다.

1971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다]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선보였습니다.

영화 <어느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며 다재다능한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영화 <어느 사랑의 이야기> (1971)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배우 문희가 출연했다.

1975

[엄앵란과 별거 시작]

배우 엄앵란과의 별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한 '졸혼'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75년 이후 엄앵란과 처음으로 별거했고 1978년 이후 본격 성향 별거했으나 이혼하지는 않았다. 이후 경상북도 영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일가를 짓고 살았다.

1978

[정계 입문]

영화계를 넘어 정치에도 발을 들였습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1978년 제 10대 서울특별시 용산·마포 중선거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2000

[국회의원 당선 및 개명]

한나라당 공천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대구 동구 지역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본명과 예명을 합친 '강신성일'로 개명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새 출발을 알렸습니다.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 강신영과 예명 신성일을 합친 강신성일로 개명하였다.

2003

[영화배우협회 이사장 역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 힘썼습니다.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관련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 기소되며 큰 논란을 빚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과 관련하여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2005년에 징역 5년에 추징금 1억 8,700만원을 선고받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007

[특별사면 및 복권]

뇌물 혐의로 수감되었던 그는 2007년 특별사면을 받고 같은 해 특별 복권되면서 다시 사회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7년 2월 12일 특별사면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31일 특별 복권됐다.

2013

[야관문: 욕망의 꽃 개봉]

그의 마지막 영화 작품은 2013년 개봉한 <야관문: 욕망의 꽃>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노년의 연기 투혼을 선보이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영화 작품은 2013년에 개봉한 야관문: 욕망의 꽃이 됐다.

2017

[폐암 투병 고백]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임을 고백하며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흡연 대신 집안의 향 연기가 발병 원인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2017년에 폐암에 걸렸다고 고백했다. 담배는 오래전에 끊었으나 집안에서는 향을 장기간 피웠고 그 연기가 원인이라고 밝혔다.

2018

[부산영화제 마지막 모습]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여 대중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투병 중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습니다.

2018년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낸 게 그가 대중들에게 보인 마지막 모습으로 남았다.

[한국 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 별세]

폐암 투병 끝에 2018년 11월 4일 새벽, 8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장례는 한국 영화계의 거대한 공로를 기려 '영화인장'으로 치러졌습니다.

한국 영화의 큰 별이 영원히 잠든 날이었습니다.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을 기하여 화순전남대학교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그가 영화계에 남긴 업적이 많고 공로한 바가 커서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경상북도 영천시 괴연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