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 이사금

신라의 군주, 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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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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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군주, 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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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대 이사금이자 석씨 왕조의 시조. 알에서 태어나 왕이 된 신비로운 출생 설화의 주인공.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고 대보로서 국정을 돌보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백제와 가야를 상대로 영토를 넓히고 계림을 국호로 정하며 신라의 기반을 다졌다. 사후 그 유골이 동악에 안치되어 신성시된 독특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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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탄생과 이주]

다파나국(또는 용성국)의 왕자가 알의 형태로 바다에 버려져 신라 아진포에 도착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는 철기 문명을 들고 온 인물로 여겨지며, 먼 이국에서 왔다는 설화는 이후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가 알을 낳자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담겨 바다에 띄워졌고, 이후 신라 아진포(현재 영일 지역)에서 어부 할머니 아진의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를 인도 타밀계 촐라국 출신으로 보기도 하며, 이는 허황옥 신화처럼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전파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8

[남해차차웅의 사위, 대보]

신라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었고, 2년 뒤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관직인 대보(大輔)로 임명되어 신라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57

[신라 4대 이사금 즉위]

선왕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즉위했다.

탁월한 덕망으로 왕위를 사양하다가 받아들여진 이례적인 경우였다.

59

[왜와 수교 및 마한 복속]

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안정적인 국면을 도모했고, 마한의 장수가 성을 바치며 항복하는 등 외교와 영토 확장에 힘썼다.

즉위 이듬해(58년)에는 호공을 대보로 삼아 국정을 안정시키고,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63

[백제와의 반복된 대립]

탈해 이사금 치세 동안 백제와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낭자곡성을 두고 교섭을 거부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와산성과 구양성 등 주요 요충지를 두고 공방을 반복하며 국경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64년에 백제가 와산성과 구양성을 공격했으나 신라 기병 2천 명으로 격퇴했다. 66년에도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되찾았고, 70년과 74년에도 백제의 침략을 막아냈다. 특히 75년에는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백제의 와산성 공격을 격퇴하고 백제군 2백 명을 전멸시켰다.

65

[김알지 발견 및 계림 국호]

시림(始林)에서 황금 궤짝 속에 있던 김알지를 발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개칭하고 이를 신라의 *새로운 국호*로 삼는 중대한 변화를 단행했다.

77

[황산진 가야군 격퇴]

아찬 길문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천여 명의 병사를 베어* 대승을 거두며, 신라의 군사력을 과시했다.

79

[우시산국, 거칠산국 병합]

장군 거도를 보내 현재 울산과 부산 일대에 해당하는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신라 영토로 병합하여, 남방으로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

80

[승하 및 유골 신격화]

99세(혹은 85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양정구에 장사지냈다.

사후 그의 유골은 놀랍게도 거대한 크기(몸길이 약 223cm)로 밝혀져, 이를 부수어 동악에 신성한 상으로 안치하며 숭배되었다.

탈해 이사금의 유골은 머리 둘레 약 74cm, 몸 뼈 길이 약 223cm에 달하는 비정상적으로 큰 크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닌 신성한 존재였음을 암시하며, 백성을 위한 통치와 함께 신비로운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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