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
바위, 전설, 문화재, 역사적 장소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8:46
백제 의자왕 시대의 비극적인 전설이 깃든 바위. 수많은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명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위치한 문화재자료 제110호. ‘삼천 궁녀’라는 숫자가 후대에 형성된 흥미로운 역사를 지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교훈을 얻는 상징적인 장소.
660
[백제 멸망 및 낙화암 전설 시작]
백제 의자왕 2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이곳에서 백제의 궁녀들이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시작되었다.
660년,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제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투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실제로 삼천 궁녀가 투신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과장된 것으로, 낙화암의 지형상 수많은 인원이 동시에 뛰어들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이 전설이 낙화암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1000
백마강에 몸을 던진 궁녀들의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가 고려 시대에 들어 '낙화암(落花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는 백제 멸망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는 중요한 명칭이 되었다.
1281
[《삼국유사》에 궁녀 투신 기록 최초 등장]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부여성 북쪽 큰 바위에서 의자왕의 후궁들이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백제고기 기록을 인용하며 '타사암'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최초로 기록되었다.
고려 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의자왕과 여러 후궁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강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는 《백제고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기록되었다. 이는 궁녀들의 죽음을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다.
1448
[김흔의 시에 '삼천 궁녀' 수효 최초 언급]
조선 초 문신 김흔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투신한 궁녀의 숫자를 '삼천'으로 언급한 것이 최초로 기록되었다.
조선 초 문신 김흔(金訢, 1448~?)이 지은 '낙화암'이라는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어, 투신한 궁녀의 숫자를 '삼천'으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1778
[《동사강목》에 '여러 비빈' 기록]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투신한 궁녀들을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기록하며, 후대의 '삼천 궁녀' 설화와는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조선 후기 학자 안정복의 역사서 《동사강목》 권2에서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이들을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여, 후대에 부각되는 '삼천 궁녀' 설화의 숫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1929
1929년, 백제 궁녀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낙화암 절벽 위에 육각형 형태의 아름다운 정자 《백화정》이 세워졌다.
1941
[윤승한 소설 《김유신》에 '3천 궁녀' 표현 직접 사용]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에서 '3천 궁녀'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사용되며 대중화에 기여했다.
윤승한(尹昇漢) 작가의 소설 《김유신》(야담사, 1941년)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이 문헌상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이 표현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2
[《국사대사전》에 '3천 궁녀' 공식 기록]
이홍직의 《국사대사전》 낙화암 항목에서 '3천 궁녀'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항목에서 '3천 궁녀'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이 용어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4
1984년 5월 17일, 백제의 비극적인 역사를 품은 낙화암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