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문

성문, 보물, 세계문화유산, 조선 시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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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八達門)은 경기도 수원시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남문으로, 조선 제22대 정조 대왕의 개혁 의지와 효심이 응집된 고건축의 정수입니다. 1794년 완공된 이 성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이름처럼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독보적인 위상을 정립했습니다. 특히 당대의 기술력을 집약한 옹성과 중층 누각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예술적 조형미를 동시에 완성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훼손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북문인 장안문과 달리 문루의 원형을 기적적으로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수원의 중심을 지켜온 팔달문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보존 의지가 깃든 소중한 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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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

[팔달문 공사 착공]

정조 대왕의 화성 건설 계획에 따라 수원 화성의 남쪽 성문인 팔달문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표준을 제시하기 위해 최고의 기술진과 장인들이 집결했습니다.
기존의 성문 설계를 보완하여 방어력과 심미성을 극대화한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팔달문은 화성 성곽의 주요 시설물 중 가장 먼저 공사가 시작된 핵심 시설입니다.
석재의 채취부터 가공까지 철저한 분업화가 이루어졌으며, 거중기와 같은 최신 장비가 투입되었습니다.
이 공사는 정조의 강력한 왕권 강화와 신도시 건설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지반 및 석축 기초 공사]

팔달문의 굳건한 기초를 위해 지반을 다지고 대형 석재를 쌓아 올리는 석축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거대한 홍예문을 지탱할 수 있도록 정교한 치석 기술이 동원되었습니다.
성문의 하중을 견고하게 받치기 위한 조선 기술자들의 지혜가 집약되었습니다.

팔달문의 홍예는 다른 성문보다 큰 규모로 제작되어 대형 수레의 이동을 고려했습니다.
석재 사이의 틈을 최소화하기 위해 숙련된 석수들이 정으로 돌을 깎아 완벽한 결합을 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담장을 넘어 군사적 충격을 견딜 수 있는 요새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팔달문 문루 상량]

기초 석축 공사를 마친 후 목조 누각의 대들보를 올리는 상량식을 거행했습니다.
중층 구조의 웅장한 누각이 뼈대를 드러내며 화성의 남쪽 관문으로서 위용을 갖췄습니다.
상량문에는 건물의 무사 안녕과 조선 왕실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 지붕 구조로 설계되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목재는 전국의 산지에서 엄선된 최상급 소나무가 사용되었으며, 정밀한 결구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상량식 이후 기와를 잇고 단청을 올리는 마감 작업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팔달문 최종 완공]

약 7개월간의 집중적인 공사 끝에 팔달문과 그 주변 시설이 모두 완공되었습니다.
정조 대왕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통한다는 의미를 담아 직접 이름을 명명했습니다.
이로써 화성의 남쪽 방어 체계가 확립되고 도심 물류의 중심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완공된 팔달문은 성문 앞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아 적의 접근을 차단하는 이중 방어 구조를 갖췄습니다.
정조는 '모든 곳으로 사통팔달한다'는 이름처럼 이 문을 통해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했습니다.
완공 직후 성문의 견고함을 확인하는 엄격한 검수가 이루어졌으며 모든 과정은 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현판 글씨 하사 및 설치]

정조 대왕이 직접 쓴 '팔달문(八達門)'이라는 세 글자의 친필 현판이 문루에 걸렸습니다.
왕의 친필은 건물의 권위를 높여주었으며 국가의 핵심 시설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강인하면서도 유려한 필체는 팔달문의 건축적 웅장함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습니다.

정조는 화성 건설의 모든 세부 사항에 관여했으며 현판 글씨에도 통치 철학을 담고자 했습니다.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제작되어 멀리서도 왕의 권위가 시각적으로 느껴지게 했습니다.
이 현판은 여러 차례의 보수 과정을 거치면서도 원형의 필치를 최대한 유지하며 전해지고 있습니다.

[옹성 및 방어 시설 완성]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구축하고 중앙에 홍예문을 내어 방어력을 완성했습니다.
옹성 위에는 여장을 쌓아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 성문 건축 기술 중 가장 발달된 옹성 출입 방식을 보여줍니다.

팔달문의 옹성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듯한 형태로 적이 성문에 직접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중앙 홍예문은 대형 수레와 말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크기로 제작되어 상업적 편의를 도왔습니다.
옹성 입구 위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여 적의 화공에 대비하는 등 과학적인 방어 설계가 돋보였습니다.

1795

[을묘년 원행과 팔달문 통과]

정조 대왕이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할 때 장엄한 모습의 팔달문을 통과했습니다.
국왕의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팔달문 일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팔달문은 왕의 효심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을묘년 원행 당시 정조는 팔달문을 지나며 화성 신도시의 번영과 백성들의 삶을 살폈습니다.
이 행차를 통해 팔달문은 단순한 문을 넘어 왕조의 정통성과 비전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격상되었습니다.
당시의 화려한 행렬은 '화성행행도' 등의 기록화를 통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1796

[화성성역의궤의 상세 기록]

화성 건설의 전 과정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에 팔달문의 설계도와 자재 내역이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팔달문의 원래 모습을 완벽하게 고증할 수 있는 세계적인 사료가 되었습니다.
건축 기술뿐만 아니라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까지 포함된 정밀한 기록입니다.

의궤에는 팔달문의 도설이 실려 있어 누각의 구조와 단청 문양, 석축의 치수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석수, 목수 등 공사 인력의 임금 지급 내역까지 기록되어 조선의 투명한 행정을 보여줍니다.
이 기록 덕분에 훗날 전란이나 노후화로 훼손되었을 때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1800

[정조 서거 이후의 위상 유지]

정조 대왕 서거 이후에도 팔달문은 수원의 남쪽 관문으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며 도시를 지켰습니다.
성문 주변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상업 도시 수원의 기초를 닦는 핵심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정조의 유업을 잇는 상징물로서 팔달문의 중요성은 식지 않고 지속되었습니다.

정조 사후 화성 신도시에 대한 국책 지원은 줄었으나 팔달문의 지리적 중요성은 변함없었습니다.
전국의 상인들이 팔달문 주변으로 모여들며 물류 허브로서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팔달문은 정조가 꿈꿨던 경제적 자급자족 도시의 모델을 묵묵히 증명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1848

[헌종 대의 부분 수리 및 보수]

기상 상황과 노후화로 인해 일부 훼손된 누각과 지붕을 보수하는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국가 관리 시설로서 정기적인 유지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단청을 새로 입히고 기와를 교체하여 건물의 미적 가치와 수명을 보존하고자 했습니다.

보수 공사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바람에 취약해진 부분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의 보수 기록 역시 관청 일지에 남아 있어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꾸준한 관리는 팔달문이 다른 문에 비해 원형을 잘 유지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10

[일제강점기 성벽 철거와 고립]

일제강점기 도시 계획을 명분으로 팔달문 좌우의 성벽이 무자비하게 철거되었습니다.
성문은 이제 주변 성곽과 분리되어 도심 속 외로운 섬과 같은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곽을 해체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었습니다.

일제는 도로 건설을 핑계로 팔달문 주변의 성벽을 허물어 전통적인 방어 체계를 파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달문과 연결된 성곽 라인이 단절되었으나 성문 자체는 규모와 상징성 때문에 보존되었습니다.
이후 팔달문은 도심 교통의 중심점에 위치하게 되며 현대적 도시 구조의 일부로 편입되었습니다.

1920

[팔달문 시장의 근대적 성장]

팔달문 주변의 전통 시장들이 근대적인 상업 구역으로 변모하며 인파가 급증했습니다.
성문은 이제 방어 시설을 넘어 도시의 이정표이자 상거래의 중심점으로 확고히 인식되었습니다.
수원 경제의 심장부인 팔달문시장이 이 시기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팔달문 앞 광장은 장날마다 전국 상인들로 북적였으며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성문은 만남의 광장이자 수원의 번영을 상징하는 시각적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상업적 활기는 훗날 팔달문이 도심 한복판에 섬처럼 남게 되는 도시 구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934

[일제에 의한 보물 지정 관리]

조선총독부에 의해 팔달문이 당시의 '보물' 목록에 올라 관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 하에서도 팔달문의 건축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식민 사관에 기반한 관리였으나 물리적인 철거를 막는 방어막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주요 문화재를 목록화하여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두고자 했습니다.
지정 이후 대대적인 수리는 없었으나 성문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팔달문이 지닌 독보적인 위풍이 침략자들에게도 위압감을 주었음을 시사합니다.

1950

[한국전쟁 발발과 수난]

한국전쟁의 발발로 수원이 전장으로 변하며 팔달문 역시 소실의 위험에 처했습니다.
전쟁 초기부터 수원은 북한군의 주요 진격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수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파괴되는 가운데 팔달문은 기로에 섰습니다.

수원 시가지는 미군의 폭격과 지상전으로 인해 초토화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팔달문 주변의 상점들과 가옥들은 대부분 불타거나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고건축물이 살아남는 것은 오직 천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

[팔달문의 기적적 생존]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북문인 장안문은 크게 파괴되었으나 팔달문은 원형을 유지했습니다.
전쟁의 폭격과 포화가 빗겨가며 조선 시대 성문의 전형적인 구조를 온전히 지켜냈습니다.
이 생존은 훗날 팔달문이 국가지정 보물로 인정받는 결정적인 역사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수원 시가지가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팔달문은 기적적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변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팔달문은 굳건히 서 있어 전후 복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장안문과 달리 문루가 소실되지 않아 정조 시대의 목조 건축 양식을 생생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1964

[대한민국 보물 제402호 지정]

문화재적 가치와 역사적 상징성을 공식 인정받아 대한민국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의 기록과 실물이 완벽하게 일치하며 보존 상태가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팔달문은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를 받는 핵심 유산이 되었습니다.

지정 당시 전문가들은 팔달문의 공포 양식과 지붕 곡선이 조선 후기 미학의 정수라고 찬사했습니다.
특히 전쟁을 겪고도 남은 유일한 원형 성문이라는 점이 지정의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지정 이후 팔달문은 수원 시민들에게 단순한 유적을 넘어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69

[전후 대대적인 보수 공사]

전쟁 기간 중 누적된 손상과 노후화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대규모 보수 공사를 시행했습니다.
부식된 목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새로 입혀 성문의 위용을 다시 살려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인 문화재 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기법을 동원하여 훼손된 부분을 보강하고 지붕 기와를 전면 교체했습니다.
이 보수를 통해 팔달문은 현대 도시의 중심에서 다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수원 시민들은 새단장한 팔달문을 보며 전후 복구의 희망과 의지를 다졌습니다.

1975

[화성 복원 정화 사업 추진]

수원 화성 전체를 복원하는 대규모 국책 사업 과정에서 팔달문의 상태 점검이 이뤄졌습니다.
파괴되었던 장안문과 다른 시설들이 복원될 때 팔달문은 완벽한 고증의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성문 주변의 지반을 정비하고 옹성의 석축을 보강하여 안정성을 높였습니다.

팔달문의 원형은 소실된 시설물을 되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실물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당시 기술자들은 팔달문의 결구법을 연구하여 장안문 복원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팔달문은 단독 문화재에서 화성 성곽 시스템의 중심으로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1980

[도심 교통의 핵심 회전로 형성]

수원 시가지 확장에 따라 팔달문 주변으로 대규모 회전교차로가 형성되었습니다.
성문은 이제 도심 한복판의 문화재 섬과 같은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로서 팔달문의 존재감은 매일 수만 명의 시민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도시화로 인해 보행자의 접근은 제한되었으나 차 안에서 감상하는 명소로 변모했습니다.
팔달문을 중심으로 사통팔달하는 도로는 정조가 의도한 지리적 기능을 현대적으로 계승했습니다.
성문 주변의 상권은 더욱 밀집되어 수원의 대표적인 번화가로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1997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팔달문을 포함한 수원 화성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최종 등재되었습니다.
건축물의 독창성과 의궤의 기록적 가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았습니다.
팔달문은 전 세계가 보호해야 할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그 격이 상승했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팔달문의 견고한 구조와 예술적 누각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했습니다.
등재 이후 팔달문은 해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글로벌 관광 명소로 발돋움했습니다.
수원시는 국제적 기준에 맞는 관리 체계를 도입하여 팔달문의 영구 보존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 개최와 수원]

2002년 월드컵 개최 도시로서 수원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팔달문이 대표 관광지로 소개되었습니다.
성문 주변에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팔달문을 방문했습니다.
팔달문은 수원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로 부각되었습니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과 연계한 관광 코스에서 팔달문은 필수 방문지로 선정되었습니다.
당시 팔달문 주변 시장에서는 외국인들을 위한 다양한 전통 문화 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팔달문은 지역 문화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인지되었습니다.

2004

[화려한 야간 경관 조명 설치]

팔달문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선사하기 위해 현대적인 야간 조명 시설을 도입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누각과 옹성의 자태는 수원의 상징적 야경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에게 24시간 열려 있는 문화재로서의 친근한 이미지를 더해주었습니다.

최신 조명 기술을 사용하여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면서도 입체감을 극대화했습니다.
조명이 켜진 팔달문은 퇴근길 시민들에게 도시의 자부심과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했습니다.
이후 팔달문 야경은 사진가들과 관광객들에게 필수적인 촬영 코스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2008

[정밀 안전 진단과 위기 발견]

노후화와 도심 진동으로 인한 팔달문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정밀 진단을 실시했습니다.
누각의 목재 부식과 지붕 처짐 현상이 발견되어 근본적인 보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문화재청과 수원시는 유물의 장기 보존을 위해 완전 해체 보수를 결정했습니다.

진단 결과 기둥 하부의 부식과 서까래의 노후화가 심각한 수준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도심 회전교차로의 교통 진동이 구조적 약화를 가속화한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더 큰 훼손을 막기 위해 문루 상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수리하는 방식을 권고했습니다.

2010

[팔달문 대규모 해체 보수 착공]

보물 지정 이후 최초로 팔달문 문루를 완전히 해체하여 수리하는 대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기와를 걷어내고 목조 구조물을 분리하여 손상된 부분을 정밀하게 치료했습니다.
모든 공정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공사장 주위에 대형 가설 덧집을 설치하여 작업 중 기상 변화로부터 목재를 보호했습니다.
재사용 가능한 부재는 최대한 살리고 교체가 불가피한 부분만 새 목재를 사용했습니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기계 대신 장인들의 숙련된 수작업이 공사의 핵심을 이뤘습니다.

2011

[부재별 정밀 훈증 및 보강]

해체된 목재 부재들에 대한 해충 방제와 훈증 소독을 실시하여 내구성을 높였습니다.
부식된 기둥 하부에는 새로운 목재를 덧대는 등 구조적 강도를 보강했습니다.
팔달문의 수명을 수백 년 더 연장하기 위한 가장 세밀하고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수지 충전법 등 전문 기법을 활용하여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내부 결속력을 강화했습니다.
사용한 새 나무는 자연 건조된 국내산 소나무만을 엄선하여 기존 부재와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장인들은 나무의 나이테와 결을 맞추며 조선 시대 장인들의 숨결을 재현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2012

[팔달문 누각 재조립 및 지붕 이기]

보수를 마친 목재들을 다시 결합하여 팔달문의 웅장한 누각 형태를 복원했습니다.
지붕에는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기와를 얹어 고풍스러운 미를 완성했습니다.
건물의 균형을 잡고 방수 처리를 강화하여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보호력을 높였습니다.

기둥과 보를 연결하는 작업은 못을 쓰지 않는 전통 결구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지붕 곡선은 팔달문 특유의 날렵한 선을 살리기 위해 의궤의 도면을 반복 확인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팔달문은 도심 속에서 다시 당당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양식의 단청 재현 작업]

복원된 목조 구조물 위에 화려하고 엄숙한 단청 문양을 입히는 공정을 시작했습니다.
조선 후기 단청 양식을 완벽히 재현하기 위해 천연 안료와 전통 배색을 적용했습니다.
건물의 위엄을 세우고 목재를 보호하는 기능적인 측면까지 고려되었습니다.

단청장들이 직접 문양을 도안하고 채색하며 팔달문만의 화려한 색감을 되살렸습니다.
의궤에 기록된 문양을 1:1 비율로 대조하며 정조 시대의 원형을 구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단청은 습기와 직사광선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여 건물의 보존 기간을 늘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2013

[3년의 해체 보수 준공식 거행]

3년간의 정밀 보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팔달문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새 옷을 입은 팔달문은 정조 시대의 찬란한 모습 그대로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문화재 복원의 표준 모델로 인정받으며 팔달문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준공식에는 수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팔달문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 마당이 펼쳐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보수로 팔달문의 구조적 결함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후 팔달문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더욱 확고하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2016

[수원 화성 방문의 해 행사 개최]

화성 축성 220주년을 기념하는 '방문의 해'를 맞아 팔달문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세계 각국 관광객들에게 팔달문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특별 프로그램이 운영되었습니다.
국제적인 역사 관광 명소로서 팔달문의 브랜드 가치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방문의 해 동안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외국어 안내 서비스와 가상 현실 체험 시설을 도입하여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왔습니다.
성문 앞에서 재현된 전통 무예 공연은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문화적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2021

[스마트 과학적 문화재 관리 시스템]

IoT 기술을 적용하여 팔달문의 미세 진동과 온도, 습도를 실시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량 진동이 많은 환경에서 문화재의 이상 징후를 즉각 감지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습니다.
데이터 기반의 과학적 보존 관리가 이뤄지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건물 주요 부위의 센서들이 정보를 수집하여 관리소에 24시간 실시간으로 전송합니다.
이를 통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구조적 변화까지 파악하여 선제적 대응이 가능해졌습니다.
전통의 가치를 첨단 기술로 수호하는 스마트 문화재 관리의 선도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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