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섬, 역사 유적지, 군사 요충지, 임시수도, 세계유산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8:27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넓은 섬이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유적을 품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 몽골 침략에 맞서 39년간 임시수도였고 팔만대장경을 조판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대규모 해안 방어 시설을 갖춘 핵심 국방 요충지였습니다. 근대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격동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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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면 동막리 유적과 하점면 삼거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강화도에는 신석기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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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유적 형성]
강화도에서 북방식 및 남방식 고인돌 100여 기 이상이 확인되며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유적지임을 보여줍니다.
강화도에서는 특히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1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강화도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많은 수의 고인돌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 중 하나가 강화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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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한강의 관문인 강화도는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접전지였으며, 백제는 '서해 대도', 신라는 '해구군' 또는 '혈구진'이라 불렀습니다.
강화도는 한강의 관문이라는 특성상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접전지 중 하나였으며, 관미성의 위치가 강화도 부근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강화도를 서해 대도라고 불렀다. 백제가 고구려에 패하고 난 후에 강화도는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이때 강화도는 혈구군, 혹은 갑비고차 군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에 귀속되었을 때는 해구군 혹은 혈구진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강화도는 혈구도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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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강화도의 변천과 국난 극복]
고려 시대부터 '강화도'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몽골 침입 시 임시 수도로서 팔만대장경 조판, 간척사업, 참성단 축조 등 국난 극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강화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양광도 강화면에 속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벽란도의 통로 역할을 했으며, 목판인쇄소, 소금전매소 등이 설치되었고,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는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고, 이곳의 목판인쇄소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이 이뤄지기도 했다.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의 왕궁터와 고려시대의 성곽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 천도 이후 식량의 자급력 향상을 위한 간척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을 위해 강화도 남쪽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았다. 개경 환도 이후에는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강화도에서 이어나갔으나, 곧 진도로 남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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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강화 도호부 승격]
조선 태종 때 강화는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한강 입구의 군사 요충지로서 김포, 양화, 통진, 교동 등지의 진을 통괄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강화도가 수행하는 국방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태종 때 강화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활성화와 함께 한강의 입구로서 진이 설치되고 김포, 양화, 통진, 교동 등지의 진을 통괄하게 되었다. 강화부사는 경기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1592
[임진왜란과 강화도]
임진왜란 당시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우성전, 김천일 등 의병장이 권율 장군을 지원하며 활약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우성전,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권율 장군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화도는 유배지로도 유명했는데, 연산군, 광해군 등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1627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었다.
1636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과 인조의 항복]
병자호란 발발 시 왕족들이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도 항복하게 됩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하였다. 이후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졌다.
1650
[효종, 강화도 방어 시설 확충]
조선 효종 때 북벌 정책의 일환으로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광성보 등의 진과 보가 설치되고 성곽이 수리되는 등 방어 시설이 확충되었습니다.
조선 효종 때에는 북벌 정책을 계획하면서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광성보 등의 진과 보를 설치하였고, 성곽을 수리했다.
1680
[숙종, 강화도 전역 요새화]
조선 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중요한 군사 시설입니다.
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의 전 지역을 요새로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만든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양명학으로 유명한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주자학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의 본뜻을 중시하는 강화학파라 불리는 학풍이 일어났다.
1780
정조 때에는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설치되었다.
1866
[병인양요 발발, 외규장각 약탈]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며 병인양요가 발생, 강화도의 외규장각이 약탈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조선 후기 병인박해를 구실로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 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강화의 외규장각이 약탈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1871
[신미양요 발발, 미국 함대 격퇴]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나,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미국 함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함대를 몰아냈다.
1875
1875년에는 일본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1876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인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1910
[일제강점기, 강화도 문화재 약탈 및 도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강화도의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하고 무덤이 도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고 무덤은 도굴되었다.
1950
[한국 전쟁 중 강화도 양민학살 및 인삼 재배 시작]
한국 전쟁 당시 강화도에서 대규모 양민 학살 사건이 있었으며, 개성 피난민의 유입으로 인삼 재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강화도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개성에서 피난민이 강화도로 오면서 인삼재배가 시작되었다.
1970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1977
강화도의 호국 유적들은 1977년에 완전 복원되어 호국 정신의 교육 도장으로 함과 동시에 부근의 전등사 등과 함께 새로운 관광 명소로 개발되고 있다. 주요 호국 유적지로는 갑곶돈대, 외성, 광성돈대, 광성제단, 초지진, 덕진진 등이 있다.
2000
[강화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이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2000년 11월 29일에는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강화의 고인돌이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