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궁궐, 사적, 문화유산, 역사적 건축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7:53
혼돈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대한제국의 심장이자 격동의 역사 현장. 임진왜란 이후 왕의 임시 거처에서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성장. 서양식 건축물과 전통 궁궐 양식이 조화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 고종의 아관파천과 황제 즉위 을사늑약 체결 등 국가적 사건을 목도한 곳. 근대화의 첫걸음과 일제강점기 수난 그리고 복원의 역사를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 연경궁의 탄생
- 임진왜란, 왕의 피난처
- 두 임금의 즉위지
- '경운궁'으로 재탄생
- 서궁, 비극의 그림자
- 외교의 중심지로 부상
- 아관파천, 고종의 피난처
- 대한제국의 법궁이 되다
- 황제국 선포와 정궁 위용
- 전기가 들어온 최초 궁궐
- 덕혜옹주 위한 유치원
- 웅장한 중화전 완공
- 대화재, 궁궐 집어삼키다
- '을사늑약' 비극적 현장
- '대한문' 새 이름, 새 정문
- '덕수궁'으로 개명되다
- 한국 최초 서양식 건축
- 태평로 확장과 궁궐 축소
- 고종 서거, 궁궐 기능 상실
- 공원으로 대중에게 열리다
- 6.25 전쟁 속 지켜낸 궁
- 대한문, 현재 위치로 이건
- '경운궁' 명칭 변경 보류
1471
[연경궁의 탄생]
세조가 며느리 소혜왕후를 위해 마련한 사저였던 이곳은 성종 즉위 후 왕실에 바쳐지며 '연경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이 처음으로 궁궐의 이름을 갖게 된 순간입니다.
1592
[임진왜란, 왕의 피난처]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 후 환궁하여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거처인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본래 사저였던 곳이 비로소 왕이 머무는 궁이 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1608
[두 임금의 즉위지]
임진왜란 중 왕의 임시 거처가 된 이곳은 선조가 생을 마감한 장소이자, 그의 아들 광해군이 '즉조당'에서 즉위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인조 역시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르며, 이곳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 두 임금의 즉위 현장이 됩니다.
1611
['경운궁'으로 재탄생]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임시 행궁이었던 이곳에 정식 궁호 '경운궁'을 내립니다.
드디어 이곳은 왕궁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1618
[서궁, 비극의 그림자]
광해군이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하고 '서궁'이라 부르면서, 경운궁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됩니다.
궁궐은 점차 퇴락해 별궁처럼 축소되었습니다.
1883
[외교의 중심지로 부상]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미국 공사관이 정동에 들어서면서,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이웃하여 들어옵니다.
경운궁 주변은 외국 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외국인 정착지'로 불리며 국제 외교의 요충지로 급부상합니다.
1896
[아관파천, 고종의 피난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이때 경운궁은 왕비들의 거처로 사용되며, 고종은 곧 이곳을 새로운 궁궐로 만들고자 합니다.
1897
[대한제국의 법궁이 되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이곳은 비로소 실질적인 궁궐의 기능을 회복합니다.
주변 외국 공사관의 보호를 기대하며 선택된 이 궁은 혼란의 시대에 대한제국의 중심이 될 준비를 시작합니다.
[황제국 선포와 정궁 위용]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 연호를 사용합니다.
동시에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 땅에 자주 독립의 염원을 담은 황제국 시대가 열립니다.
1900
[전기가 들어온 최초 궁궐]
경운궁은 담장 공사를 마침과 동시에 궁내에 발전소를 설비하여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궁궐 안에 전등이 밝혀진 것은 경운궁이 세계 최초였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향한 의지를 상징합니다.
1901
[덕혜옹주 위한 유치원]
고종은 이곳 준명당에 어린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을 마련해주며 애틋한 부정을 드러냈습니다.
궁궐 안에 유치원이 설립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시도로, 고종의 특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1902
[웅장한 중화전 완공]
경운궁의 법전인 중화전과 정문인 중화문이 마침내 완공됩니다.
2층 건물로 웅장하게 지어진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위엄을 상징했으며, 비록 외문인 조원문이 공간 부족으로 동측으로 꺾이긴 했지만, 법궁으로서의 체계를 갖추는 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1904
[대화재, 궁궐 집어삼키다]
함녕전에서 시작된 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궁의 중심부를 휩쓸며 정전 중화전을 비롯해 즉조당, 석어당 등 대부분의 전각을 잿더미로 만듭니다.
고종은 큰 슬픔 속에서도 즉시 재건을 명하며 궁궐의 재기를 다짐합니다.
1905
['을사늑약' 비극적 현장]
화재 후 재건 중이던 이곳 중명전에서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국권을 빼앗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중명전은 한국 근대사의 가장 슬픈 현장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1906
['대한문' 새 이름, 새 정문]
경운궁의 동쪽 문인 '대안문'이 수리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궐의 새로운 정문이 됩니다.
이는 국조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덕수궁의 상징적인 얼굴이 됩니다.
1907
['덕수궁'으로 개명되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후,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곳의 궁호가 '경운궁'에서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됩니다.
이는 양위한 상왕의 거처에 붙이던 관례적인 이름이었습니다.
1909
[한국 최초 서양식 건축]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인 석조전이 마침내 완공됩니다.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3층 석조 건물은 그리스 건축과 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진 형태로, 덕수궁이 근대화를 향한 문을 여는 상징이 됩니다.
1912
[태평로 확장과 궁궐 축소]
일제강점기, 종로와 숭례문을 잇는 태평로(현 세종대로)가 건설되면서 덕수궁의 동쪽 궁벽이 허물어지고 대한문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집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의 영역은 대규모로 축소되며 수난의 시대를 겪게 됩니다.
1919
[고종 서거, 궁궐 기능 상실]
덕수궁 함녕전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서거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덕수궁은 궁궐로서의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박물관이나 공원 등으로 그 용도가 변질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931
[공원으로 대중에게 열리다]
일제는 덕수궁을 대중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합니다.
이로 인해 중화전 주변 행각 등 많은 부분이 철거되지만, 역설적으로 덕수궁은 일반 대중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1950
[6.25 전쟁 속 지켜낸 궁]
6.25 전쟁 중 인민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들자 미군은 포격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딜 중위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처럼 파괴되어선 안 된다"며 포격을 반대하여 궁궐을 지켜냅니다.
그의 결단 덕분에 덕수궁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970
[대한문, 현재 위치로 이건]
태평로 확장으로 인해 도로 중앙에 '섬'처럼 남았던 덕수궁 대한문이 33미터 뒤로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써 대한문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덕수궁의 모습으로 최종적인 배치를 갖게 됩니다.
2011
['경운궁' 명칭 변경 보류]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명칭을 회복해야 한다는 민원이 제기되었으나, 문화재청은 100년 이상 사용된 명칭 변경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고려하여 명칭 변경 안건 심의를 '보류'하기로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