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궁궐, 사적, 문화유산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7:48
경희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서쪽에 자리한 서궐이자 이궁입니다. 광해군이 왕기를 누르려 지은 후 10대 임금이 정사를 보았고 한때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 3대 궁으로 꼽힐 만큼 웅장했죠.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복원 노력을 통해 역사의 흔적을 되찾고 있으며 그 잃어버린 영광을 상상하게 만드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1616
[경희궁의 핵심 전각 건립]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인 숭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주요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훗날 광해군이 이곳을 새 궁궐터로 삼는 기반이 됩니다.
1617
[광해군, 경덕궁 공사 착수]
광해군은 당시 인조의 아버지 사저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에 따라 그 집을 빼앗아 대규모 궁궐인 경덕궁(훗날 경희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왕실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광해군의 의지가 담긴 프로젝트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기술과 인력이 동원되어 수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어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1623
[인조반정 후 주요 궁궐 부상]
광해군이 폐위된 인조반정 이후,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되면서 경덕궁은 인조가 이어하는 사실상의 법궁이 됩니다.
이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는 등 조선 후기 왕실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습니다.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 사저가 있던 곳이라 훼철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으며, 효종, 현종은 잠시 머물렀고 숙종과 영조는 이곳을 정치적 거점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1760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개칭]
영조는 자신의 선조인 원종의 시호와 궁궐 이름 '경덕'이 같아 피휘(避諱)해야 한다는 이유로 궁궐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꿉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이곳에서만 19년간 머물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1829
[전각 대부분, 대화재로 소실]
순조 29년, 회상전에서 시작된 불로 경희궁의 전각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당시 100여 채가 넘는 건물들이 있었던 대규모 궁궐의 위용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비극이었습니다.
2년 뒤인 1831년에 중건되었으나, 이후 철종이 잠시 머물렀을 뿐 헌종 가례 이후로는 다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1865
[경복궁 중건의 희생양이 되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은 참혹한 운명을 맞습니다.
경복궁 재건에 필요한 막대한 목재와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등 일부를 제외한 모든 전각이 철거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지는 아픈 역사를 겪었습니다.
궁궐 터는 밭으로 분배되거나 조폐소, 양잠소 등이 들어서며 궁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910
[일제, 궁궐 터에 학교 건립]
일제는 조선 왕실의 마지막 혼을 지우듯 경희궁 터에 조선총독부중학교(훗날 경성중학교)를 세웁니다.
조선의 궁궐이 일본 식민 통치의 상징적인 교육 시설로 전락하는 치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26
[숭정전 등 주요 전각 강제 이건/훼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남산의 일본 불교 사찰로 팔려가 이건(현재 동국대 정각원)되었고,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 사당의 문으로 쓰이는 등 궁궐의 핵심 건물들이 팔려나가거나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회상전은 학교 기숙사로 쓰이다가 사찰에 매각 후 화재로 소실되었고, 흥정당과 황학정(관사대)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1944
[궁궐터 지하에 방공호 건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군 폭격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경희궁의 핵심 침전 터에 대규모 지하 방공호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궁궐 부지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며 마지막까지 훼손한 비극적인 사례입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었으며, 발파 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했습니다.
1980
[경희궁지, 사적지로 지정되다]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경희궁터는 마침내 대한민국의 사적 제271호로 지정됩니다.
이는 오랜 세월 훼손되었던 궁궐의 터가 국가적인 보호를 받으며 복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지정 전 현대건설이 부지를 매입하려 했으나, 시민 여론에 의해 서울시가 재매입하여 사적으로 지정했습니다.
1988
[흥화문, 제자리 찾아오다]
일제강점기 박문사 정문으로,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던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이 마침내 본래의 자리(근처)로 돌아와 복원됩니다.
이는 훼손되었던 궁궐의 상징을 되찾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흥화문은 본래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었으나, 복원 시 현재 위치에 남향으로 세워졌습니다.
1989
[숭정전 복원 시작]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던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복원 공사가 시작됩니다.
이는 가장 철저히 파괴되었던 궁궐의 핵심을 되살리려는 본격적인 노력이었습니다.
5년간의 공사를 거쳐 1994년 10월, 숭정전과 주변 행각이 완공되어 옛 위용을 되찾았습니다.
2013
[경희궁 2차 복원 계획 수립]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발표하며 2차 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방공호 철거,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등 주요 전각 재건, 궁장 복원 등을 포함한 대규모 계획으로, 경희궁의 완전한 부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016년 11월 서울시립미술관 철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 이전 등 장기적인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