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

제례, 종교시설, 역사유적,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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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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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 종교시설, 역사유적,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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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토지의 신 사와 곡식의 신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국가 제단입니다. 고대 중국의 좌조우사 원칙에 따라 궁궐의 오른쪽에 위치했으며 오색토는 천하 모든 토지가 왕의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고국양왕 8년(391년)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오랜 역사를 자랑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황제국을 표방하며 규모를 유지했고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의 제후국으로서 규모를 줄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직제가 폐지되고 부지가 공원화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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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고구려, 사직단 최초 건립]

한국에서 사직이 처음 세워진 기록으로, 고구려 고국양왕 8년에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했습니다.

이는 한국 사직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근개루왕도 475년에 사직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발언을 한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에 이미 사직 제도가 널리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783

[신라, 사직단 건립 기록]

신라 선덕왕 4년에 사직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중국식 종묘 제도가 있었으므로 더 이른 시기에 사직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983

[고려, 송나라 사직 제도 도입 논의]

고려 성종 2년에 박사 임노성이 송나라에서 태묘당과 사직당의 그림과 기록을 가져와 왕에게 바치며, 고려의 사직 제도 정비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991

[고려, 개경에 사직단 건립]

고려 성종 10년에 수도 개경(현 개성)의 서쪽에 처음으로 사직을 세웠습니다.

이는 송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으나, 고려는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의 제도를 따랐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려의 사직은 너비 5장, 높이 3자 6치 가량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었습니다. 이는 고려가 대내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1014

[강감찬, 사직단 중수 건의]

고려 현종 5년, 강감찬이 거란의 2차 침공으로 파괴되었던 사직의 중수를 왕에게 건의하여 다시 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1052

[개경 사직단 신축 및 황제 친제]

고려 문종 6년에 개경 황성 안 서쪽에 사직단을 새로 짓고, 그 달부터 황제가 몸소 가서 제사를 지내는 방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고려의 사직 제사는 매년 2월, 8월의 상무일과 납일에 행해졌습니다.

개경의 사직단 터는 당시 나성의 서문인 선의문 안쪽, 옛 불은사터 앞에 남아있다고 전해집니다.

1377

[명나라, 사·직 의례 통합]

중국 명나라 홍무제는 홍무 10년에 '사'와 '직'에 대한 예관의 의식을 하나로 합쳐 거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이후 영락제가 베이징에 사직단을 건립할 때도 적용됩니다.

1393

[조선, 사직단 터 물색 시작]

조선 건국 후 이성계는 즉위 이듬해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종묘와 사직의 지형도를 제작하며 사직단 건립을 준비했습니다.

1394

[조선 사직단 터 확정]

이성계는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사직의 터를 최종 확정했습니다.

이는 도성 내에 궁궐의 우측에 사직단을 둔다는 중국의 원칙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1395

[조선 사직단 공사 착공]

조선은 확정된 터에 사직단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외적으로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자처하며 사직의 너비를 2장 5자로 줄였지만, 기본적인 형식이나 제례 방식은 고려에서 쓰던 것을 큰 틀에서 이어받아 사용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중춘, 중추, 납일에는 대향사, 정월에는 기곡제, 가뭄에는 기우제를 각각 행하며 백성을 위한 기원을 이어갔습니다.

1420

[베이징 자금성 사직단 건립]

명나라 영락제는 영락 18년에 베이징 사직단을 자금성 남쪽, 천안문 서쪽의 중산공원(당시 이름 아님)에 건립했습니다.

사와 직을 하나의 장소에 모시는 단으로 세워져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이곳에는 천지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던 수령 천년 이상의 잣나무 거목이 많이 서있습니다.

1426

[세종, 사직단 관리 기관 설립]

세종 8년에 사직단 바깥 북쪽에 사직서(社稷署)를 세워 사직단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국가 제례의 체계적인 유지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1908

[일제, 사직 제사 강제 폐지]

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압으로 순종 황제는 사직제를 폐지한다는 칙령을 내리며 500년 이상 이어져 온 국가 제례의 맥이 끊기게 됩니다.

이는 한일병합을 앞둔 일제의 식민 통치 강화의 일환이었습니다.

1911

[사직단 부지 총독부 이관]

일제는 사직단 부지를 아예 총독부 소유로 넘겨버렸습니다.

이는 사직단의 국가적 의미를 격하하고 식민 통치에 활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914

[베이징 공원에 쑨원 운구 안치]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의 운구가 베이징의 사직단이 위치한 공원 안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호인 '중산'은 훗날 이 공원의 이름이 됩니다.

1922

[사직단 주변 도로 개설]

일제는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는 공사를 진행하여 단지의 원형 훼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사직단의 신성한 공간을 일상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시도였습니다.

1924

[사직단 일원 공원화]

일제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져 있던 대부분의 숲을 멸실시켰습니다.

이는 사직단의 신성한 공간이 공공의 유원지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8

[베이징 사직단 공원, 중산공원 개칭]

베이징의 사직단이 위치한 공원의 이름이 쑨원의 호인 '중산(中山)'을 따서 '중산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

황제가 제사를 행하던 배전(拝殿)은 중산당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60

[도시계획으로 사직단 부지 축소]

1960년대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해 사직단 부지가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문화재 보호가 미흡했음을 보여줍니다.

1970

[사직단 부지에 공공건물 건설]

1970년대에는 사직단 부지 내에 도서관, 수영장, 동사무소, 경찰서 등 다양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며 본래의 성격이 크게 희석되었습니다.

이는 사직단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더욱 약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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