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교, 신학대학, 기독교대학, 사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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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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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 신학교육기관. 1887년 배재학당 내 신학부로 시작하여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성장했다. 남녀 통합 교육을 선도하고 아빙돈 주석 번역 등 신학적 발전에 기여했으나 일제 강점기 폐교와 이단 시비 등 수난의 역사도 겪었다. 현재는 서울 서대문구에 캠퍼스를 둔 명문 신학대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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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한국 최초 신학 교육 시작]

미국 감리교 한국선교회가 목회자 양성을 위해 한성 배재학당 내에 신학부를 설립하고,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초대 책임자가 되어 교육 과정을 확정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기독교 계통 감리교 신학교육기관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 감리회에 보낸 선교 보고서에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한국 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을 실시했음을 기록하고 있어, 이 시점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립 연도로 본다.

1888

[영아소동으로 교육 중단]

근대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수구세력들이 서양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면서 이른바 '영아소동'이 발생했다.

이에 고종 황제가 서양인 활동을 일시 중단시키면서 배재학당 내 신학 교육도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1893

[신학 교육 재개]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육이 5년 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으로 보고되었으며, 정기적인 목회자 양성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독립적인 신학교 설립은 아니었지만, 배재대학 내부의 '신학반'에서 12명의 학생들이 성서, 설교학, 구원론 등을 정기적으로 공부하며 목회자 양성 과정을 밟고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1899

[신학회로 명칭 변경]

'신학반'이 한국인들의 투표를 통해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이 모임은 명칭 결정과 함께 모임 장소를 서울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시키고, 한국인 전도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하여 신학교육 확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900

[신학월보 발행]

신학회 교육 대상이 확대되자 교수진과 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교재 부족 문제는 월간 <신학월보> 발행을 통해 해결되었다.

1907

[감리교 협성 신학교 설립]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가 연합하여 '감리교 협성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후 고조된 초교파적 연합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감리교 연합 운동의 결실로 평가되며, 이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이어진다.

남 감리회는 별도의 신학 교육 없이 1899년부터 미 감리회의 신학회에 학생과 교수를 보내 위탁 교육을 시켜 초기부터 남북 감리교 연합 형태로 운영되었다.

1910

[현 캠퍼스로 학교 이전]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에서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지어 학교를 이전시켰다.

1919

[3.1 운동 참여]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감리교신학교 재학생 박희도,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 7명이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1

[한국 최초 여자 신학교 설립]

미 감리회와 남 감리회에서 운영하던 여자 성경 학원이 통합되어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여성 전도인을 양성하며 감리교 발전에 기여했다.

여성 신학교육은 1890년 무렵부터 개인 교습 형태로 진행되어 1900년 '여자 성경 학원', 1911년 '부인 성경 학원'으로 발전했다. 통합된 협성 여자 신학교는 서울 충정로에 마련되었다.

1925

[한국 최초 남녀통합 교육 실시]

남북 감리교가 협동으로 운영하던 남녀 신학교를 통합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2년간의 실험 교육을 거쳐 마침내 '감리교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 남녀 통합 교육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감리교 신학교'는 여학생과 남학생이 함께 복음을 배우는 신학 교육의 장이 되었으며, 당시 여성에 대한 불평등 구조가 팽배하던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931

[4년제 남녀공학 실시]

감리교 신학교는 전문학교령에 준하여 4년제 남녀공학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빌링스가 교장을, 구 협성여자 신학교 교장이었던 체틴이 부교장을 맡았다.

1935

[5년제 학제 개편]

감리교 신학교의 학제가 대학령에 따라 예과 2년, 본과 3년의 5년제로 개편되었다.

이는 교육 과정의 심화와 전문성 강화를 위한 변화였다.

1940

[삐라 사건 및 학교 폐교]

감리교 신학교 교정에 "일본인 학교에 조선 사람 보내지 말라" 등 반일 내용의 삐라가 발견되었다.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으로 여겨지며, 이 사건으로 변홍규 교장과 정일형 교수가 구속되고, 결국 10월 친일파 정춘수 감독에 의해 무기한 휴교(사실상 폐교)가 선언되었다.

1946

[감리교 신학교 재개교]

광복 후, 감리교의 목사들이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여 학교 재건을 추진했다.

1946년 4월 6일 연합회를 개최하여 감리교 신학교의 재건을 결의하고 변홍규 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면서, 3월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1950

[한국전쟁 피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감리교 신학교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1년 민가를 구입하고 판잣집을 지어 임시 가교사로 사용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육을 이어갔다.

1954

[서울 환도 및 교육 정상화]

휴전 후, 1954년 3월 13일 부산에서 마지막 졸업식을 마친 감리교 신학교는 4월에 서울로 다시 돌아와 교육을 정상화했다.

이후 매해 30~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1959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승격]

오랜 숙원이었던 감리교신학교의 대학 승격 문제가 해결되어,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정규 대학 인가를 받아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홍현설이 제1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웰치 채플 건립]

미국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그의 이름을 딴 웰치 채플이 건립되었다.

이 채플은 이후 2003년 웨슬리 채플로 재건축되기 전까지 학교의 주요 예배 및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1960

[화재 발생]

예상치 못한 화재가 발생하여 학교의 도서 및 학적부가 거의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학교 운영에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청암기념관 준공]

화재 이후 5월 10일 착공한 새 본관이 3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현재 대학원 건물로 사용되는 청암기념관이며, 초대 학장 홍현설 목사의 호를 따 이름 지어졌다.

1971

[대학원 정식 인가]

1969년 교단의 위촉으로 개설되었던 선교 대학원에 이어, 1971년 봄에는 대학원과 신학대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원 인가를 얻어 정식 개원하였다.

1980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

김용옥 학장 재임 중 교육부로부터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는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 연구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981

[김용옥 학장 기념관 준공]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갑작스럽게 병사한 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김용옥 학장 기념관'으로 명명된 도서관이 준공 및 개관되었다.

본래 도서관 및 교수 연구실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학생회실 등으로 사용된다.

1982

[종합관 준공]

새로운 종합관이 준공되었다.

충정로에 있던 구 협성여자신학교 기숙사 및 대지를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했으며, 이 건물 지하로 기숙사를 옮겼다.

1991

[변선환·홍정수 교수 사건]

변선환 학장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과 홍정수 교수의 '포스트모던' 신학 관련 글이 문제가 되어 이단 시비에 휘말렸다.

근본주의 세력의 반발로 두 교수는 출교 처분을 받았으나, 이 사건은 교단 정치 싸움이라는 비판과 감신 학생들의 큰 저항을 받았다.

변선환 교수는 1982년에도 '무신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발언으로 이단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1991년 사건은 종교재판으로 이어졌으며, 진행 과정의 공정성 문제와 함께 교단 내 신학적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3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개칭]

학교의 공식 명칭이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감리교신학대학교'로 변경되었으며, 학장 직함이 총장으로 바뀌었다.

당시 구덕관 교수가 총장직을 승계했다.

이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99

[백주년 기념관 완공]

1997년 전국대학종합평가와 건물 확보를 위해 감리교 교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백주년 기념관 건설이 시작되었고, 1999년 지하 3층, 지상 7층 규모로 완공되었다.

완공 후 교수 연구실과 도서관 등이 이곳으로 이동했다.

2003

[최대 규모 웨슬리 채플 건립]

기존 웰치 채플을 헐고 1,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현대적인 웨슬리 채플이 건립되었다.

6억 가량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감리교 산하 신학교 중 최대 규모의 채플로 손꼽힌다.

웨슬리 채플 건립 시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 보존 문제로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학생회는 웰치 채플을 보존하고 운동장 자리에 지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4

[학과제 폐지 및 학부제 실시]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실시하여 신입생은 과 배정 없이 신학부로 편성되어 2학년 때부터 전공을 선택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 의견 수렴 없는 학교 측의 일방적인 실시로 학생회와 학교 간 큰 갈등이 있었다.

학부제 실시 이후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가 어려워지고 학우들 간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2005

[장천생활관(기숙사) 완공]

광림교회 장천 김선도 목사의 헌금으로 지어진 300명 수용 규모의 현대식 기숙사 '장천생활관'이 완공되었다.

식당, 체육 시설, 기도실 등을 갖추었으며, 현재 감신대 건물 중에서 가장 최신식 시설을 자랑한다.

[운동장 지하화 및 주차장 완공]

기존 운동장을 헐고 지하 3층 규모의 주차장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다시 모래를 깔아 운동장을 조성하는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는 학교 시설 현대화의 일환이었다.

2017

[제14대 총장 김진두 목사 선출]

13대 총장이었던 박종천 교수의 임기가 만료된 후 이사회의 거듭된 파행으로 후임 총장 선출이 지연되었다.

결국 2017년 제10차 이사회에서 영등포중앙교회 김진두 목사가 제14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20

[제15대 총장 이후정 교수 선출]

이후정 교수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제15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취임했다.

그는 학교의 새로운 비전과 발전을 이끌어갈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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