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기업인, 삼성 창업주, 경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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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00: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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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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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기업 삼성을 창업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정미소로 시작해 무역 제조업 전자 중공업 언론 등 사업을 다각화하며 삼성을 한국 최고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제조업 불모지 한국에 산업의 씨앗을 뿌려 경제 성장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입니다.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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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이병철 탄생]

이병철은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호는 호암이며, 훗날 대한민국 재계를 이끄는 거목이 될 삼성그룹의 창업주입니다.

1910년 2월 12일, 이병철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경주 이씨이며, 호는 호암(湖巖)입니다. 그는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성장하여 삼성그룹과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 등 여러 대기업을 창업하게 됩니다.

1919

[지수공립보통학교 편입]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진주군 지수면에 위치한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웠습니다. 이병철은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1920

[경성으로 전학]

11살이 되던 해,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현 서울)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부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했으며,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1926

[박두을 여사와 결혼]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넷째 딸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했습니다. 자서전에는 1929년으로 밝혀졌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습니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29

[일본 와세다대학교 입학]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의 도움을 받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유학 생활 중 공장을 방문하며 기업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일본 유학 초기에는 책에 몰두했으나, 틈만 나면 일본 곳곳의 공장을 방문하며 공업의 실상을 살폈고, 이때부터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풍족한 생활비를 송금받으며 학업과 견학을 병행했습니다.

1931

[와세다대학교 자퇴 및 귀국]

건강 악화와 학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와세다대학교를 자퇴한 뒤 귀국했습니다. 고향에서 요양하며 건강을 회복했으나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건강 악화와 함께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1931년에 자퇴하고 귀국했습니다. 고향에서 요양하며 건강을 회복했지만, 한동안 친구들과 노름에 빠지는 등 무위도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936

[협동정미소 설립]

노름에 빠져 허송세월하던 중 아이들을 보며 충격을 받고 사업을 결심,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산에서 친구 2명과 함께 정미소인 '협동정미소'를 설립하며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고향에서 노름에 빠져있던 이병철은 어느 날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업을 결심하게 됩니다. 사업 구상 끝에 아버지로부터 연수 300석의 재산을 사업 자금으로 받아, 경성, 부산, 대구 등지를 물색한 뒤 마산을 사업지로 선정하여 친구 2명과 동업으로 정미소인 '협동정미소'를 차렸습니다.

1938

[삼성상회 설립 및 삼성그룹의 시작]

29세의 나이에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인교동에 '삼성상회'를 설립하며,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초석이 됩니다.

이병철은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당시 한 달 월급 약 15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현 인교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삼성상회는 청과류와 어물 등을 도매, 소매하며 중국으로 수출하는 무역업을 겸했습니다. 이 삼성상회가 바로 훗날 대한민국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모태가 됩니다.

1941

[삼성상회 주식회사 전환]

삼성상회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청과류, 어물 등의 도매 및 소매업뿐만 아니라 수출업까지 확장하여 중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1941년 삼성상회를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42

[조선양조 인수]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운영하며 주류 사업에도 발을 들였습니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1947

[경성으로 상경]

광복 후 사업 확대를 위해 경성(현 서울)으로 상경했습니다.

광복 후 1947년 경성부로 상경하여 사업 기반을 넓히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948

[삼성물산공사 창설]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여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며 사업의 영역을 더욱 넓혔습니다.

경성 상경 다음 해인 1948년에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50

[일본 시찰 및 한국 전쟁 발발]

일본 공업 시찰 후 귀국했으나, 그 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사업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과 수공업 등 공업계 및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습니다.

1951

[부산에서 삼성물산 재건]

한국 전쟁 직후 피난지인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세워 무역업을 재개하며 전후 복구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한국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었습니다.

1953

[제일제당 설립, 제조업 성공의 초석]

무역업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시작, CJ제일제당의 전신인 제일제당을 설립하여 설탕 산업에 진출하며 제조업 성공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1951년 삼성물산 재건 후 1953년 제조업에도 투자하여 제일제당을 설립, 설탕 산업을 시작으로 제조업 분야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54

[제일모직 설립]

제일모직을 설립하여 섬유 산업에도 진출했습니다. 이는 삼성그룹의 초기 제조업 기반을 확고히 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하여 섬유 산업에 진출했습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을 발판으로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61

[한국경제인연합회 초대 회장 역임]

대한민국 경제인들의 모임인 한국경제인연합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987년까지 장기간 회장직을 역임했습니다.

이병철은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당시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경제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64

[한국비료 인수 및 대구대학 이사장 취임]

한국비료를 인수하여 운영하며 비료 산업에도 진출했습니다. 또한,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의 재단 이사장이 되어 교육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1964년 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그 해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어 교육 사업에도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동양방송(TBC) 설립]

언론 사업 진출의 일환으로 동양라디오와 텔레비전 동양방송(TBC)을 설립하며 방송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삼성의 사업 다각화에 기여했습니다.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 산업에 진출했습니다.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알리앙스 프랑세즈 이사 위촉]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로 위촉되어 문화 교류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1964년 8월 13일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었습니다.

1965

[중앙일보 창설]

언론사 중앙일보를 창설하며 언론 사업의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도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겨졌습니다.

1966

[사카린 밀수 사건 적발]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사카린을 밀수하려다 적발되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삼성그룹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병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울산에 공장을 짓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부산세관에 적발되었습니다. 이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불리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병철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삼성그룹 명예회장 직책으로 한동안 물러나 있었습니다. 이후 아들 이맹희의 회고록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의 공모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차남 이창희 수감]

사카린 밀수 사건의 여파로 한국비료 상무로 재직 중이던 차남 이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66년 11월,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던 차남 이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는 이병철 일가에 큰 시련이었습니다.

1968

[경영 복귀 및 삼성전자 설립]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은 다시 경영에 복귀하며 삼성전자를 설립, 그룹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은 1968년 2월 다시 경영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모직회사를 성장시키고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삼성그룹이 전자산업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69

[삼성전자 및 삼성전기 설립]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훗날 삼성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핵심 기반이 됩니다.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 산업에 본격 진출했습니다. 이 두 회사는 훗날 삼성그룹의 핵심 성장 동력이 되었으며, 특히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1970

[와세다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수여]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970년 이전에 자퇴했던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972

[제일합섬 설립]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여 합성섬유 제조 시설을 갖춘 제일합섬을 설립하며 섬유 사업을 고도화했습니다.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삼성그룹의 섬유 사업을 더욱 전문화하고 고도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

[중화학 공업 진출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설립)]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수출 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발맞춘 대규모 투자의 결과였습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 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75

[제일합섬 공장 시스템 공개]

제일합섬의 혁신적인 공장 시스템을 특별히 외부에 공개하여 기술력과 경영 투명성을 선보였습니다.

1975년 5월, 제일합섬의 첨단 공장 시스템을 특별히 외부에 공개했습니다. 이는 당시 삼성의 기술력과 경영 노하우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6

[위암 투병 및 회복]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수술과 치료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경영에 매진했습니다.

1976년에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후에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며 기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77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취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후원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는 호암미술관 건립으로 이어집니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미술에 심취했던 이병철은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문화 예술 분야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삼성전자 단일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하며 기업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화했습니다.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했습니다. 이는 삼성그룹의 전자 사업을 통합하고 집중 투자하는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훗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81

[한일경제협회 고문 위촉]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어 양국 간의 경제 교류 및 협력 증진에 기여했습니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이듬해 다시 재위촉되어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경제 교류 및 협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82

[삼성반도체통신 설립, 반도체 산업 진출]

미래 성장 동력으로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며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병철은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여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는 훗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으며, 그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보스턴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수여]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으며 그의 경영 철학과 업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기업 경영 능력과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1984

[삼성전자 상호 변경]

삼성전자의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변경하며 기업의 정체성과 미래 비전을 강화했습니다.

1984년 8월 삼성전자의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삼성전자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전자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985

[폐암 진단]

폐암 진단을 받았으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말년까지 기업 경영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1985년에 폐암 진단을 받았으나, 그는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다.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라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그의 강인한 정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87

[말년의 수상 및 고문직 사퇴]

말년에 금탑산업훈장과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는 등 생애 마지막까지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달 초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며 공적인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1985년 폐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는 등 그의 기업가적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1987년 11월 초에는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며 생의 마지막 공적인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병철 별세]

7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기업가로 평가받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87년 11월 19일, 7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 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후 전두환 정부 때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으며, 아들 이건희와 손자 이재용이 삼성그룹의 총수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타계는 대한민국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의 퇴장이었습니다.

1995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 추서]

사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을 추서받아 그의 기업가 정신과 업적이 다시 한번 기려졌습니다.

이병철은 1995년 사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을 추서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선구적인 기업가 정신과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를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1999

1999.12 사후 12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기업인 선정]

매일경제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에 선정되어 대한민국 경제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1999년 12월, 매일경제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이병철이 대한민국 근현대 경제사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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