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기업인, 총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01:09:51
대한민국 재계의 거인이자 삼성그룹의 제2대 총수.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혁신가. D램에서 20개 이상의 세계 1위 제품을 만들고 국내 주식 가치 9조 원을 최초로 돌파한 인물. 비자금 뇌물 공여 차명 계좌 등 논란 속에서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국 경제사를 장식했다.
1942
1966
1967
1979
1987
[삼성 2대 총수 시대 개막]
아버지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그룹 제2대 총수이자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하며 '이건희 시대'의 서막을 열다.
1992
[D램(DRAM) 세계 1위 등극]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 약 10년 만에,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며 D램 분야 세계 1위 메이커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당시 시장을 주도하던 일본 기업들을 제친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배경: 1983년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후, 삼성은 64K D램부터 4M D램까지 격차를 빠르게 추격해왔습니다.
1위 등극: 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D램 분야에서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제1의 메이커로 부상했습니다.
1993
["모두 바꿔라!" 신경영 선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파격적인 선언과 함께 '신경영'을 주창하며 삼성의 혁신을 이끌다.
이 선언은 삼성전자가 D램 시장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다.
1994
[반도체 '초격차' 전략 (256M D램)]
1993년 신경영 선언의 '질(Quality)' 경영이 반도체 기술력으로 구현된 사건입니다. 이듬해인 1994년 8월,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은 품질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서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회장의 질 중심 경영 철학은 D램 개발에서 즉각적인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1992년 64M D램으로 1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994년 8월,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1995
[구미사업장 '애니콜 화형식']
1994년 말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의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150억 원 상당의 불량 제품 15만 대를 구미사업장에서 전량 소각하도록 지시한 사건입니다. 이는 "불량은 암이다" 라는 이 회장의 품질 경영 철학을 전 임직원에게 각인시킨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삼성전자가 '품질경영'을 조직 문화로 뿌리내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배경: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1년이 지나도 소비자 불만이 계속되고, 특히 '애니콜' 브랜드로 막 시작한 휴대폰 사업의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이 회장은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적자 내고 악평 받는 사업을 왜 하는가"라고 질타하며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습니다.
사건: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폰, 무선전화기 등 15만 대(당시 150억 원 규모)가 쌓여 불태워졌습니다.
전략적 함의: 이는 단순한 불량품 폐기가 아니었습니다. (1) 매몰 비용(Sunk Cost)의 파괴: 이미 투입된 비용(150억)보다 미래의 브랜드 신뢰라는 더 큰 가치를 선택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 조직 문화 혁신: "품질"이 타협 불가능한 최우선 가치임을 고통스러운 시각적 충격을 통해 조직 전체에 강제한 것입니다.
1996
[IOC 위원으로 국제 활약]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며 스포츠 분야에서도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다.
1997
[1997년 신년사 위기 경영]
이건희 회장은 1997년 1월 신년사를 통해, 국가적 외환위기(IMF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심각한 위기를 경고했습니다. 그는 "삼성은 물론, 나라마저 2류, 3류로 떨어질 수 있다" 고 선언하며, '헝그리 정신'과 '모방 정신'을 버리고 '자율과 창의'에 기반한 경영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선제적 위기 인식은 삼성이 1996년부터 비상 경영에 돌입하여 IMF 위기를 타 기업보다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97년 말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전, 1996년 호황기 속에서도 이 회장은 이미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1997년 1월 신년사에서 그는 "외부환경의 위기, 내부혁신의 위기, 시간의 위기"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며, 21세기를 준비할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절박함을 토로했습니다.
삼성은 이미 1996년부터 비상 경영에 돌입,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경영 전반의 원가를 절감하는 선제적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삼성은 외환 위기의 타격을 최소화하며 생존했고, 2002년에는 삼성의 무역수지 흑자(145억 달러)가 한국 전체 흑자(108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2006
['보르도 TV' 글로벌 TV 시장 1위]
2005년 '밀라노 선언'을 통해 '디자인 경영'을 선포한 지 1년 만에 , 와인잔을 형상화한 '보르도 TV'를 출시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제품의 성공으로 삼성전자는 2006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액 기준 글로벌 TV 시장 1위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삼성전자의 경영 핵심이 '품질'을 넘어 '디자인'과 '브랜드'로 성공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2008
[비자금 사건으로 회장직 퇴진]
삼성 비자금 사건이 불거지며 조세 포탈 혐의로 기소, 경영 일선에서 전격 물러나다.
이 사건은 그룹의 지배 구조 및 편법 승계 논란을 촉발했다.
2009
[세계 부자 순위 205위]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대한민국 최고 갑부로서 30억 달러의 재산으로 205위를 기록하다.
2010
[삼성전자 회장 경영 복귀]
2년간의 퇴진 후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에 전격 복귀하며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제품이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론을 제기하다.
[국내 최초 주식가치 9조 돌파]
국내 최초로 보유 주식 지분가치가 9조 2,230억 원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주식 부호로 기록되다.
이는 한국 경제사에 기록적인 이정표를 남겼다.
2011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 달성]
010년 '갤럭시 S'를 출시한 지 불과 1년 만에, 삼성전자가 2011년 연간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애플과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갤럭시 S' 시리즈의 성공적인 안착과 빠른 시장 대응(패스트 팔로워 전략)이 결실을 본 것입니다. 2012년 1분기에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전체 휴대폰 시장에서도 노키아의 14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1위에 등극했습니다.
이는 1993년 '품질', 2006년 '디자인'에 이어 2011년 '속도와 플랫폼 적응'이라는 이 회장 경영의 3번째 성공입니다. 하드웨어 제조 기술력(반도체, 디스플레이)에 '갤럭시'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입히고, '안드로이드'라는 개방형 플랫폼에 신속하게 적응하여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원불교 센터에 120억 기부]
아내 홍라희 여사와 함께 원불교 해외 포교를 위한 '원달마센터' 건립에 120억 원을 기부하다.
2014
[심장마비로 장기 와병 시작]
한남동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의식불명 상태로 장기 투병 생활이 시작되다.
[사망 오보 해프닝 발생]
특정 인터넷 매체에서 이건희 회장의 사망 보도가 나왔으나, 삼성 측은 사실무근이며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히며 해프닝으로 일단락되다.
2016
[성매매 의혹 영상 유출]
이건희 회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유흥업소 여성들에게 금품을 건네는 모습이 담긴 성매매 의혹 동영상이 언론에 공개되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다.
2018
[차명계좌 및 횡령 혐의 입건]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임원 명의의 차명계좌를 통한 조세 포탈과 일가 주택 공사비 법인 자금 대납 혐의로 이건희 회장을 입건하고 검찰에 송치하다.
2020
[영원한 이별, 이건희 별세]
약 6년 5개월간의 장기 투병 끝에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9세로 별세하다.
사망 직전 보유 재산은 약 23조 7,100억 원으로 알려져 대한민국 최고 갑부였던 그의 삶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