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신문사, 언론사, 일간지, 민족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0:18
1904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대표 종합 일간지.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자존을 일깨운 횃불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 국내 최초 공개채용 기자 여기자 채용 신춘문예 효시 등 언론 혁신을 이끌었다. 현재 호반그룹 계열사로 편입 국내 주요 일간지로서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
- 민족 언론의 횃불, 대한매일신보 창간!
- 을사조약에 저항하다
- 국채보상운동, 민족혼을 깨우다
- 매일신보, 친일의 역사 시작
- 신문, 스냅사진으로 생동감을 더하다
- 기자, 공개 채용 시대를 열다
- 신춘문예의 효시, 소설 현상모집
- 언론사 최초의 여기자 탄생
- 서울신문, 새로운 시작을 알리다
- 언론사 최초의 시사주간지 창간
- 현대 신춘문예의 골격을 만들다
- 6.25 전쟁, 신문은 멈추지 않았다
- 한글판 서울신문, 한글 시대를 열다
- 이순신 동상 건립, 국민의 염원을 담다
- 국내 최초 연예지 《TV 가이드》 탄생
- 한국 신문, CTS 시대를 열다
- 국내 첫 스포츠신문 《스포츠서울》 탄생
- 언론계 최초 인터넷 뉴스 시대 개척
- 종합일간지 최초 주 5일 발행 시작
- 서울신문, 호반그룹 품으로
- 최고의 수익성, 10대 종합일간지 중 영업이익 1위
1904
[민족 언론의 횃불, 대한매일신보 창간!]
러일 전쟁을 앞두고 일제의 간섭 없이 대한제국의 실상을 알리고자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한글과 영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겨레의 독립자존을 일깨운 민족의 횃불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국권 회복에 앞장섰습니다.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이었던 어니스트 베델(배설)과 고종의 통역사였던 양기탁은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한제국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극비리에 영문 일간지 《코리아 타임스》를 실험 창간한 후, 그 해 7월 18일 한글과 영문(코리아데일리뉴스)을 함께 쓴 《대한매일신보》를 정식으로 창간했습니다. 박은식 주필과 신채호, 안창호 등 항일투사들이 기자진으로 참여하여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일깨우는 횃불이 되었습니다.
1905
[을사조약에 저항하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의 구속을 폭로하고 을사오적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고종의 밀서 보도까지 이어지며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토 히로부미의 서울 방문 목적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귀속시키려는 것이라고 먼저 보도하며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황성신문의 장지연 사장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구속되자, 이를 그대로 게재하고 "황성신문 기자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을사오적'에 대해서는 '매국대신', '역당'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으며, 고종은 베델에게 친필 특허장을 내리고 매월 1000원의 경비를 보조하며 항일 투쟁을 지원했습니다. 1906년 1월 고종의 '을사조약 부동의 밀서'가 영국 트리뷴지에 보도되자, 이를 대서특필하며 국민 저항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1907
[국채보상운동, 민족혼을 깨우다]
일제가 강제로 만든 빚 1,300만 원(이후 1,650만 원)을 국민성금으로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신문 발행 부수가 1만 3천 부를 넘어서는 등 국민적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일제가 도로, 시설, 금융기관 개선 명목으로 멋대로 써서 생긴 1300만 원(연이율 6.5%)의 빚을 국민 성금으로 갚으려는 국채보상운동을 대구민의소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채 1300만원보상취지서’ 전문을 싣는 등 대대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국민들은 전국에서 담배를 끊고 월급을 아끼는 등 동참하여 1907년 봄 4만 명이 성금을 냈으며, 대한매일신보 부수는 1908년 5월 1만 3천 부를 넘겼습니다. 통감부의 보도지침을 어겨 15회나 압수당하면서도 의병 활동과 헤이그 밀사 소식 등을 구체적으로 보도하며 항일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1908
[양기탁, 일제의 탄압에 맞서다]
일제는 국채보상 성금 횡령 누명을 씌워 공동 창간자인 양기탁을 구속했습니다.
치외법권 지역인 회사 내에서 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양기탁은 5차례 공판 끝에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1909
[베델 사망과 신문 매각]
대한매일신보를 굳건히 지키던 창간자 베델의 사망 이후, 일제 통감부는 1910년 5월 비밀리에 대한매일신보를 사들였습니다.
이로 인해 양기탁 등 항일 인사들이 신문을 떠나게 됩니다.
1910
[매일신보, 친일의 역사 시작]
한일합방 바로 다음 날, 대한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흡수되어 '대한' 두 글자를 떼고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선전지로 전락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활동에 골머리를 앓던 일제는 베델을 추방하고 양기탁을 누명 씌워 구속하는 등 탄압을 이어갔습니다. 베델 사망 후, 1910년 5월 통감부는 알프레드 만함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비밀리에 신문을 사들였고, 양기탁의 발행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일합방 다음 날인 8월 30일, 경성일보에 흡수된 형태로 《매일신보》가 창간되어 조선총독부의 선전지로 전락했습니다.
1913
[신문, 스냅사진으로 생동감을 더하다]
《매일신보》는 신문에 최초로 스냅사진을 게재하여 신문에 생동감을 높이는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1913년에 매일신보는 신문에 최초로 스냅사진을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더욱 생동감 있는 소식을 전달하며 신문 지면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1918
[기자, 공개 채용 시대를 열다]
지인 위주로 채용하던 관행을 깨고, 언론사 최초로 기자를 공개 채용했습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홍난파, 유지영 등이 기자로 채용되는 등 투명한 인사 시스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매일신보는 당시 알음알음 지인 위주로 이루어지던 기자 채용 방식을 깨고, 1918년 언론사 최초로 '공개채용'을 실시했습니다. 이 공개채용을 통해 홍난파, 유지영 등 쟁쟁한 인물들이 기자로 채용되며 언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1919
[신춘문예의 효시, 소설 현상모집]
민간 신문들이 채택하게 되는 신춘문예의 효시가 된 '소설작품 현상모집'을 언론사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1등 150원, 2등 100원, 3등 50원의 상금을 걸어 문학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19년 8월, 매일신보는 '소설작품 현상모집'을 언론사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이는 이후 민간 신문들이 채택하게 되는 '신춘문예'의 시초가 되었으며, 당시 1등 상금이 150원, 2등 100원, 3등 50원으로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1920
[언론사 최초의 여기자 탄생]
역사상 처음으로 여기자를 채용하며 언론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채용된 이각경 기자는 교육, 가정, 여성, 아동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기사를 남겼습니다.
1920년, 매일신보는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여기자를 채용하며 사회적 파급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채용된 이각경은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은희보다 4년 앞선 최초의 여기자로, 교육, 가정, 여성, 아동 문제 등 당대의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한 수많은 기사를 남기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37
[미래형 뉴스 전달, 전광속보대 도입]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옥상에 미래 전광판의 시초가 되는 '전광속보대'를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뉴스를 빠르게 전달하는 신기술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당시 최첨단 정보 전달 방식이었습니다.
1938
[매일신보, 제호 한자 바꾸다]
제호에 한자 '申' 대신 '新'을 넣어 《매일신보》(每日新報)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주식 대부분을 보유하여 논조는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45
[서울신문, 새로운 시작을 알리다]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아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사라지고, 《서울신문》이라는 제호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독립선언서 작성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 선생을 사장으로 세워 역사적 전환을 알렸습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지령 13738호를 계승했습니다.
광복 후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3.1 독립선언서 작성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위창 오세창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서울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창간' 대신 '혁신 속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대한매일신보부터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인 제13738호를 계승하여 아픈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오세창 사장은 취임사에서 매일신보를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로 규정하고 새 출발을 선언했으며, 진보적인 논조를 지향하되 좌파 선전을 따르지 않는 '중립지'로서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1946
1948
1946년 월간지 《신천지》에 이어, 1948년 10월에는 국내 언론사 중 최초의 시사주간지인 《주간 서울》을 창간하며 깊이 있는 시사 보도와 분석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1949
[현대 신춘문예의 골격을 만들다]
언론사 중 처음으로 단편소설 분야를 신춘문예에 도입하여 시, 동요, 동화 등과 함께 현대 신춘문예의 골격을 완성했습니다.
이는 소설가 한강, 편혜영, 시인 나태주 등 스타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서울신문은 언론사 중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신춘문예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시, 동요, 동화 등 기존 3개 분야 외에 소설을 추가하여 현대 신춘문예의 기본적인 골격을 완성한 것으로, 이후 소설가 한강, 편혜영, 하성란, 시인 나태주 등 수많은 스타 작가들을 배출하는 등용문이 되었습니다.
1950
[6.25 전쟁, 신문은 멈추지 않았다]
6·25 전쟁 발발 후 박종화 사장 등 간부진과 기자 전원이 비상 출근하여 급박한 전황 속에서도 26일 6차례, 27일 5차례 호외를 발행하며 국민들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신문은 박종화 사장 등 간부진과 편집국 기자 전원이 출근하여 비상 제작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급박한 전시 상황 속에서 26일 오후 2시까지 무려 6차례의 호외를 찍었고, 27일에도 5차례 호외를 더 발행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들에게 최신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서울신문, 전쟁의 아픔을 겪다]
한강 다리 폭파로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서울신문 직원 8명이 목숨을 잃거나 납북되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들은 북한군의 표적이 되어 체포되거나 피살되기도 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9시까지도 사장과 주필,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와 공무국 요원 20여 명이 회사에 남아있던 서울신문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의 요청으로 유엔군 참전 소식을 담은 호외 10만 장을 찍어냈습니다. 직원들이 회사를 떠난 시점은 28일 새벽 2시 30분, 이미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끊긴 후였습니다. 결국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직원들 중 8명이 목숨을 잃거나 납북되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비서 이승로는 북한군 총탄에 순직했고, 김경진 이사, 김진섭 출판국장, 박종수 편집부국장, 이종석 사회부장 등이 납북되었으며, 사회부 기자 한규호는 취재 중 피살되었습니다.
1951
[포성 속에서도 진중신문 발행]
중공군 참전으로 1·4 후퇴를 겪은 후, 정부가 서울로 복귀하기 전인 포성이 울리는 서울에서 19일간 '진중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최대 3만 부까지 매진되며 전시 상황에서 국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56
[한글판 서울신문, 한글 시대를 열다]
한문을 위주로 했던 신문 역사에서 '한글판 서울신문'을 발행하며 한글 신문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외솔 최현배 등 한글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괄호 안에 한자를 넣는 신문 표기법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1956년 10월 18일, 서울신문은 '한글판 서울신문'을 발행하여 한문을 위주로 했던 기존 신문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외솔 최현배 등 한글학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괄호 안에 한자를 넣는' 표기법이 이때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68
[이순신 동상 건립, 국민의 염원을 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아무런 조형물이 없던 시기에, 서울신문이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를 발족하고 모금 활동을 벌여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건립했습니다.
이는 국가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 서울 광화문 광장(세종로)에 아무런 조형물이 없자, 서울신문은 국가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조형물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각계 인사 설문조사와 2년에 걸친 제작 과정을 거쳐 국민성금 모금 활동을 벌여 1968년 4월 27일,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건립했습니다. 이 동상은 이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선데이 서울》 창간, 연예오락 주간지의 시작]
연예오락주간지 《선데이 서울》을 창간하여 대중의 흥미를 사로잡는 새로운 장르의 잡지를 선보였습니다.
1970
1973
1975
1980
[서울신문, 조간 시대 개막]
오랜 기간 석간으로 발행되던 서울신문이 조간으로 전환하며 독자들에게 더욱 빠른 뉴스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1981
[사회 공헌의 시작, 교정대상 시상]
최우수 교정공무원을 뽑는 교정대상과 우수 청년농민을 뽑는 농어촌청소년대상을 1981년부터 시상하며 사회 공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초 연예지 《TV 가이드》 탄생]
국내 최초의 연예 주간지 《TV 가이드》를 발간하며, 현재 수많은 매체로 확대된 연예 전문지의 시초를 마련했습니다.
1981년 7월 18일, 서울신문은 국내 최초의 연예 주간지인 《TV 가이드》를 발간했습니다. 이는 당시에는 전무했던 연예 전문 미디어 시장의 문을 열었으며, 현재 수많은 연예 전문 매체들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1984
[예술 전문 비평지 《예술과 비평》 창간]
불모지로 여겨졌던 예술 분야의 전문 비평을 활성화하기 위해 《예술과 비평》을 창간하여 예술 담론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1985
[한국 신문, CTS 시대를 열다]
한국 신문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사건으로, 활자 방식에서 컴퓨터를 활용한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로 신문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제작 시간을 1시간 단축시키고 고속 인쇄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1985년 1월 1일, 서울신문은 한국 신문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를 도입했습니다. 당시까지 활자를 일일이 만들어 신문을 제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컴퓨터를 활용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며, 제작 시간을 1시간 단축하고 기사와 광고 제작을 간편하게 만들었으며, 고속 인쇄를 가능하게 하여 신문 제작 기술의 100년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제야의 종, 보신각종 주조 완성]
국민성금 모금 활동을 통해 몸통에 금이 간 기존 보신각종을 대체할 새 종을 주조하여 보신각에 걸었습니다.
이 종은 매년 '제야의 종'으로 타종됩니다.
[광화문 프레스센터 사옥 이전]
서울신문이 현재의 광화문 사옥인 세종대로의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사옥으로 이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국내 첫 스포츠신문 《스포츠서울》 탄생]
한국 신문 역사상 처음으로 스포츠 전문 신문인 《스포츠서울》을 창간했습니다.
'가로쓰기'와 1면 컬러 인쇄, 프로야구 스코어 란 등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하며 창간호 70만 부가 30분 만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1985년 6월 22일, 서울신문은 국내 최초의 스포츠신문인 《스포츠서울》을 창간했습니다. CTS를 바탕으로 100년 신문 역사상 처음으로 혁신적인 '가로쓰기'를 도입하고, 1면 컬러 인쇄, 프로야구 스코어 란 등 파격적인 지면 구성을 선보였습니다. 언론과 방송의 관심 속에 인쇄된 《스포츠서울》 창간호는 무려 70만 부가 발행 30분 만에 매진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스포츠 신문의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1990
1992
[시사주간지 《뉴스피플》 창간]
시사 정보를 다루는 주간지 《뉴스피플(NewsPeople)》을 창간하여 독자들에게 심층적인 시사 분석을 제공했습니다.
1993
[기자 1인 1PC 도입, 디지털 전환 가속화]
언론 무한경쟁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기자 1인당 1PC를 보급하여 디지털 작업 환경을 구축하고 기사 제작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1995
[언론계 최초 인터넷 뉴스 시대 개척]
'서울신문∙스포츠서울뉴스넷'을 출범시켜 언론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24시간 뉴스 공급을 위한 무정전 시스템을 도입하며 하루 2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95년 11월, 서울신문은 '서울신문∙스포츠서울뉴스넷'을 출범시키며 언론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국내 언론사 중 처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24시간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무정전 시스템을 도입하여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출범 직후부터 하루 2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터넷 뉴스 서비스의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1998
[서울신문, 《대한매일》로 재탄생]
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로, 제호를 《대한매일》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지령을 제외하고 《대한매일신보》와 《서울신문》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2004
[독자를 위한 선택, 서울신문 제호 복원]
독자에게 더욱 친숙한 명칭이자 한반도를 대표하는 권위 있는 신문으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서울신문》 제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007
[온라인 시대, 《나우뉴스》·《서울신문NTN》 창설]
온라인 전문 뉴스 콘텐츠 《나우뉴스》와 연예 전문 매체 《서울신문NTN》을 창설하며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발맞춰 나갔습니다.
2009
[서울신문, 방송 사업에 진출하다]
서울신문STV 개국으로 방송 사업에 진출하며 미디어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이후 스포츠서울, 서울신문 STV는 분사했고, 서울신문 NTN은 폐간 후 정보가 서울En으로 이전되었습니다.
2018
[종합일간지 최초 주 5일 발행 시작]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종합일간지 중 최초로 토요일자 신문 발행을 중단하고 주 5일 발행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2018년 7월부터 서울신문은 국내 종합일간지 중 최초로 토요일자 신문 발행을 중단하고 주 5일 발행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이는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으로, 언론계에 새로운 발행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2021
[서울신문, 호반그룹 품으로]
2018년 호반건설이 포스코그룹 지분을 인수하며 3대 주주로 올라선 데 이어, 2021년에는 우리사주조합의 지분까지 인수하며 호반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되었습니다.
호반그룹은 서울미디어홀딩스를 통해 서울신문과 EBN 등의 매체를 자회사로 둔 미디어그룹이 되었습니다.
서울신문은 과거 기획재정부가 대주주인 '공영' 성격의 언론사였으나, 2018년 호반건설이 포스코그룹 지분을 인수하며 3대 주주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2021년 하반기에는 우리사주조합의 지분까지 대거 인수하여 호반그룹이 서울신문 지분의 절반가량, 의결권의 절반 이상을 단독으로 보유하게 되면서 호반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호반그룹은 지주사 서울미디어홀딩스를 통해 서울신문과 EBN 등의 매체를 자회사로 둔 미디어그룹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023
[최고의 수익성, 10대 종합일간지 중 영업이익 1위]
2022년 매출액 기준 5대 일간지로 자리 잡은 후, 2023년에는 매출액 814억 원, 영업이익 93억 원을 기록하며 10대 종합일간지 중 가장 높은 영업이익을 올렸습니다.
이는 언론사의 재정 건전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서울신문은 2022년에 매출액 832억 원, 영업이익 80억 원을 기록하며 매출액 기준 국내 5대 일간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2023년에는 매출액 814억 원, 영업이익 93억 원을 달성하며 국내 10대 종합일간지 중 가장 높은 영업이익을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재무 성과를 통해 언론사의 건전성을 입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