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문사, 언론사, 일간 신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0:08
1920년 4월 1일 민족주의·민주주의·문화주의를 기치로 창간된 대한민국 대표 일간 신문. 일제강점기 브나로드 운동 일장기 말소 사건 등으로 민족 계몽과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섬. 광복 후에도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한 백지 광고 사태 등 여러 도전과 논란을 겪으며 역사적 순간들을 함께 함. 다양한 문화·스포츠 사업을 주최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했으며 2011년 채널A 개국 등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함.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언론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
1920
[민족의 대변인, 동아일보 창간]
3.1 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허가로 김성수,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동아일보가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첫 발행되었습니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탄압받던 조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창간 당시 구독료는 3전(지금의 약 900원)이었으며, 서울 종로구 화동의 한옥 건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 비판, 첫 무기정간]
창간 직후, 일본 '3종 신기'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제1차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일제는 동아일보의 신문과 윤전기까지 압수하며 언론 탄압을 시작했고,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4차례의 무기정간과 수많은 압수, 삭제 등의 수난을 겪었습니다.
1923
[도지사 특혜 비판 보도]
충청북도 도지사 박중양의 사적인 휴양 및 유흥 행위를 집중 보도하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권력 감시라는 언론의 역할을 초기부터 충실히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당시 윤치호가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하며 민족 정론으로서의 위상을 지지했습니다.
[최초의 전조선여자정구대회]
조선 사회의 인습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일깨우고자, 대한민국 스포츠 통틀어 최장수 단일 종목 대회인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최초로 개최했습니다.
단순한 스포츠 대회를 넘어 여성의 사회 참여와 지위 향상을 위한 대규모 캠페인으로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오늘날 '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924
[학생웅변대회 주최]
미래 세대의 리더십과 표현력 향상을 위해 '학생웅변대회'를 주최했습니다.
이는 청년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기회를 제공하며 민족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1925
[동아신춘문예 제정]
근대문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문학작품 공모전인 '동아신춘문예'를 제정했습니다.
이는 당시 문인들에게 중요한 등단 기회가 되었으며, 한국 문학의 토대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 웅변대회]
조선 최초로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에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여성의 권리 신장과 기회 균등을 주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6
[2차 무기정간, 송진우 징역]
'조선농민에게'라는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제2차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주필이자 3.1운동 민족대표 49인 중 한 명인 송진우와 발행인 김철중에게 각각 징역형이 선고되는 등 가혹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1928
[문맹 퇴치 운동 제창과 중단]
문맹 퇴치와 한글 보급을 목표로 하는 '브나로드 운동'을 특집 기사로 제창했으나, 일제가 '반일 감정 고취'를 이유로 검열하고 금지하여 중단되었습니다.
이는 민족 계몽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보여줍니다.
1929
[수영경기대회 및 작품 전람회]
민중 계몽과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 '수영경기대회' 및 '남녀학생작품 전람회'를 주최했습니다.
이는 학생들에게 건강한 활동과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며 당시 사회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931
[동아마라톤대회 창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내 최고(最古)이자 권위 있는 마라톤 대회인 '동아마라톤대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한국 스포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다양한 스포츠 행사를 통해 민족 체육의 육성에도 힘썼습니다.
['브나로드 운동' 대대적 전개]
3년간 중단되었던 문맹 퇴치 운동을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구호 아래 '브나로드 운동'으로 다시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이 운동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요 내용이 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의식 있는 청년들이 농촌 계몽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으로, 동아일보는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강화하고 민중 계몽에 열중했습니다.
1933
[최초 여성 월간지 '신가정']
일간 신문사로서는 최초로 여성 월간지 '신가정'(현 '여성동아')을 창간했습니다.
제목 외 모든 기사를 순 한글로 제작하고 요리, 편물, 염색 강습회는 물론 부인 밤줍기 대회, 야유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주부들의 사회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한글맞춤법통일안 채택]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따른 새로운 철자법을 채택하여 신문에 적용했습니다.
이는 한글 보급과 민족정신 강화에 기여하려는 동아일보의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계몽 활동이었습니다.
1936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가슴 부분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하여 강제 정간을 당했습니다.
이는 일제에 대한 강력한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동아일보의 항일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940
[일제에 의한 강제 폐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창간 이후 20년간 4차례의 무기정간, 2,000회 이상의 발매금지, 89회 압수, 2,423회의 기사 삭제 등 상상할 수 없는 탄압을 견뎌냈으나, 결국 총독부의 회유와 협박으로 강제 폐간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제2대 사주 인촌 김성수는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하는 등 일제에 맞섰습니다. 총독부는 회계 부정을 구실로 간부들을 체포하고 임정엽 명의로 폐간계를 제출하게 하여 동아일보의 발행을 강제로 멈추게 했습니다.
1945
[신탁통치 보도 논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외신을 인용 보도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일부에서는 동아일보의 보도가 반탁운동을 격화시켰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국내외 언론의 보도 관행과 타 언론사의 유사 보도 등을 고려할 때 단순 오보라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광복과 함께 다시 태어나다]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지 5년 4개월 만에, 광복의 기쁨과 함께 동아일보가 복간되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 언론의 역할을 다시 시작하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1946
[인쇄공 파업으로 휴간]
경성일보사 인쇄공들의 파업으로 인해 동아일보 발행이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이는 광복 직후 혼란스러웠던 사회상을 반영하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철도파업으로 휴간]
전국적인 철도파업의 여파로 인해 동아일보의 발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사회 전반의 불안정 속에서 언론사 또한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입니다.
1947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주최]
해방 후 혼란 속에서도 한국 스포츠의 부흥을 위해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쟁패전'을 주최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통 있는 대회로, 한국 야구 발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50
[한국전쟁 발발, 발행 중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동아일보의 발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전례 없는 국가적 비극 앞에서 언론 또한 제 기능을 다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전쟁 중 타블로이드 복간]
한국전쟁 중에도 다시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타블로이드 2개면으로 복간되었습니다.
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언론의 역할을 잊지 않으려 했던 노력을 보여줍니다.
1951
[1.4 후퇴, 부산에서 속간]
1.4 후퇴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신문 발행을 이어갔습니다.
전시 상황 속에서도 언론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한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1955
[인기 만화 '고바우 영감' 연재]
당시 시대를 풍자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네컷 만화 '고바우 영감'의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이 만화는 1980년까지 이어지며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식 문제로 인한 정간]
신문 기사의 오식(틀린 글자)이 문제가 되어 정간당했습니다.
이는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사소한 사안에도 개입할 수 있었던 당시의 엄격한 언론 통제를 보여줍니다.
1956
[바둑 국수전 주최]
한국 바둑계의 발전을 위해 권위 있는 '바둑 국수전'을 주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바둑 고수들을 배출하는 등 한국 바둑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61
[동아음악콩쿠르 마련]
한국 음악계의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동아음악콩쿠르'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며 수많은 정상급 음악가들을 배출하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1962
[명창명인대회 마련]
국악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명창명인대회'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전통 예술인들의 활동을 독려하고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1963
[동아방송 개국]
독자들에게 더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동아방송'을 개국했습니다.
이는 신문사와 방송사를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 그룹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4
[동아연극대회 개최]
한국 연극계의 활성화와 인재 발굴을 위해 '동아연극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는 연극인들에게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며 한국 연극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소년동아일보 창간]
어린 독자들을 위한 '소년동아일보'를 창간했습니다.
이는 미래 세대의 교육과 문화 발전에 기여하려는 동아일보의 노력을 보여주며,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67
[동아연감 창간]
사회 각 분야의 최신 정보와 통계를 종합하여 '동아연감'을 창간했습니다.
이는 독자들이 한 해 동안의 주요 이슈와 데이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자료집이 되었습니다.
1974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
유신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 극심해지자,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며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는 이후 '백지광고 사태'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유신정권이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광고를 무더기로 해약시키자, 신문 지면의 광고란이 백지로 나가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독자들이 '자유언론 격려 광고'를 내는 등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지가 이어졌습니다.
이 사태는 1975년 7월 중순까지 계속되었으며, 언론 탄압에 맞선 시민들의 연대가 빛났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1975
[자유언론 기자 대량 해직]
경영진이 정부에 굴복하여 유신 정권을 비판하던 기자 및 사원 113명을 해고하는 비극적인 '동아일보 해직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해직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민주화 투쟁을 이어갔으며, 이후 '한겨레'를 창간하는 계기가 됩니다.
1980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 매각]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동아방송이 한국방송공사(KBS)에 강제로 매각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언론 자유가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981
[동아문화센터 개설]
독자들을 위한 문화 교육 프로그램과 강좌를 제공하기 위해 '동아문화센터'를 개설했습니다.
이는 신문사의 사회적 역할 확대와 평생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노력이었습니다.
1985
[동아국악콩쿠르 마련]
한국 국악계의 발전을 위해 '동아국악콩쿠르'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국악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며, 전통 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88
[해직 기자들, '한겨레' 창간]
1975년 동아일보 해직 사태로 언론 탄압에 맞섰던 기자들이 '한겨레' 신문을 출범시켰습니다.
이는 언론 자유를 향한 오랜 투쟁의 결실이자 한국 언론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입니다.
1990
[주말특집판 동아마당 발행]
주말 독자들에게 심층적인 정보와 읽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주말특집판 동아마당'을 발행했습니다.
이는 독자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92
[본사 충정로 사옥 이전]
신문 제작 환경 개선 및 효율성 증대를 위해 본사를 충정로 사옥으로 이전했습니다.
이는 동아일보의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물리적 변화였습니다.
1993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
오랜 기간 발행해오던 석간신문 체제를 조간신문으로 전면 전환했습니다.
이로써 독자들은 아침에 동아일보를 받아볼 수 있게 되었고, 전환 6개월 만에 발행 부수 200만 부를 기록하며 크게 성장했습니다.
1994
[CTS(컴퓨터 제작 시스템) 도입]
신문 제작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CTS(컴퓨터 제작 시스템)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인쇄 및 편집 과정의 디지털화를 통해 뉴스 생산의 속도와 품질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발전이었습니다.
1996
[인터넷 전자신문 출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발맞춰 인터넷 전자신문 '마이다스 동아일보'를 출범하며 디지털 시대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는 독자들이 온라인으로도 동아일보의 기사를 접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1998
[신문 전면 가로쓰기 시행]
독자의 가독성을 높이고 현대적인 신문 형태로 변화하기 위해 신문 전면에 가로쓰기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신문 제작 및 편집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보천보 전투 금 원판 선물 논란]
동아일보 취재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천보 전투 금 인쇄 원판'을 선물한 사실이 확인되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북한에서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 업적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기에 더욱 이목을 끌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 전투 소식을 담은 호외를 두 번 발행하여 김일성이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우파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이 친일로 변절하던 시기에 이러한 선물이 이루어져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0
['동아닷컴'으로 사명 변경]
기존의 인터넷 전자신문 '마이다스 동아일보'의 사명을 '동아닷컴'으로 변경하며 디지털 미디어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온라인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대에 발맞춘 변화였습니다.
[신문박물관 개관]
한국 신문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신문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이는 언론의 역할과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1
[언론 세무조사 관련 사퇴]
국민의 정부 당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에 책임을 지고 김병관 명예회장이 인책 사퇴했습니다.
이는 언론과 권력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이었습니다.
2002
[모바일 서비스 개시]
모바일 기기를 통한 뉴스 소비 시대에 발맞춰 '동아일보 모바일 서비스'를 개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5
[지면 개편 단행]
독자들이 사회면 기사를 더욱 빠르게 접할 수 있도록 '오피니언면'을 뒤로 배치하고 '사회면'을 앞으로 배치하는 지면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독자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려는 변화였습니다.
[온오프라인 통합뉴스룸 출범]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신문과 온라인 콘텐츠를 통합하는 '온오프라인 통합뉴스룸'을 출범시켰습니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뉴스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충정로 32면 컬러 인쇄 완료]
충정로 사옥에 32면 컬러 인쇄 체제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고품질 컬러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신문의 시각적 품질을 크게 향상시키고 독자들에게 더욱 생생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했습니다.
2010
[전교조 명단 불법 공개 논란]
법원의 공개 금지 결정에도 불구하고, 전교조 가입 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여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동아닷컴 또한 이 불법적인 명단 공개에 가담하여, 이후 손해배상 소송에서 배상 판결을 받았습니다.
2011
[종합편성채널 채널A 개국]
기존의 동아방송 후신으로서 종합편성채널 '채널A'를 개국하며 방송 사업에 다시 진출했습니다.
이는 신문, 방송, 온라인을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 그룹으로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2012
[김정남 천안함 발언 오보]
김정남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이는 당사자의 이메일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으로 밝혀져 오보임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언론의 사실 확인과 보도 윤리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습니다.
2013
[최영해 칼럼 '혼외 아들' 파문]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칼럼을 게재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 칼럼은 아동의 인권을 유린하고 사실을 단정하는 등 언론 윤리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언론계 안팎에서 "언론의 폭력행위", "인신공격이자 인권유린"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네티즌들의 조롱과 패러디가 잇따랐습니다.
[쌍룡역 '직원 과다' 허위보도]
'하루 승객 15명인 역에 역무원 17명'이라는 제목으로 쌍룡역의 수입과 인건비를 왜곡하여 보도했습니다.
실제 화물 수입 대부분을 누락시키고 인원 배치 현황 또한 사실과 다르게 보도하여 비판을 받았습니다.
2020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1920년 창간 이래 100년의 역사를 맞이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에 맞서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광복 후 격동의 현대사를 함께하며 한국 언론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