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신문, 일간지, 언론사, 미디어그룹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30:02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창간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간 일간지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내 유일하게 유료 부수 100만 부가 넘는 압도적인 1위 신문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항일 민족지 보수 언론 등 다양한 정체성을 거쳐오며 한국 언론의 흐름을 이끌어 왔습니다.
1920
[조선일보 창간]
3.1운동 1년 후,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습니다.
한국어 신문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합니다.
[영친왕 결혼 비판 기사 압수]
영친왕과 일본 왕족 마사코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 일제 총독부에 의해 신문이 압수되는 첫 탄압을 받았습니다.
[초대 사장 교체]
약속된 자본금 불입이 이뤄지지 않아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유문환이 2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미국 의원단 환영 논설 정간]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하는 논설을 실어 1주간 정간 조치를 당했습니다.
[문화 통치 비판 논설 무기 정간]
일제의 소위 '문화 통치'를 '기괴하다'고 비판하는 논설을 실어 무기 정간이라는 강력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1921
[송병준 판권 인수, 남궁훈 사장 영입]
조선일보의 항일 논조를 부담스러워하던 총독부의 개입으로 송병준이 판권을 인수했으나, 열렬한 독립투사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하며 민족지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1924
[민족지 정체성 강화]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민족의 사표로 추앙받던 이상재를 4대 사장으로 추대하며 항일 독립 신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했습니다.
1927
[신간회 결성 주도 보도]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조직인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우리나라 문화 보전에 힘썼습니다.
이 날짜는 신간회 창립 모습이 조선일보에 보도된 날짜입니다.
1931
1933
[방응모 사장 취임]
여러 사장을 거쳐 방응모가 9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교육필화' 논설로 총독부에게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항일 논조를 이어갔습니다.
1936
[총독부 개입으로 항일 논조 약화]
총독부의 개입으로 항일 성향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평론하는 사설과 신문 내용으로 간접적인 제국주의 비판을 시도했습니다.
1940
[일제에 의한 강제 폐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표적이 되어 발간이 강제로 중단되었습니다.
당시 사장이었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며 신문 정신을 이어나갔습니다.
1945
[해방 후 극적인 복간]
해방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속간되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조선일보 복간에 대해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크게 축하해주었습니다.
1947
[이승만 정부 수립 노선 지지]
방응모 사장의 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의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지지했으며, 이후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하게 됩니다.
1948
[이승만 정부 출범 지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 후 그의 정부 출범을 적극 지지했으며, 6.25 전쟁 발발 전까지 반민족 행위자 강력 처벌과 처단을 주장했습니다.
1950
[6.25 전쟁 중 정체성 변화]
6.25 전쟁 당시 북한에게 넘어가 한때 인민군 기관지로 전락했으나, 10월 1일 국군의 38선 돌파로 전세가 역전되며 다시 대한민국 기관지로 회복되었습니다.
1951
[정부와 국군 완전 지지]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을 완전히 지지하는 논조를 보였으나,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 불리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1954
[보수주의 색채 강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보수주의 색채가 강해져 대한민국과 유엔 등 국제 자유 진영을 적극 지지하는 언론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55
[이승만 정부 반공 정책 지지]
이승만 정부의 부산 정치파동을 다루지 않고, 반공정책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또한 금성사, 삼성 등 대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경제 기사를 많이 보도했습니다.
1960
[이승만 하야 주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당시 국민의 편에 서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하야를 이뤄내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 지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을 지지하고, 군사정변을 옹호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보도했습니다.
1964
[박정희 정부 비판 기조]
최석채 주필 재직 시기 동안 박정희 정부에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했으며, 사회적 약자와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1968
1969
[3선 개헌 지지, 보수 성향 고착]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을 지지하고 '유럽 간첩단 사건' 등 공안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보수 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1970
[박정희 대통령 찬양 보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기사와 사설을 여러 차례 내보냈으며, 경부고속도로 등 주요 고속도로 준공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1972
[10월 유신 적극 지지]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서자 박정희 대통령을 적극 찬양하고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보도했습니다.
[독자 50만 명 돌파]
창간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하며 매체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1974
[ASI 조사 구독자 비율 1위]
미국 애덤 스미스 연구소(ASI)의 조사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에서 1위를 차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기록적인 성과입니다.
[유신 공안정국 확성기 역할]
유신체제 당시 연이어 발생한 간첩단 사건,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공안정국의 '확성기' 역할을 했습니다.
1979
[발행부수 100만부 돌파]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하며 국내 최대 신문사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는 한국 언론사에서 중요한 기록입니다.
1980
1991
[발행부수 200만부 돌파]
사상 최초로 발행부수 200만부를 돌파하며 대한민국 신문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독보적인 성과입니다.
1995
1999
2000
2008
['아이리더' 서비스 시작]
PC상에서 조선일보 지면을 볼 수 있는 신개념 디지털 페이퍼 '아이리더' 서비스를 시작하며 디지털 신문 구독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2010
[조선미디어그룹 출범]
창간 9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관계사를 아우르는 대규모 미디어그룹인 조선미디어를 출범시키며 미디어 산업을 선도했습니다.
2011
2013
[춘천마라톤 골드레벨 획득]
한국 최대 규모의 '춘천마라톤'이 세계육상연맹으로부터 '골드레벨'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마라톤 대회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한국갤럽 가구 구독률 1위]
한국갤럽의 수도권 성인 대상 조사에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 부문에서 11.9%의 가구 구독률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며 독자층을 입증했습니다.
2014
[시사저널 영향력/열독률 2위]
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2위, '가장 열독하는 언론 매체' 2위를 차지하며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였습니다.
['채동욱 보도' 한국신문상 수상]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가 언론이 권력자의 사생활을 보도할 때 필요한 '용기'를 보여줬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2020
[유료부수 100만부 유일 신문]
한국ABC협회 집계 기준, 대한민국 내에서 유료 부수 100만 부가 넘는 유일한 신문으로 확인되며 독보적인 시장 점유율과 영향력을 자랑했습니다.
2022
[방정오 정정보도 소송 승소]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가 고 장자연 씨 관련 보도에 대한 정정보도 청구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습니다.
이는 언론 보도의 정확성 관련 이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