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대한민국 스님, 불교 철학자, 조계종 종정, 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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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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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님, 불교 철학자, 조계종 종정, 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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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근현대 선승이자 불교 철학자로 철저한 수행과 학문 탐구로 한국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돈오돈수 주창과 불교정화운동 지지를 통해 종단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 특히 장좌불와 수행으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워 그 수행 정신을 드높였습니다. - 최초의 한글 법어집 출간 등 대중 포교에도 힘써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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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스님, 세상에 오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였으며, 어머니는 스님을 임신하고 온갖 정성으로 태교했다고 전해진다.

1920

[단성보통학교 입학]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하기 전 서당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

[중학교 불합격과 불교의 인연]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며, 이때부터 몸이 약해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1931

[세속의 혼인]

대원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깊이 빠질 것을 염려한 집안의 권유로 이덕명과 혼인신고를 하였다.

1932

[사상적 탐구]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 70여 권의 제목이 적힌 '간례휘찬'에 이영주서적기를 남겼다.

이 시기 불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특히 영가현각 스님의 증도가를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1935

[화두참구와 깨달음]

대원사 탑전에서 42일간 화두참구를 통해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인사 환경스님의 제자인 최범술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에 가게 되었다.

1936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하다]

해인사에서 범어사 조실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출가했다.

출가시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요'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을 이어갔다.

[계맥 전수 동참]

동산 스님을 따라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나고, 동안거 기간 중 용성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자리에 함께 하였다.

1937

[비구계 수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나며 용성 스님을 시봉했고, 용성 스님이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 부르며 아꼈던 일화가 전해진다.

1938

[어머니 방문 물리침]

범어사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지냈다.

이 무렵 어머니가 철마다 찾아왔으나 계속 만나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했다.

1939

[금강산에서 지기 만나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나며 평생의 지기인 자운 스님을 만났다.

글을 모르는 대중 스님들을 위해 편지를 대독하고 대필해주기도 했다.

1940

[동화사에서 깨달음을 얻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라는 오도송을 읊으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깨달음을 점검하고, '장좌불와' 수행을 시작했다.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운 이 수행은 깨달음 이후에도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역대 최장 기록의 장좌불와는 보디다르마(달마대사)의 소림사 면벽 9년보다 난이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기록은 10년, 일부에서는 8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수행으로 인해 후학들이 무리하게 따라하다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다.

1941

[전국 정진과 청담 스님 인연]

깨달음을 점검받기 위해 전국을 찾아 정진하며 송광사 삼일암과 수덕사 정혜사에서 안거를 지냈다.

정혜사에서 청담 스님을 만나 칠일칠야 정진의 모델로 삼았다.

이 해 아버지 회갑이었으나 장남 없이 절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절도 받지 않고 가족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1942

[간월암 안거]

충남 서산군 간월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보냈다.

1943

[복천암에서 생식 시작]

충북 법주사 복천암에서 하안거를 나며 청담, 도우스님과 함께 생식을 시작했다.

청담 스님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상주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1944

[대승사 쌍련선원 안거]

청담 스님의 초청으로 경북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청담, 우봉, 도우스님과 동안거를 보냈다.

1945

[총림 구상 논의]

대승사 쌍련선원에 머물며 청담 스님과 총림 구상 및 바른 수행 풍토에 대해 논의했다.

1946

[봉암사 결사 구상]

송광사 방부 거절 후 도우스님과 성전암으로 옮겨 안거를 지냈다.

이 무렵 청담 스님이 봉암사로 옮겨 새로운 불교를 모색하며 봉암사 결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947

[봉암사 결사 시작]

청담 스님에게 총림 건을 일임하고 봉암사 결사를 시작했다.

공주규약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목표로 성철,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20여 명이 참여하여 교단 정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근대 일본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부처님의 정법으로 복귀하려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1948

[봉암사 불서 기증]

봉암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냈으며,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아 봉암사 극락전에 모셨다.

1949

[묘관음사로 거처 옮김]

봉암사에서 하안거를 지내다 빨치산 출현으로 정진이 어려워 경남 월내리의 묘관음사로 거처를 옮겼다.

김병룡 거사의 불서도 함께 옮겼으며, 이후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불서를 함께 이동시켰다.

1950

[봉암사 결사 무산]

청담, 법전 스님 등이 봉암사를 나오면서 봉암사 결사가 무산되었다.

이후 경남 고성군 문수암에서 청담, 법전 스님 등과 하안거와 동안거를 보냈다.

1951

[천제굴 창건과 신도 포교]

경남 통영의 안정사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모이는 사람이 늘자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인 천제굴을 지었으며, 이곳에서 신도들에게 3천배와 아비라기도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1952

[천제굴 방문객과 성주사 안거]

천제굴에 청담, 자운, 운허, 향곡, 서옹 스님 등이 다녀갔다.

천제굴이 협소해지자 비구니 스님들이 내어준 경남 마산의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보냈다.

1953

[천제굴 안거]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보냈다.

1954

[비구 종단 정화 시작]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내는 동안, 비구 종단의 불교 정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55

[10년 동구불출 시작]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운 스님이 취임했다.

가을에는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1964년까지 10년간 외부의 출입을 막으며 ‘10년 동구불출’ 수행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읽으며 지냈다.

일본의 남전대장경은 물론 영문 잡지와 다양한 분야의 신종 서적을 섭렵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957

[해인사 주지 재임명 거절]

파계사 성전암에서 동구불출을 계속하는 중 다시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청담 스님이 취임했다.

1964

[동구불출 종료 및 실달학원]

10년간의 동구불출을 마치고 서울 도선사에 머물며 오랜 꿈이던 승가대학을 실현하기 위해 실달학원을 열고 실달학원시행요강을 마련했다.

청담 스님과 함께 서원문을 쓰고, 북한산, 남한산성 등을 순례했다.

1965

[김용사에서 대학생 설법]

경북 문경의 김용사에서 조실로 머물다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이 방문하자 3000배를 시키고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중도 등을 현대 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1966

[해인사 백련암 이전]

가을 무렵 자운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지냈다.

구도법회 참가자 일부가 스님을 따라 백련암으로 옮겨 출가하기도 했다.

[50일 안거 정진 지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상대로 50일간 안거 정진을 지도했다.

강론 내용은 불교의 생명은 깨달음에 있다는 것과 돈오점수설 비판 등이었다.

[선방 상선원 준공]

1965년 8월에 시작된 선방 상선원 공사가 스님의 발원으로 준공되었다.

[최초의 대중 설법, 운달산법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대상으로 20일간 참선정진을 중심으로 반야심경, 육조단경 등 경론과 중도법문을 지도했다.

이를 '운달산법회'라 하며, 스님의 최초 대중설법으로 기록된다.

1967

[해인총림 초대 방장 추대]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초대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었다.

방장 동안 안거 때마다 보름과 말일에 상당법어를 했다.

[백일법문 시작]

동안거 기간 중에 백일법문을 시작했다.

상당법어를 하는 날과 성도재일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진행되어 이듬해 2월 18일까지 이어졌다.

[승가대학 설치 건의]

조계종 제17회 중앙종회에 조계종 종합수도원인 해인총림 계획안과 승가대학 설치 계획안을 건의하였다.

1969

[승가대학 방향 모색]

이 무렵 청담 스님 등과 춘천 성심여자대학을 방문하여 다른 종교 교육기관을 시찰하고 승가대학에 대한 방향을 모색했다.

1976

[『한국불교의 법맥』 출간]

『한국불교의 법맥』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국사가 아니라 태고보우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며 기존의 법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한국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81

[6대 종정 취임과 명법어]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했으나, 취임 법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큰 화제가 되어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법어는 중국 임제종 선사 유신(惟信)의 고측을 원용한 것으로, 깨달음의 세 단계를 나타낸다. 처음에는 산은 산, 물은 물로 보이나 수행 후에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이며, 진정으로 득도하면 다시 산은 산, 물은 물로 보이는 나선형적 회귀를 의미한다.

[최초 한글 법어 발표]

초파일에 최초의 한글 법어인 '생명의 참모습'을 발표하며 대중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더욱 친숙하게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선문정로』 출간]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선문정로』가 출간되었다.

총 19장으로 경론 구절 초록과 평석을 통해 '돈오돈수' 사상을 설파하며 한국 불교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82

[첫 한글 신년법어]

첫 한글 신년법어인 '만법이 불법'을 발표했다.

[『본지풍광』 출간]

또 하나의 대표작인 『본지풍광』이 출간되었다.

1967년 해인사 방장 취임 이후 상당법문을 모은 법어집이다.

1986

[종정 사퇴서 제출]

종단이 안정되었음을 이유로 종정을 사퇴한다는 사퇴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했다.

[강설집 출간]

『돈오입도요문론 강설』과 『신심명ㆍ증도가 강설』이 출간되었다.

1987

[『자기를 바로봅시다』 출간]

종정 취임 이후 대중적인 글 위주의 법어 모음집인 『자기를 바로봅시다』가 출간되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설립]

백련불교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장경각 설립 및 총서 발간]

도서출판 장경각을 설립하고 선림고경총서 발간을 시작했다.

1988

[『돈황본 육조단경』 출간]

『돈황본 육조단경』이 출간되었다.

1991

[종정 임기 만료와 통고]

종정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종단 분열로 종정 추대가 지연되자, 1월 23일 종정직을 맡을 생각이 없다는 통고문을 보냈다.

7월 5일에도 다시 통고문을 보냈다.

[7대 종정 재추대]

해인사 전국승려대표자대회에서 종단을 안정시키기로 결의한 후,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7대 종정으로 다시 추대되었다.

이는 종단 분열 와중에도 스님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1992

[『백일법문』 출간]

『백일법문』 상․하권이 출간되었다.

1993

[선림고경총서 완간]

선림고경총서 완간 기념회를 열었다.

[돈오돈수 국제학술회의]

백련불교문화재단 주최로 해인사에서 '선종사에 있어서의 돈오돈수사상의 위상과 의미'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스님의 열반과 파격적 열반송]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했다.

입적 시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로 시작하는 파격적인 열반송을 남겼으며, 이후 전국 각지와 해외 동포 사이에서 추모 물결이 일었다.

[100여 과의 사리 수습]

영결식 및 다비식을 봉행한 후 100여 과에 이르는 사리가 수습되었다.

1998

1998.11 사후 5년

[사리탑 봉안]

해인사 운양대에 사리탑이 봉안되었다.

2001

2001.03 사후 8년

[생가 기념관 및 겁외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겁외사를 창건하여 스님의 정신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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