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농민 운동, 혁명, 전쟁,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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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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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혁명, 전쟁,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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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말기 탐관오리와 외세에 맞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대규모 무장 봉기입니다. *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을 띠며 조선 시대 최대의 농민 항쟁으로 평가받습니다. * 내부 분열 무기 열세 등으로 실패했으나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고 이후 항일 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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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

[동학 교조 최제우 처형]

동학의 창시자인 교조 최제우가 군문 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동학 농민 혁명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교조 신원 운동의 시발점이 됩니다.

1882

[임오군란 발발]

구식 군대 폐지로 인한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나 청군에 의해 납치되고, 조선의 자주권이 크게 실추되는 계기가 됩니다.

1884

[갑신정변 발발]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며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이 손상되었습니다.

1892

[조병갑, 고부군수 부임]

탐학으로 악명 높은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횡포를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동학 농민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됩니다.

1893

[교조신원운동 (서울)]

흥선대원군이 동학도들의 상경 시위를 이용하여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50여 명의 동학 교도들이 경복궁 앞에서 3일간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탄원하며 연좌 시위를 벌였습니다.

[고부 주민 탄원 실패]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던 고부 주민들이 두 차례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조병갑은 오히려 대표들을 하옥하고 고문하며 탄원을 묵살했습니다.

전봉준의 부친 또한 이 일로 죽음에 이릅니다.

[동학 농민군 한성 상소]

고부 주민들과 동학 교도들이 한성으로 올라가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일부 고관은 파직되었으나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894

[고부 봉기 시작]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1천여 명의 농민군이 말목장터에 집결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 점령했습니다.

무기를 탈취하고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으나, 신임 군수 박원명의 무마책에 해산했습니다.

이는 동학 농민 혁명의 첫 무장 봉기였습니다.

[황토현 전투 승리]

재궐기한 농민군이 고부 황토현에서 전주감영군 1만 명을 대파하고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의 사기가 충천하며 전라도 각지로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전봉준, 나주에 공문 발송]

전봉준이 비협조적이던 나주 관아에 공문을 보내 흥선대원군을 모셔 나라 일을 보도록 하고 아첨하고 비루한 자들을 파면시키려는 본의를 밝혔습니다.

이는 임금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개혁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줍니다.

[황룡촌 전투 승리]

장성 황룡촌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홍계훈의 정부군을 상대로 또다시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는 전주성 입성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전주성 점령 및 2차 봉기]

이용태의 가혹한 탄압에 분노한 전봉준과 농민군이 백산에 모여 다시 봉기했습니다.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전주성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농민군은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왜양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등의 4대 명의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동학 농민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도와 상관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혹독히 탄압했습니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과 손화중을 장령으로 삼은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청일 양국에 군사 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습니다.

[전봉준, 홍계훈에게 항의]

전봉준이 초토사 홍계훈에게 항의문을 보내 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토록 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이를 불궤라고 하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이는 대원군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의 한 단면입니다.

[집강소 설치 및 개혁 시작]

관군과의 강화를 맺은 후, 동학군은 전라도 53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 혁파, 신분 차별 철폐, 여성 해방, 잡세 폐지, 인재 등용, 토지 개혁 등을 골자로 한 진보적인 개혁안을 실행에 옮긴 최초의 농민 자치였습니다.

특히 김개남은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와 나주 현령들을 살해하고 집강소를 설치했습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17세기 실학자나 개화파보다 훨씬 진보된 내용으로, 봉건 사회 조선이 수용하기 어려운 혁명적인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청일전쟁 발발]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7월에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해산되었던 동학 농민군이 외세 배척을 기치로 다시 봉기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청일 평양성 전투]

청일전쟁 중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평양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무기력한 정부와 외세의 횡포를 목격한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부는 2차 기병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3차 봉기 궐기 (삼례봉기)]

전봉준, 김개남 등 남접 지도자들과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 지도자들이 삼례역촌에서 다시 봉기했습니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하여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반외세 항쟁을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약 20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초기 북접의 비협조로 공주성 진입이 지연되기도 했습니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고, 농민군은 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김개남은 금산-청주-서울 진격로를 택했습니다. 이는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 운동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2차 기병 결정 (3차 봉기)]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노한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부는 척왜(斥倭)를 구호로 다시 봉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내정 개혁이 아닌 반외세 항쟁이 주 목표가 되었습니다.

[남접-북접 논산 합류]

그동안 남접의 봉기에 소극적이던 북접이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논산에서 남접과 합류했습니다.

이로써 남북 연합 농민군은 약 2만여 군세를 이루고 일본군 격퇴를 위한 북상에 나섰습니다.

[삼례 회의 개최]

삼례에서 회의가 열려 전봉준, 김개남 등의 과격파와 최시형, 이용구 등 온건파의 타협론이 대립했습니다.

일본군의 조선 내정 간섭과 청일전쟁 발발로 험악해진 정세 속에서 농민군의 향후 진로를 논의했습니다.

[공주 이인/포효 전투 패배]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이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으나, 농민군은 크게 패배하여 후퇴했습니다.

이는 공주성으로의 진입이 늦어지면서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먼저 공주에 입성한 상황에서 벌어졌습니다.

[우금치 전투 패배]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며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화력에 밀려 농민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전투는 동학 농민 혁명의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농민군은 숫자만 우세할 뿐 훈련 부족과 원시적인 병기로 인해 관군과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김개남의 부대 역시 청주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해 후퇴했습니다.

[논산 퇴각 및 농민군 해산]

우금치 전투의 패배 후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습니다.

전봉준은 직속 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정부군 측의 무자비한 소탕 작전이 시작되어 죄 없는 양민 학살과 마을 파괴가 자행되었습니다.

[태인 전투 패배]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밀려 다수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습니다.

이로써 동학 농민군의 대규모 봉기는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김개남 체포 및 처형]

태인에 숨어있던 김개남이 친구 임명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습니다.

동학 농민 혁명 지도부에 대한 대규모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전봉준 체포 및 압송]

순창에 숨어있던 전봉준이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는 일본 영사관과 법무아문에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성을 부인하며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1895

[전봉준 심문]

체포된 전봉준이 법무아문에서 5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습니다.

정부와 일본측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궁했으나, 전봉준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이 심문 기록은 동학 농민 혁명의 원인과 경과, 농민군의 구성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전봉준 등 지도부 처형]

재판장은 전봉준 외 체포된 동학 농민군 지도부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전봉준은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외치며 순국했습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도 함께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일부 지도자는 흥선대원군의 특별 사면 탄원으로 석방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고향 사람의 밀고로 처형당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기도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1907

[최시형 등 신원]

고종의 특지로 북접의 최시형 등 일부 동학 농민군 지도자들이 신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1910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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