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승려, 왕족, 학자, 종교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9:49
•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왕자 출신 승려입니다. • 11세에 자원 출가 후 불교 학문에 매진 유교 등 여러 사상을 섭렵했습니다. • 요 송나라를 순방하며 방대한 불경을 수집했고 특히 송나라에서 돌아와 속장경 간행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세계 불교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습니다. • 분열된 고려 불교계를 통합하기 위해 천태종을 중흥시킨 한국 천태종의 시조입니다. • 주전론을 주장하는 등 사회 경제에도 기여한 다재다능한 인물로 대각국사라는 시호로 불리며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055
[고려 왕실의 넷째 아들, 의천 탄생]
고려 제11대 왕 문종과 인예왕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왕후였다. 자는 의천으로, 후에 이 자를 주로 사용하게 된다.
1055년 10월 30일, 고려 제11대 왕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석후 또는 후였는데, 그의 이름자 후가 송나라 철종의 본명과 같아 이름 대신 자인 의천을 주로 사용하였다.
1065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여 승려의 길을 걷다]
11세 되던 해, 아버지 문종이 왕자들에게 누가 출가하여 복전이 되겠느냐 묻자 스스로 자원하여 경덕국사를 스승으로 삼아 영통사에서 출가했다.
11세 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였다. 문종은 경덕국사 김난원을 불러서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직접 의천을 삭발하게 했다.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다]
불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3세에 '광지개종홍진우세'의 호를 받으며 승통(僧統)이 되었다. 이후 대승과 소승 경전, 유교, 제자백가 사상까지 폭넓게 섭렵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같은 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후에 경덕국사 난원이 입적하면서 그에게 법문(法門)을 계승하였다.
1084
[송나라 유학을 추진했으나 왕의 반대에 부딪히다]
송나라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이를 만류하였다.
1084년, 송나라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가지 못했다.
1085
[송나라 고승들과 교류, 천태종 중흥을 맹세하다]
송나라 철종을 접견하고 6종중의 큰스님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했다. 특히 자변 대사에게 천태종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 대사의 부도에 예배하며 본국에 천태종을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의천은 1085년 선종이 즉위한 후 송나라로 밀항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송나라 황제는 철종이었으며, 의천은 유학 기간 중 철종과 황태후 등을 접견하고 불서를 수집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따라서 의천이 송나라 철종을 접견한 것은 1085년 4월에서 1086년 6월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된다.
송나라 철종을 접견한 후, 차례로 6종중(宗中)의 정정한 큰스님들이 있는 사찰을 방문, 즉 정원, 양연, 택기, 혜림, 종간 등 50여 인을 만나보았다. 이후 송나라 철종이 영접하여 계성사에 있게 하고, 화엄 법사 유성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 천태 양교의 판교동이, 유묘의 뜻을 문답하였다. 또 상국사의 원조선사와 흥국사 서천의 삼장 천길상을 찾아보고 주객원외랑 양걸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금산의 불인 선사 요원에게 들리고, 항주의 원공 법사를 찾아 혜인에게 《화엄소초》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 자변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 대사의 부도(浮圖)에 예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영지(靈芝)의 대지 대사에게 계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하였다.
[송나라 구법을 위해 비밀리에 떠나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제자 수개만을 데리고 비밀리에 송나라로 떠났다. 이에 왕은 크게 놀라 관리를 보내 수행하게 했다.
1085년, 왕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 혜선, 도린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 의천은 몰래 제자 몇 인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배편으로 송나라에 입국했지만, 소문이 알려져 송나라 철종은 특별히 주객낭중(主客郎中)인 양걸(楊傑)을 보내 의천을 수행, 인도하게 되었다. 이후 의천 일행은 송나라의 밀수, 변하 등을 순례하고, 변하에 도착하여 신전(宸殿)에서 철종을 접견하였다.
1086
[고려로 귀국, 교장도감 설치 및 <속장경> 간행 주도]
선종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석전과 경서 1천 권을 바쳤다.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086년,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 (개성)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다.
1094
[국청사 주지 겸임, 천태교를 처음으로 강론하다]
흥원사, 해인사를 거쳐 흥왕사 주지를 지낸 뒤, 새로 세워진 국청사의 주지를 겸하며 고려에서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천태종 중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1094년, 흥원사(興圓寺)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1097
[숙종의 다섯째 왕자 징엄을 제자로 삼다]
형인 고려 숙종의 다섯째 아들인 왕자 징엄이 승려가 되자, 징엄을 제자로 받아들여 법통을 계승하게 했다. 이는 왕실과의 굳건한 유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1097년 조카인 징엄을 제자로 받았다. 형인 고려 숙종은 다시 자신의 다섯째 왕자 원명국사 징엄(1090∼1141)을 손수 삭발시켜 의천의 제자로 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1098
[주전론을 주장하며 사회경제 발전에 기여하다]
숙종 때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화폐 주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사회 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통찰력을 보여준다.
송나라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 서신으로 사상교류를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 숙종 때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경제 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다.
1101
[고려 숙종에게 국사로 책봉되다]
병세가 깊어가는 가운데 고려 숙종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그의 생애 마지막 영예를 얻었다.
1101년 10월 3일 고려 숙종으로부터 국사로 책봉되었다.
[총지사에서 47세의 나이로 입적하다]
국사 책봉 이틀 뒤, 병문안 온 형왕 숙종에게 불법 외호를 당부하는 유언을 남기고 총지사에서 4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숙종은 조회를 파하고 공휴일로 정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병세는 깊어져, 1101년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다. 숙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조회를 파하고 임시 공휴일(公休日)로 정하였으며, 친히 다비식을 한 뒤 영골사리(靈骨舍리)를 영통사 동쪽 산에 석실(石室)을 세워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