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고승, 학자, 사상가, 작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9:33
신라의 전설적인 고승 원효! 해골물 일화로 깨달음을 얻고 일체유심조 사상을 정립 불교를 민중에게 전파했다. 화쟁사상으로 모든 사상의 조화를 꿈꿨으며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문장가 설총의 아버지이자 100여 권의 저술을 남긴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617
[원효 탄생]
신라 금성 불지촌 율곡에서 어머니 조씨의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드는 태몽 후 탄생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유교를 배웠으나 스승을 따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원효는 617년 신라 금성 불지촌 율곡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다. 만삭이 된 몸으로 집 근처의 밤나무 아래에서 원효를 낳았는데, 이 나무는 사라수라 불리며 이곳 밤은 크고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이라 불렸다. 원효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했으나, 스승을 따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부친 설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했다.
627
원효의 어머니 조씨는 627년에 사망했다. 원효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이는 훗날 그가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출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632
[출가와 불도수행 시작]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 끝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에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세우고,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사라사를 세웠다.
원효는 15세(또는 28세) 무렵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다가 출가를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뜻이 확고하자 허락했다. 황룡사에 들어갈 때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라 하였다. 영취산의 낭지, 흥륜사의 연기와 고구려 반룡산의 보덕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았고, 뛰어난 자질과 총명을 드러내며 학문에 매진했다.
650
[1차 당나라 유학 시도 (고구려군에 의해 좌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던 중,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잡혔다가 풀려나 유학이 좌절되었다.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던 길이었다.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나게 되면서 첫 번째 유학 시도는 좌절되었다.
658
[요석공주와의 혼인과 설총 탄생]
태종무열왕의 뜻에 따라 요석공주와 혼인하여 아들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한국 유교의 시조로 평가받는 큰 현인이 되었다.
원효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태종무열왕은 이를 듣고 원효가 귀부인에게서 현명한 아들을 얻고자 하는 뜻임을 간파했다. 무열왕의 둘째 딸인 과부 요석공주가 있던 요석궁으로 원효를 데려오게 했고,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신 후 공주와 맺어졌다. 이로써 요석공주는 한국 유교의 시조로 추앙받는 아들 설총을 낳았다. 설총의 출생년도는 658년경으로 추정된다.
661
[해골물 깨달음 (일체유심조)과 유학 포기]
의상과 함께 두 번째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당항성 근처 무덤에서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물임을 깨닫고 '삼계유심',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원효는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이었다.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고,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곧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 즉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통불교 제창 및 분황사 저술활동 시작]
유학 포기 후 신라로 돌아와 분황사에 머물며 통불교를 제창하고 민중에게 불교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화엄경소를 저술하는 등 학문 활동에 전념했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 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무르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원효종, 분황종, 해동종이라고도 불림)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를 저술하는 등 학문 활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에서 절필하는 일도 있었다.
686
원효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불교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70세가 되던 해 혈사(穴寺, 현재 경주시 양북면 골굴사)에서 입적했다.
1100
[고려 숙종으로부터 대성화정국사 시호 추증]
고려 숙종에 의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가 원효에게 추증되었다. 이는 원효의 사상적 공헌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원효가 입적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고려시대, 숙종(재위 1095년~1105년)에 의해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원효에게 내려졌다. 이는 원효의 탁월한 불교 사상과 업적을 후대에서도 크게 인정하고 존경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