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종교 단체, 천주교 교구, 한국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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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831년 '조선 대목구'로 출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모체이자 심장 역할을 해왔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순교의 시대를 견뎌내며 신앙의 씨앗을 뿌렸고, 근현대사에서는 명동대성당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인권 수호의 보루로서 사회적 소명을 다해왔습니다. 대구, 평양, 의정부 등 수많은 교구를 분가시키며 한국 복음화의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현재는 3명의 추기경을 배출하고 세계청년대회(WYD) 유치 등 전 세계 가톨릭계에서도 역동적인 위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한 종교 단체의 성장을 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해온 신앙 공동체의 위대한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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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

[조선 대목구 설정]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북경 교구에서 조선을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를 설정합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도를 받는 독립적인 교계 제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초대 대목구장으로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조선 교회는 북경 교구의 관할 아래 있었으나, 조선 신자들의 끊임없는 요청과 교황청의 배려로 독립 대목구가 설립되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을 시도하던 중 만주에서 과로로 선종하여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자치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역사적인 기점이자 서울대교구의 직접적인 시작입니다.

1836

[피에르 모방 신부 입국]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사제로는 처음으로 모방 신부가 조선 땅을 밟는 데 성공합니다. 의주 변문을 통해 잠입한 그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행하고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입국은 조선 내 상주 사제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모방 신부는 입국 후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순회하며 신자들을 규합하고 신앙 공동체를 재건했습니다.
특히 그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한국인 사제 양성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목숨을 건 그의 잠입은 조선 선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1837

[샤스탕 신부의 합류]

모방 신부에 이어 자크 샤스탕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선교 대열에 합류합니다. 두 사제는 서로 협력하며 조선 전역의 공소를 방문하고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돌보았습니다. 이로써 조선 내 사제단이 형성되어 조직적인 포교가 가능해졌습니다.

샤스탕 신부는 주로 남쪽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조선말을 익히며 신자들과 깊이 소통하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박해기 한국 천주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앵베르 주교의 입국]

제2대 대목구장인 로랑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여 교구의 기틀을 잡습니다. 주교가 직접 입국함으로써 조선 대목구는 명실상부한 주교 관할의 교구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자 수가 급증하자 사목 지침을 제정하는 등 교회를 체계화했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 수를 9,000여 명으로 늘리는 등 비약적인 전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조선 교회의 첫 사목 지침서인 '장상 사목 지침'을 작성하여 교회의 기강을 세웠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조선 대목구는 박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1839

[기해박해의 시련]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인 기해박해가 발생하여 수많은 신자가 순교합니다.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거대한 시련은 교구 운영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했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성 앵베르 범 주교, 성 모방 나 신부, 성 샤스탕 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또한 정하상 바오로 등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이 처형되어 교회 조직이 궤멸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순교은 훗날 한국 천주교회가 굳건한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845

[김대건 신부 사제 서품]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가 탄생합니다. 제3대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치러진 이 서품식은 한국인 스스로 사목할 수 있는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서품 후 김대건 신부는 즉시 조선으로 귀국하여 선교에 매진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유학길에 오른 지 9년 만에 사제 품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활발한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교우촌을 순방하고 서양 선교사들의 입국 항로를 개척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첫 한국인 사제의 탄생은 조선 대목구의 자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상징적 사건입니다.

1846

[병오박해와 김대건 신부 순교]

사제 서품 후 1년 만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합니다.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하려던 계획이 발각되면서 발생한 이 박해로 젊은 사제는 신앙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짧은 사목 기간이었지만 그의 순교는 한국 교회에 잊을 수 없는 자취를 남겼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국문 효수형에 처해졌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히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의 순교는 당시 신자들에게 사제의 소중함과 신앙의 고귀함을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이후 교황청은 김대건 신부를 한국 교회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하며 그 공로를 기렸습니다.

1853

[베르뇌 주교의 부임]

제4대 대목구장으로 시메온 베르뇌 주교가 부임하여 교구를 다시 안정시킵니다. 그는 비밀리에 성당과 인쇄소를 설치하여 신앙 서적을 보급하고 전교 활동을 조직화했습니다. 박해 중에도 불구하고 교구는 유연한 운영을 통해 활력을 찾아갔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 전역을 8개 사목 구역으로 나누어 사제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했습니다.
서울 한복판인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사제 양성 교육을 재개했습니다.
그의 치하에서 조선 교회는 신자 수가 2만 명을 넘어서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습니다.

1866

[병인박해의 발발]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맞물려 한국 천주교 사상 최대의 탄압인 병인박해가 시작됩니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와 만 명에 가까운 신자가 순교하는 참극이 빚어졌습니다. 교구의 모든 인프라가 파괴되었고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이 박해는 1873년까지 약 8년간 지속되며 조선 천주교회를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으며, 신치림과 남종삼 등 유력 신자들도 처형되었습니다.
서소문, 절두산 등 서울의 주요 성지들이 이 시기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1882

[조불수호통상조약과 선교 자유]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선교사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집니다. 비록 완전한 포교의 자유는 아니었으나, 과거의 혹독한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외교적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준비를 합니다.

조약 체결 이후 선교사들은 여권을 발급받아 지방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처벌이 줄어들면서 공개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조선 대목구가 근대적인 교회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7

[종현(명동) 부지 매입]

교구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현(현 명동) 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설을 추진합니다. 당시 조선 정부와의 갈등이 있었으나 끈질긴 협상 끝에 부지 소유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곳은 훗날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인 명동대성당이 세워질 자리가 됩니다.

부지 내에 선왕들의 영정이 모셔진 장소가 있다는 이유로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블랑 주교는 외교적 경로를 동원하여 정당한 매입임을 주장하며 권리를 지켜냈습니다.
이 부지 확보는 서울대교구가 도시 포교의 중심축을 마련했음을 의미합니다.

1890

[뮈텔 주교의 제8대 대목구장 취임]

구스타프 뮈텔 주교가 취임하여 교구의 행정 체계와 유물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40년 넘게 주교로 재임하며 교구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고 수많은 기록을 일기로 남겼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조선 교회는 안정적인 제도권 교회로 안착합니다.

뮈텔 주교는 과거 박해기의 기록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존했습니다.
그의 일기는 당시 조선의 사회상과 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엄격한 행정가로서 교구의 재정적 자립과 조직화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1892

[명동대성당 정초식 거행]

한국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성당인 종현 성당(명동대성당)의 정초식이 열립니다. 국왕의 반대와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건축의 시작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입니다. 건축 과정에서 수많은 신자가 봉사하며 신앙의 결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시작된 공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었습니다.
벽돌 한 장까지도 신자들이 직접 굽거나 나르는 등 헌신적인 노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완공되기도 전부터 서울 시민들에게 경이로운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1898

[명동대성당 축성]

마침내 명동대성당이 완공되어 축성식을 거행하고 봉헌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자부심이자 서울의 랜드마크로서 교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러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지하 성당에 안치하며 신앙의 연속성을 강조했습니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당시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명동대성당은 교구의 심장이자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1911

[대구대목구 분리]

조선 대목구가 비대해짐에 따라 남부 지역을 관할할 대구 대목구가 분리 설정됩니다. 기존의 조선 대목구는 '서울 대목구'로 명칭을 변경하여 중북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사목 구역이 다변화되는 시작이었습니다.

대구 대목구의 분리로 인해 효율적인 지역 선교와 행정이 가능해졌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권 선교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수많은 교구 분리의 첫 번째 사례로서 의미가 큽니다.

1920

[원산대목구 분리]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담당할 원산 대목구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됩니다.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이 지역의 전교를 맡아 특색 있는 선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대목구의 관할 범위는 점차 수도권 중심으로 조정되었습니다.

수도회가 직접 관할하는 교구로서 교육과 기술 보급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북방 선교의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이 지역의 사목권을 양도하며 동반 성장을 지원했습니다.

1924

[평양지목구 분리]

평안도 지역의 사목 효율성을 위해 평양 지목구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됩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이 지역을 맡아 미국식 선교 방식과 교육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북한 지역의 신앙 공동체가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중요한 사건입니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개신교와 천주교의 세가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독자적인 지목구 설정으로 현지 신자들과 사제들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사목 부담을 덜고 내실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1925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당시의 순교자 79명이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선포됩니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시복식은 한국 순교자들의 거룩한 희생이 전 세계에 공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이들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전개했습니다.

뮈텔 주교가 오랜 기간 준비해온 시복 조사 보고서가 결실을 본 성과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시복식으로 신자들에게 큰 긍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이 복자들은 훗날 1984년 성인 품에 오르는 103위 성인의 핵심이 됩니다.

1927

[광주지목구 분리]

전라도 남부 지역의 전교를 담당할 광주 지목구가 대구 대목구(서울 대목구에서 기원)에서 분리됩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이 지역 사목을 맡아 아일랜드 사제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도 지방의 복음화가 가속화되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광주 지목구의 탄생은 전남 지역 신앙 공동체의 자립성을 높였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간접적으로 지원하며 전국적인 교계 제도 안착을 도왔습니다.
지역 특성에 맞는 선교 전략이 도입되어 신자 수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1931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기념행사와 현양 대회를 개최합니다. 박해를 딛고 일어선 지난 1세기를 돌아보고 미래 100년을 향한 복음화 의지를 다졌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동대성당을 중심으로 전국의 신자들이 모여 장엄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회사 전시회와 강연회를 통해 순교 신앙의 의미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교구는 사목적 열의를 고취하고 조직의 내실을 기했습니다.

1939

[전주지목구 분리]

전라북도 지역의 효율적인 사목을 위해 전주 지목구가 대구 대목구에서 분리됩니다. 이로써 전라도 전역이 독자적인 사목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목구에서 시작된 분할 과정이 한반도 전역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전주 지역은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서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진 곳입니다.
지목구 승격으로 지역 신자들의 자부심이 높아지고 사목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전국적인 교구 네트워크가 촘촘해지며 복음 전파의 효율성이 극대화되었습니다.

1942

[첫 한국인 주교 노기남 탄생]

노기남 바오로 신부가 제10대 서울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며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탄생합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이 된 것은 민족 교회의 자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교구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데 헌신했습니다.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성성식은 조선인들에게 큰 희망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외국인 주교 시대가 가고 현지인 주교 시대가 열림으로써 사목의 현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노기남 주교는 해방 전후의 격동기 속에서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1945

[경성대목구 개칭]

해방과 함께 '서울 대목구'는 당시 행정 구역 명칭에 따라 '경성 대목구'로 잠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서울의 명칭을 따라 다시 서울 대목구로 정착되었습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도 교회는 질서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교회가 동참하는 시기였습니다.
노기남 주교는 해방 정국에서 정당 활동보다는 종교 본연의 역할과 구호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교구의 명칭 변화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일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1947

[주한 교황 사절 파견]

교황청이 한국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여 한국 교회와의 외교 관계를 수립합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 교회의 위상을 인정받은 것이며, 서울 대목구가 그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교황 사절의 상주는 향후 정식 교계 제도 수립의 발판이 됩니다.

패트릭 번 주교가 초대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서울에 주재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는 로마 교황청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전후 복구를 준비했습니다.
교황청과의 긴밀한 유대는 한국 교회가 국제적인 원조를 받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50

[한국 전쟁의 참화와 수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 대목구는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습니다. 명동대성당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으며,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납북되거나 피살되었습니다. 교회는 가장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교황 사절 패트릭 번 주교가 납북되어 행방불명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노기남 주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임시 교구청을 꾸리고 피난민 구호에 앞장섰습니다.
전쟁 중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자들의 희생과 기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3

[서울 환도와 복구 사업]

휴전 협정 체결 후 교구는 서울로 복귀하여 파괴된 성당과 시설물 복구에 착수합니다. 해외 가톨릭 구제회(NCWC) 등의 도움을 받아 피난민과 고아들을 위한 대대적인 원조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졌습니다.

전쟁터가 된 성당들을 수리하고 흩어진 신자 공동체를 다시 모았습니다.
무료 급식소와 진료소를 운영하여 전후 빈곤 문제 해결에 기여했습니다.
이 시기의 헌신적인 활동은 훗날 천주교가 한국 사회에서 큰 사랑을 받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1954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및 병원 확장]

의료 사업의 확장을 위해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기틀을 다지고 성모 병원을 강화합니다. '가톨릭 중앙의료원' 체제를 구축하여 현대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교구의 사목 목표 중 하나인 '치유 사업'의 본격적인 전개입니다.

전쟁 직후 열악한 보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전문 의료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성모 병원은 당시 국내 최고의 의료 시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의료를 통한 복음 전파는 서울 대교구가 지속해온 핵심적인 사회 공헌 활동입니다.

1958

[청주지목구 분리]

충청북도 지역의 사목적 집중을 위해 청주 지목구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됩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이 지역을 맡아 전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서울 대목구의 관할 구역이 경기도와 서울 중심으로 더욱 슬림화되었습니다.

충북 지역 신자들의 영적 돌봄이 더욱 세밀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구 분리는 한국 천주교회 전체의 성장세를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모교구로서 신설 지목구의 안착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1961

[인천지목구 분리]

경인 지역의 인구 증가와 전교 효율성을 위해 인천 지목구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됩니다.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이 지역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수도권 서부 지역에 독자적인 신앙 거점이 마련되었습니다.

인천 지목구는 항구 도시의 특성에 맞는 선교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목구는 관할 면적은 줄었으나 질적 성장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리는 훗날 경기도 지역의 추가 분할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1962

[서울 대교구 승격]

한국 천주교회의 정식 교계 제도가 수립됨에 따라 서울 대목구가 '서울 대교구'로 승격됩니다. 노기남 주교는 초대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선교지(대목구)가 아닌, 보편 교회와 동등한 지위를 갖춘 정식 교구가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의 교서에 의해 한국 내 3개 관구(서울, 대구, 광주)가 설정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서울 관구의 중심 교구로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정식 교구 승격은 한국 천주교 200년 역사의 성숙함을 전 세계에 공인받은 사건입니다.

1963

[수원교구 분리]

경기도 남부 지역의 사목 강화를 위해 수원교구가 서울 대교구에서 분리 설정됩니다. 초대 교구장으로 윤공희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수원 지역 신앙 공동체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이제 서울특별시와 일부 인접 지역만을 관할하게 됩니다.

수원교구의 분리는 경기도 지역의 급격한 도시화와 신자 수 증가에 대응한 조치였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분리 과정에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후 수원교구는 한국에서 가장 신자 수가 많은 교구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됩니다.

1966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이전]

미래의 사제들을 양성하는 신학교(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가 현재의 성북동 성신교정으로 이전합니다. 쾌적한 교육 환경을 갖추어 사제 양성 교육의 질을 한 단계 높였습니다. 이곳은 수많은 영적 지도자를 배출하는 교구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신학 교육뿐만 아니라 현대적 소양을 갖춘 사제 양성에 주력했습니다.
아름다운 조경과 역사를 간직한 교정은 사제 후보생들의 영성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신교정은 한국 교회 전체 사제 배출의 중심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968

[김수환 대주교 임명]

마산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가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됩니다. 젊고 개혁적인 리더십을 갖춘 그의 등장은 교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한국 사회에 구현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노기남 대주교의 사임 이후 교구의 방향성을 새롭게 설정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김수환 대주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세상 속의 교회'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취임은 서울 대교구가 사회 참여와 정의 수호의 길로 나아가는 서막이었습니다.

1969

[김수환 추기경 서임]

김수환 대주교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됩니다. 한국 천주교회 200년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최고 자문위원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추기경 서임 소식은 종교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기쁨과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 표어를 실천하며 국민적 신뢰를 얻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는 서울 대교구가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0

[원주교구 분리]

강원도 서남부 지역의 사목을 위해 원주교구가 서울 대교구에서 분리됩니다. 초대 교구장으로 지학순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지역 사회 운동과 복음화에 앞장섰습니다. 이로써 서울 대교구의 직접 관할 구역이 현대적인 형태로 정립되었습니다.

원주교구는 지학순 주교의 주도로 사회 정의 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원주 지역 신자들의 영적 독립을 축하하며 지속적인 유대를 다졌습니다.
전국의 교구 체제가 완성 단계에 접어들며 한국 교회의 조직력이 강화되었습니다.

1980

[명동대성당의 민주화 성지 부상]

5.18 민주화운동 등 시국 사건 때마다 명동대성당이 민주 인사들의 피신처이자 저항의 중심지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성당에 들어온 학생들을 지키며 권력의 압박에 당당히 맞섰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예언자적 소명을 다했습니다.

경찰의 성당 진입 시도를 막으며 "나를 밟고 가라"는 김 추기경의 말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성당 마당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광장이자 토론장이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이 시기를 통해 한국 사회의 도덕적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198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합니다.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기념 미사에는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운집하여 신앙의 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황은 한국 땅에 내리자마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 방문은 한국 천주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입니다.
교황은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 평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행사 전반을 주관하며 한국 교회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이 거행됩니다.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교황이 직접 시성식을 거행한 것은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수많은 성인을 모신 성스러운 반열에 올랐습니다.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 등 103명의 복자가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순교 신앙이 보편 교회의 신앙 유산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서울 대교구 내 서소문, 절두산 등 순교 성지들에 대한 현양 사업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1987

[6월 민주 항쟁과 교구의 결단]

6월 민주 항쟁 당시 명동대성당이 시위대의 최후 보루가 되어 민주화 운동을 지지합니다. 교구 사제단은 단식 투쟁과 시국 미사를 통해 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명동성당의 종소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시위 학생들을 보호하며 공권력 투입을 결사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서울 대교구는 한국 시민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1989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개최]

서울에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축제인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성대하게 열립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 아래 남북 평화와 세계 화해를 기원하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숙한 신앙과 조직력을 세계에 보여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장엄 미사에는 국내외 수많은 순례자가 참석했습니다.
성체 공경을 통해 신앙의 핵심을 되되새기고 사회적 나눔을 실천하는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가 주도한 이 대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1995

[평화방송·평화신문(cpbc) 설립]

복음의 현대적 전파를 위해 교구 산하의 종합 매체인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을 설립합니다. 라디오와 TV, 신문을 통해 신앙 콘텐츠와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사목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가톨릭 가치관에 기초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대중과 소통했습니다.
종교 소식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재는 모바일 앱과 유튜브 등을 통해 전 세계 신자들과 연결되는 미디어 허브로 성장했습니다.

1998

[정진석 대주교 착좌]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니콜라오 주교가 제13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착좌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거대 교구를 이끌게 된 그는 행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사목 내실화에 힘썼습니다. 교회법 전문가인 그의 임명은 교구 운영의 체계화를 예고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은퇴 이후 교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는 '생명 운동'과 '가정 사목'을 교구의 핵심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정진석 대주교의 온화하고 치밀한 리더십은 교구의 안정적인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2002

[교구 설정 170주년 기념]

교구 설정 170주년을 맞아 '21세기 새로운 복음화'를 기치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합니다.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 쇄신과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구사를 정리하는 대대적인 편찬 사업과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지역별 현양 미사와 봉사 활동을 통해 신앙의 삶을 실천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교구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사목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2004

[의정부교구 분리]

경기도 북부 지역의 사목 효율성을 위해 의정부교구가 서울 대교구에서 분리됩니다. 서울 대교구의 관할 구역 중 경기 북부 8개 시군이 신설 교구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서울 대교구는 현재와 같이 서울특별시 지역만을 온전히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거대화된 서울 대교구의 사목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용단이었습니다.
의정부교구의 탄생은 경기 북부 지역의 복음화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들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분리 후에도 의정부교구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지원하고 있습니다.

2006

[정진석 추기경 서임]

정진석 대주교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세계 교회 내에서의 비중을 인정받은 사건입니다. 이는 서울 대교구장의 직무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자리임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추기경 서임식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추기경으로서 생명 수호 운동과 북한 선교에 더욱 큰 목소리를 냈습니다.
두 분의 추기경을 동시에 모시게 된 한국 신자들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었습니다.

2009

[김수환 추기경 선종]

한국 사회의 거목이자 신앙의 아버지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향년 87세로 선종합니다. 명동대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종교를 초월한 40만 명의 조문객이 몰려 그를 애도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겨 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국가장 수준의 추모 열기 속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사랑과 화합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그의 장기 기증 실천은 사후 장기 기증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바보나눔' 재단을 설립하는 등 기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10

[교구 사제 수 1,000명 돌파]

서울 대교구 소속 사제 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섭니다. 이는 교구의 사목적 역량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음을 상징하는 수치입니다.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해외 선교와 특수 사목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일 교구로서 사제 1,000명 보유는 전 세계 가톨릭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입니다.
늘어난 사제 인력을 활용해 본당 중심 사목을 넘어 병원, 교도소, 노동 현장 등으로 사목 범위를 넓혔습니다.
교구의 사제 양성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었음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2012

[염수정 대주교 착좌]

정진석 추기경의 사임 후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가 제14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착좌합니다. 순교자 집안 출신인 그는 교구의 영성을 보존하고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응하는 사목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소통과 화합'을 핵심 가치로 내걸었습니다.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착좌식은 교구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교구 내 실무를 두루 거친 행정가로서 안정적인 교구 운영을 이어갔습니다.
순교자 현양 사업과 성지 조성 사업에 큰 열의를 보이며 교구의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2014

[염수정 추기경 서임]

염수정 대주교가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한국의 세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됩니다. 역대 대교구장들이 연속으로 추기경에 서임됨으로써 서울 대교구가 차지하는 국제적 중요성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는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한국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번째 추기경 서임식에서 임명되어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그는 서임 직후 북한 신자들을 위한 기도와 관심을 촉구하며 평양 대목구장 서리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염 추기경의 서임으로 서울 대교구는 대외적인 사목 영향력을 더욱 넓히게 되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한국 방문]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합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황의 소탈한 행보는 종교를 넘어 전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교황 방문의 모든 일정을 주관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확산시켰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포옹하는 교황의 모습은 큰 울림을 남겼습니다.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했습니다.
이 방문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적 소명과 복음적 가치를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의 집전으로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거행됩니다. 수십만 명의 신자가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이 예식은 한국 교회의 뿌리인 초기 순교자들의 신앙을 공식 인정받은 자리였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열린 이 시복식은 역사적인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기존의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던 초기 순교자들이 대거 복자 품에 올랐습니다.
박해 시대 가장 먼저 희생된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현양되는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이제 시복의 현장으로서 새로운 영성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2018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개관]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배출된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에 역사박물관과 성당을 포함한 유적지가 조성됩니다. 교구는 서울시와 협력하여 이곳을 종교적 성지를 넘어 시민들이 역사를 되새기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순교 신앙의 현대적 계승이자 문화 사목의 성공 사례입니다.

지상에는 시민 공원을, 지하에는 박물관과 경당을 배치한 혁신적인 설계로 주목받았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대사의 아픔을 함께 담아내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교구는 이곳을 통해 '서소문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2021

[정진석 추기경 선종]

평생을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정진석 추기경이 향년 90세로 선종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고 재산을 소외된 이들을 위해 남기는 등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교구는 그의 온화한 리더십과 깊은 신앙을 기리며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수많은 신자가 비대면과 대면을 병행하며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긴 '필자 추기경'으로서 신자들의 지성적 신앙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명동대성당 묘역에 안치되어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교구를 수호하는 영적 지주로 남았습니다.

[정순택 대주교 착좌]

염수정 추기경의 은퇴 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가 제15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착좌합니다. 가르멜 수도회 출신인 그는 영성 중심의 사목과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교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함께 걷는 교회'를 지향하며 사목적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수도회 출신 대교구장으로서 깊은 명상과 기도를 바탕으로 한 사목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청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교회의 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의 착좌는 서울 대교구가 현대의 복잡한 위기 속에서 영성적 해답을 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3

[2027 세계청년대회(WYD) 서울 개최 확정]

교황 프란치스코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폐막 미사에서 차기 세계청년대회 개최지로 '서울'을 공식 발표합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년들이 모이는 최대 규모의 행사를 유치함으로써 서울 대교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교구는 이를 위한 대대적인 준비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마닐라 이후 두 번째로 열리는 역사적인 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한국의 IT 기술과 전통문화, 그리고 뜨거운 신앙을 전 세계 청년들에게 전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서울 대교구는 이 대회를 통해 한국 사회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역동성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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