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교회, 개신교, 장로교, 대형교회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9:19
영락교회는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교회입니다. * 초고속 성장: 설립 1년 만에 1 500명 한국 최초 2부 예배 실시 등 경이로운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 사회적 영향력: 전쟁 중에도 전국 순회 전도대를 파견하고 사회복지재단 학교 등을 설립하며 사회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 선교 정신: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선교사를 파송하며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를 열었습니다. * 교계 리더십: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를 한국 교계의 중요한 중심으로 이끌었으며 템플턴상 수상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1945
[베다니 전도교회 창립]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베다니 전도교회'(영락교회 전신)를 창립했습니다.
이는 피난민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파하려는 절박한 염원에서 시작되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서울시 영락동에 위치한 천리교 경성분소를 미군정으로부터 종교 적산으로 불하받아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초기에는 27명의 북한 피난민 성도들이 모여 창립 예배를 거행하며 전쟁 후 혼란기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1946
[교회 명칭 변경]
창립 1년 만에 교인 수가 1,500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교회 명칭을 '영락교회'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빠른 성장과 안정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베다니 전도교회는 창립 1년 만에 교인 수가 1,500명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1946년 11월 교회 이름을 '영락교회'로 바꾸고, 경기노회에 가입하며 정식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947
[한국 최초 2부 예배]
한국에서 '최초로 주일 예배 2부제'를 실시했습니다.
급증하는 교인 수를 수용하고 효율적인 예배를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당시 한국 교회에 새로운 예배 문화를 제시한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주일 예배 2부제를 실시하며 늘어나는 교인들을 위한 공간과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강신명 동사목사를 청빙하고, 천막교회당 침수로 인해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성장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49
[교인 6천명 돌파]
교인 수가 6,000명으로 급증하며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교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석조건물 교회당 기공식을 진행하며 외형적인 성장도 함께 이루었습니다.
1949년에는 교인 수가 6,000명에 이르러 한국 교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상했습니다. 안정적인 예배 공간 확보를 위해 석조건물 교회당 기공을 시작했으며, 한경직 담임목사와 강신명 동사목사의 위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십자군 전도대 파견]
여순 반란 사건 발생 후, 교회가 연합하여 지리산 일대에 '십자군 전도대'를 파견할 때 영락교회가 1차 전도대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복음 전파를 넘어 사회 치안 안정에도 기여하려는 교회의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49년 말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영락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지리산 일대에 십자군 전도대를 파견하는 데 1차로 참여했습니다. 이는 지리산 일대의 치안 안정과 복음화를 동시에 추구하며 전국 순회 전도집회를 개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0
[부산 영락교회 설립]
한국전쟁 중에도 교회의 사명감을 잃지 않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 영락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혼란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이어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락교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피난지에서도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부산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피난민들을 위한 예배와 공동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신축 교회당 완공]
350평 규모의 2층 석조건물 교회당을 완공하고 입당 예배를 거행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뒷받침할 웅장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새로운 석조건물 교회당이 완공되어 입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김응락 장로와 김창화 집사가 교회당을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순교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1951
[대구 영락교회 설립]
피난지인 대구에서도 예배를 드리던 교우들이 힘을 모아 '대구 영락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전쟁 중에도 교회의 확장과 신앙 공동체 유지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전쟁 중 영락교회 교우들은 각자의 피난지에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구 영락교회'가 설립되어 전쟁으로 흩어진 교우들에게 영적인 안식처를 제공했습니다.
1952
[제주 영락교회 설립]
피난지 중 하나인 제주도에도 '제주 영락교회'를 설립하며, 전쟁의 고난 속에서도 전국적인 복음 전파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이는 영락교회가 단순히 한 지역 교회를 넘어선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부산과 대구에 이어 제주도에도 '제주 영락교회'를 설립하며, 전쟁 중에도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 노력을 지속했습니다. 이는 영락교회의 선교적 열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55
[최초 해외선교사 파송]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가 영락교회당에서 개최되었고, 한경직 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의 최초 해외선교사'로 최찬영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며 한국 선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영락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유치하며 한국 교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 특히 태국에 최찬영 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 교회의 첫 해외 선교를 시작하며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현실화했습니다.
1957
[사회복지재단 설립]
사회복지법인 '영락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히 종교적 활동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봉사하는 중요한 기관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적 책임과 봉사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영락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를 통해 소외된 이웃을 돕고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59
[영락 중/고교 설립]
교회 직영 교육기관으로 '영락중학교'와 '영락고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교회의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줍니다.
영락교회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회가 직접 운영하는 '영락중학교'와 '영락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는 한국 교육 발전에도 기여하는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69
[교구제 도입]
원활한 심방과 교우 관리를 위해 '교구제'를 처음으로 실시했습니다.
이는 대형교회의 특성에 맞춰 교인들을 더욱 세심하게 돌보기 위한 체계적인 변화였습니다.
영락교회는 대형화된 교회 규모에 발맞춰 교인 개개인에게 더욱 밀착된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교구제'를 도입했습니다. 초기에는 3개 교구로 시작하여 효율적인 교우 관리를 시작했습니다.
1973
[새 담임목사 부임]
한경직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박조준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영락교회의 새로운 리더십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 역사상 중요한 목회 세대 교체의 상징이었습니다.
영락교회의 기틀을 세운 한경직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박조준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지속적인 발전과 함께 목회 방향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의미합니다.
1980
[성도 2만 명 돌파]
주일 예배 성도 수가 '2만 명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교회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영락교회의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록입니다.
영락교회는 지속적인 부흥을 통해 주일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 수가 2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영락교회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기록적인 성과입니다.
1985
[김윤국 담임목사 부임]
김윤국 목사가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새로운 리더십 아래 교회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교회가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며 영락모자원, 영락경로원 등 복지 시설을 신축하는 의미 있는 해였습니다.
박조준 담임목사 사면 후, 김윤국 목사가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교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영락모자원과 영락경로원 원사를 신축하는 등 사회복지 사역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1988
김윤국 담임목사 사면 후, 임영수 목사가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임영수 목사는 이후 모새골 공동체 대표로 활동하며 새로운 목회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992
[한경직 목사 템플턴상]
한경직 원로목사가 '템플턴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영락교회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한경직 원로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의 일생에 걸친 신앙적 삶과 한국 사회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쾌거이며, 영락교회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1993
[전담목회제 실시]
교회의 방대한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전담목회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는 심방, 선교, 예배, 교육 등 각 분야에 전문 목사를 배치하여 체계적인 목회 시스템을 구축한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영락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욱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목회가 필요해짐에 따라, 심방, 선교, 예배, 교육, 사회, 상담, 행정 등 각 분야에 전담 목사를 임명하는 '전담목회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19교구 1,920구역이 편성되었습니다.
1997
[이철신 담임목사 부임]
이철신 목사가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영락교회의 새로운 리더십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건축된 '50주년 기념관'이 준공되어 교회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임영수 담임목사 사면 후, 이철신 목사가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같은 해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축 중이던 '50주년 기념관'이 준공되어 교회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00
[한경직 원로목사 소천]
영락교회의 설립자이자 한국 교계의 큰 스승이었던 한경직 원로목사가 소천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교계의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가 남긴 신앙적 유산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락교회의 설립자 한경직 원로목사가 향년 98세로 소천했습니다. 그의 서거는 한국 교계 전체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그의 삶과 사역을 기리는 다양한 추모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2002
[베다니홀 천장 붕괴]
베다니홀 2층 천장 붕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안전 관리 중요성을 일깨우는 아픈 사건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시설 보수 및 안전 강화에 더욱 힘쓰게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 탄생 100주기를 기념하는 해에 베다니홀 2층 천장 붕괴 사고가 발생하여 교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는 교회 시설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8
[김운성 담임목사 부임]
김운성 목사가 제6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영락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십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을 예고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철신 목사의 뒤를 이어 김운성 목사가 영락교회의 제6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부산 땅끝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 영락교회로 청빙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