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개신교 목사, 신학자, 교회 설립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9:05
옥한흠 목사는 한국 교회의 지형을 바꾼 선구자입니다.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한국 교회에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을 최초로 도입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철학은 교회는 건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신념 아래 평신도를 변화시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청빈한 삶과 교회 개혁을 위한 헌신으로 존경받았습니다.
1938
[옥한흠 목사 탄생]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아버지 옥약실과 어머니 이희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부터 4대째 기독교를 믿는 독실한 신앙 가문이었습니다.
1954
[기독교 신앙인으로 거듭남]
부산 남교회에서 열린 학생신앙운동 수련회에 참여하여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확고히 결심하는 중요한 영적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1957
[목회자의 길 시작]
재수를 실패한 후 기도의 시간을 통해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부산 칼빈신학교 종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이것이 그의 목회 인생의 첫걸음이 됩니다.
1961
[논산훈련소 입대]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대학 입시를 두 달 앞두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합니다.
군 복무 중에도 밤에 틈틈이 공부하며 입시를 준비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1962
[성균관대학교 입학]
군 복무 중에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야간 대학에 입학합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며 학문의 끈을 이어갔습니다.
1965
[김영순 사모와 결혼]
28세의 나이에 군 복무 중 폐결핵 투병을 마친 후, 교제 중이던 김영순과 결혼합니다.
평생의 동반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1968
[총신대 신대원 수석 입학]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습니다.
학비 문제로 아내와 5년간 별거해야 했음에도 학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은평교회 전도사 부임]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90여 명에 불과했던 주일학교를 450명까지 성장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장로와의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이는 '준비된 제직'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됩니다.
1970
[제자훈련의 시작]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당시 쇠퇴하던 대형교회 대학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12명의 대학생과 함께 교회 내 제자훈련을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2년 만에 대학부를 350명으로 성장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한국 교회의 패러다임을 바꿀 제자훈련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선교단체에 있는 '복음, 훈련, 비전'이 교회에 부재하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통해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 양성을 목표로 삼았고, 많은 전문직 인사들이 그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성도교회 주일학교 부임]
총신대 교수였던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성도교회 주일학교 사역자로 부임했습니다.
이후 6개월 만에 대학부를 담당하게 되며, 그의 목회 철학에 큰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1972
[목사 안수 및 졸업]
35세의 나이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수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목회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975
[미국 칼빈 신학교 유학]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확신을 얻기 위해 전액 장학생으로 미국 미시간주의 칼빈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가난하여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습니다.
1977
[신학석사 취득 및 박사과정]
칼빈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옮겨 목회학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신도를 대상으로 제자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신학적 답을 얻으며 '신학생으로서 거듭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1978
[미국 유학 마치고 귀국]
목회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귀국을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 전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네비게이토 선교회 본부를 방문하며 교회 개척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사랑의교회 창립]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초구 서초동의 한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는 1981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며 한국교회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979
[남자 제자반 시작]
초기 여자 제자반의 성공에 힘입어 남자 제자반을 시작했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평신도를 '작은 예수'로 세우고 세상에 파송하는 그의 목회 철학이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합동신학대학원 강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총신대학교 신학 교권 문제로 분열이 발생하자, 개혁 교단에 동참하여 합동신학교(現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제자화 신학은 처음에는 이견에 부딪혔으나 점차 설득력을 얻어갔습니다.
1981
[교회 명칭 '사랑의교회'로 변경]
강남은평교회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요한일서 4장 8절 말씀에 내포된 십자가의 의미를 담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이는 옥한흠 목사님의 핵심 목회 철학을 담은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1982
[사랑의 생활화 세미나 개최]
사랑의교회는 제1회 사랑의 생활화 세미나를 개최하며 대중에게 다가섰습니다.
이 세미나는 이후 '대각성전도집회'로 이름이 바뀌어 기존 신자들의 영적 각성을 돕고, 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1984
[《평신도를 깨운다》 출간]
5년간의 제자훈련 경험을 집대성한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100쇄를 넘기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전 세계 교회에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알리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1985
[합신 교단으로 이동]
분열된 합동 교단들의 연합을 시도하며, 합동신학교 설립에 기여했던 개혁 교단에서 합신 교단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는 한국 개신교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행보였습니다.
[사랑의교회 새 성전 입당]
교인 수가 500여 명으로 급증하자, 교회 건축을 결의하고 새 성전 입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소음 방지를 위해 예배실을 지하에 배치하고, 건축비 절약을 위해 불량 적벽돌을 사용하는 등 검소함을 추구했음에도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했습니다.
1986
[CAL 세미나 시작]
《평신도를 깨운다》 출간 이후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는 제자훈련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국제제자훈련원(현 세미나실)을 설립하고, 제1기 '평신도를깨운다 제자훈련지도사세미나'(CAL세미나)를 사랑의교회에서 개최했습니다.
이는 제자훈련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9
[1년간의 안식년]
과도한 사역으로 인한 탈진으로, 모든 훈련 업무를 부교역자에게 일임하고 1년간 하와이에서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로마서 강해설교를 계획하고, 의사의 권유로 사진 촬영을 취미로 시작했습니다.
[선교회 이사장 역임]
16년간 한국오엠국제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한국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선교사로 파송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는 활동입니다.
1992
[연변과기대 설립 협력]
소망교회와 협력하여 연변과학기술대학 설립에 힘을 보탰습니다.
교육을 통한 선교와 다음 세대 양육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1996
[교갱협 창립]
교회 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를 창립하여 합동교단 내의 금권선거를 뿌리 뽑고 총회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투명성과 개혁을 위한 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1998
[한목협 창립]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창립하여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했습니다.
개신교의 분열된 상황 속에서 화합을 위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2002
[웨스트민스터 명예박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Min) 및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목회적 공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총회사회복지위원장]
총회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사회 약자들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회 참여와 봉사에 대한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03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추대]
목회 일선에서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사랑의교회 공동의회를 통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건강한 교회 승계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후임으로는 오정현 목사가 청빙되었습니다.
[담임목사직 이임]
이임 예배를 통해 옥한흠 목사는 25년간 담임목사로 섬겼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원로목사로서 한국 교회와 사랑의교회를 위한 조언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6
[폐암 수술]
청년 시절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한 흉터가 폐암으로 발전되어 강남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2010
[옥한흠 목사 소천]
항암 치료 중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인해 향년 73세의 일기로 소천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제자훈련의 큰 별을 잃었지만, 그의 정신과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