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종교, 민족 종교, 신흥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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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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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동학에서 시작 1905년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편하며 새로운 시대를 연 한국의 민족 종교. 일제강점기 3.1운동을 주도하고 문화·교육·농민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 독특한 포덕 연호 사용과 대규모 농민운동 전개 등 기록적인 발자취를 남김. 교세 부침과 월북 사건 등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오늘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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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민족 이상향을 꿈꾼 동학]

조선 말기 대신사 최제우 선생이 민족주의 이상향을 꿈꾸며 창립한 '동학'은 훗날 천도교의 뿌리가 됩니다.

최제우 선생이 계시를 받았다는 1860년은 '포덕 원년'으로 삼아 현재까지 천도교만의 독특한 연호로 사용됩니다.

이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천도교의 깊은 역사와 자부심을 보여줍니다.

1898

[2대 교주 최시형 순교]

동학 농민 운동 진압 후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이 순교하면서, 교단은 위기에 처합니다.

이는 동학의 재건과 발전을 위한 3대 교주 손병희의 고뇌와 새로운 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1901

[손병희, 일본에서 재기를 꿈꾸다]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은 조선 정부의 탄압을 피해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그는 망명 중에도 국내 교인들과 연락하며 동학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일본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의 인식을 넓혀갔습니다.

1904

[진보회, 친일 논란에 휩싸이다]

손병희의 일본 체류 중, 동학교도들이 정치 참여를 위해 조직한 '진보회'가 일제의 영향으로 친일 단체화되는 논란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정치에서 분리하여 순수한 종교로 재정립하려는 결심을 굳히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905

['천도교' 새 이름을 얻다]

손병희 선생은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동학을 순수한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교명을 '천도교'로 공식 개칭했습니다.

이는 동학이 민족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1906

[손병희, 천도교를 재조직하다]

교명을 바꾼 손병희 선생은 귀국 후 '천도교대헌'을 반포하며 교단 조직을 혁신합니다.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지방에는 72개 대교구를 두는 등 체계적인 교단 체제를 확립하고, 교리, 교체, 교제, 오의를 제정하여 천도교의 사상적 기틀을 다졌습니다.

1907

[천도교, 종교의 자유 획득]

천도교는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는 천도교가 사회 속에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종교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중요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교세 확장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908

[천도교, 농민의 희망이 되다]

일제가 토지 수탈을 자행하자, 천도교 청년당은 '농민부'를 비롯한 7개 부문 운동을 전개하며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한 대규모 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사회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천도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1910

[교세 비약적 발전의 시기]

새로운 교리와 체제 확립 후, 천도교는 포교 활동과 함께 출판, 교육 등 다양한 문화운동을 전개하며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저변 확대는 훗날 3.1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할 기반이 되었습니다.

1919

[3.1운동, 천도교가 이끌다]

천도교는 기독교, 불교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여 3.1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수많은 천도교 교도들이 일본 제국의 탄압에 맞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천도교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청년교리강연부 설립]

3.1운동의 열기를 이어가며, 천도교는 1919년 9월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를 설립하고 이듬해 이를 '천도교청년회'로 개편했습니다.

전국적인 지부 결성을 통해 젊은 세대의 교화를 활성화하고 교단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1920

[《개벽》, 민족의식을 깨우다]

천도교는 종합 잡지 《개벽》을 시작으로 《신여성》, 《학생》, 《어린이》 등 근대 사회를 대표하는 월간 잡지들을 간행하며 민족의식 고취와 근대 문물 보급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발행하며 어린이 교육사업에 헌신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하지만 《개벽》은 일제의 탄압으로 1926년 폐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21

[교단, 변화의 바람이 불다]

천도교회는 중앙전제에서 지방대의제로, 교주제에서 중의제로 개편되는 변화를 겪습니다.

이러한 조직 개편은 훗날 '신파'와 '구파' 간의 대립과 교단 분열의 씨앗이 됩니다.

1922

[손병희 서거, 분열의 시작]

천도교의 3대 교주이자 구심점이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서거는 교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교단은 신구파로 심하게 갈라지며 내홍을 겪었고, 이는 교세가 급격히 하락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23

[천도교청년당, 지적 향상을 꿈꾸다]

천도교는 청년회를 개편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세우고 학술연구부를 두어 〈자수대학강의〉를 발행했습니다.

이는 한국 청년들의 지적 수준 향상을 도모하고, 교단 내부의 젊은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25

[조선농민사, 농민운동의 새 장을 열다]

천도교는 '조선농민사'를 창립하고 월간지 '조선농민'을 발간하며 농민 교양사업에 힘썼습니다.

이들은 1931년 '농민공생조합'을 결성해 전국적인 공동 경작을 시행하고, 농민고무공장을 세워 고무신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등 실질적인 농민 지원을 펼쳤습니다.

당시 천도교 농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농민총동맹보다 더 큰 규모로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1926

[신구파, 중앙종리원 공존]

손병희 서거 후 분열되었던 교단 내 '교인대화파'와 '통일기성회파'가 타협하여 '중앙종리원'을 만들면서, 한때 신구 중앙 종리원이 공존하는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1927

[교단, 또 다시 갈라서다]

1926년 잠시 공존했던 구파 종리원에서 '교인대회파'가 다시 분리되면서 천도교 내부의 분열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교단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습니다.

1930

[신구파, 잠시 손을 잡다]

길고 길었던 천도교 신구파의 대립 속에서 1930년 두 교파가 잠시 결합하는 시기를 맞았습니다.

이는 교단 통합의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31

[신구파 통합, 청우당 발족]

1931년, 신파 측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 측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힘을 합쳐 '천도교청우당'을 발족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내분을 극복하려는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1932

[신구파, 다시 갈라서다]

1930년 잠시 결합했던 신구파는 1932년 다시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교단 내부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천도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34

[독립운동의 좌절, 오심당사건]

천도교오심당 사건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던 교도 230여 명이 일제에 검거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천도교의 항일 독립운동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일제의 종교 탄압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937

[청우당 해체, 활동 위축]

일제의 대륙 침략(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천도교청우당이 강제로 해체당하는 등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1908년부터 이어져 오던 천도교의 농민운동을 비롯한 조직적인 사회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40

[신구파, 또 다시 결합하다]

1930년대 내내 반복되었던 천도교 신구파의 분열과 통합 시도 끝에, 1940년 두 교파가 다시 합쳐지며 교단 안정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1945

[광복, 그리고 남북 분단]

광복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천도교에도 큰 영향을 미쳐 남북 지역 교도 간의 연락이 어려워졌습니다.

북한 내 천도교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남한에서는 1948년 신구파가 다시 통합하는 등 교단 재건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1972

[수운회관, 교단 재건의 상징]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천도교의 발상지인 용담정이 복구되고, 천도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수운회관'이 서울에 준공되었습니다.

이는 침체되었던 교세를 다시 일으키고 교단을 재건하려는 중요한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1997

[오익제 교령 월북, 교단 위기 심화]

1970년대 최덕신 교령의 월북에 이어, 1997년에는 오익제 교령마저 월북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천도교 교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교단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9

[새로운 시대, 송범두 교령]

2019년 제39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제35대 송범두 교령이 당선되며 천도교는 새로운 지도체제 하에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는 천도교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중요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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