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정당, 정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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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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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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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해방 직후 창당된 대한민국 최초의 정당 중 하나. - 초기 좌우 합작의 빅텐트 성격이었으나 점차 호남 지주층 중심의 우익 정당으로 재편. - 미군정 시기 사실상 여당 역할 수행. -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당 차지. - 반민특위 활동 방해 논란 및 친일파 연루 의혹 제기. - 이승만 정부 초기 내각 인선 갈등 및 농지개혁법 추진으로 반이승만 노선으로 전환. - 1949년 민주국민당으로 개편되며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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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고려민주당 창당]

독립운동가 원세훈이 해방 다음 날 평택에서 상경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으로 평가받는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조선민족당 창당 및 합당]

김병로, 백관수 등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원세훈이 고려민주당 세력을 이끌고 조선민족당과 합당했다.

[한국국민당 창당]

장덕수, 허정, 백남훈, 윤치영, 윤보선 등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며 해방 정국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임시정부환영준비회 조직]

김성수, 조병옥 등 우익 인사들이 임시정부와 연합군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회를 조직하여 정치 활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민주당 통합 선언]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이 한국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을 선언하며 강령과 정책을 발표했다.

초기 한국민주당은 좌우합작 형태로 탄생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공산주의 계열 주도하에 변질되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자, 우익 세력의 반발을 샀다.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것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국민대회준비회 조직]

송진우, 김성수 등 동아일보 계열 및 우익 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 본격적인 우익 활동을 시작했다.

[임정 외 단체 배격 선언]

한국민주당 발기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의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하겠다고 선언하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난했다.

[미군정 선포]

미 24군단이 한반도 38도 이남에 입성하여 미군정을 선포하며 해방 후 한반도 남부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미군정과의 접촉 시작]

한민당계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에게 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면서 미군정과의 협력 관계가 시작되었다.

[미군정에 한반도 상황 보고]

미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는 한민당 대표인 조병옥, 윤보선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들었으며, 이 자리에서 한민당은 건준과 인공이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주장했다.

[한국민주당 정식 출범]

천도교 강당에서 1600명의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당이 정식 출범했다.

초대 수석총무는 송진우였다.

[한민당 중앙부서 확정]

한민당은 당수제 대신 총무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인 8총무제를 채택했다.

송진우가 수석총무, 김병로가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이 당무부장, 장덕수가 외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한민당 당원수 신고]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청 내무부에 전국적으로 50,000명의 당원 수를 신고하며 당세 확장을 시작했다.

[환국지사영접위원회 조직]

고하 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가 조직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임정 봉대론을 내세웠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가]

한국민주당이 이승만이 조직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하며 이승만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신탁통치 반대 결의]

한민당은 긴급 간부회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논의에 앞서 신탁관리제 실시를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결의했다.

[지방 지구당 조직 확대]

서울의 당 본부와 경기도 지구당에 이어 부산시 지구당과 경상남도 지구당을 결성하며 지방 조직을 확대, 지역 유지 및 해외 유학파 등이 참여했다.

[백관수 총무 수류탄 피습]

한민당 백관수 총무의 자택에 수류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여, 함께 식사 중이던 김병로 등 주요 인사들이 암살 위협을 겪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갈등]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 신탁통치가 협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민당 내부는 김성수의 반탁론과 송진우의 탁치 불가피론으로 나뉘어 갈등했다.

[송진우, 김구와 신탁통치 논의]

송진우 수석총무가 경교장을 찾아 김구와 만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의 정면대결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진우 피살 사건]

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송진우가 자택에서 한현우 등의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한민당은 원세훈을 임시 위원장에 추대했다.

미군정은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여 소환했고, 한민당 측도 김구를 의심하며 임시정부 측과의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946

[김구 송진우 암살 배후 의심]

미군정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여 소환하고 경고를 주면서 임시정부 측과 한민당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김성수 2대 수석총무 취임]

한국민주당은 김성수를 수석총무 겸 중앙집행위원회 총무로 선출하며 지도체제를 기존의 집단 총무제에서 단일 지도체제로 변경했다.

[반탁 일관 성명서 발표]

한민당은 김성수 수석총무 취임 후 반탁을 일관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신탁통치 반대 노선을 분명히 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 세력의 과도정부 구성 배제를 주장했다.

[한독당-국민당 통합]

미소공위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국독립당과 국민당이 통합을 선언하며 민족주의 진영의 재편 움직임을 보였다.

[우익 4당 합당 협의 난항]

한국독립당, 국민당, 한국민주당, 신한민족당 등 4개 우익 정당이 합당을 협의했으나, 한민당 측이 중앙위원수 및 인선 배치 문제로 통합에 난색을 표하며 이탈했다.

[송진우 암살범 검거]

경기도 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고, 이들이 송진우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꾸몄음을 밝혔다.

[한민당, 한독당 통합 불참]

한국독립당으로의 통합에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은 참여했으나, 한민당은 끝내 이탈하며 우익 진영 내 분열을 지속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승만이 전북 정읍 유세에서 남한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을 주장하며 단독 정부 수립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이승만 단정론에 대한 반응]

이승만의 남한 단정론에 대해 한국독립당, 조선인민당 등 다수 정당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으나, 한국민주당만이 이승만의 주장을 지지했다.

[좌우합작위원회 출범 및 비판]

좌우합작위원회가 정식 출범했으나, 한국민주당은 초기부터 이 위원회를 비판하며 좌우합작운동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송진우 암살범 지도자 공판]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에게 권총을 제공한 지도자 전백에 대한 공판이 열리면서 사건의 배후 및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우합작 7원칙 반대 및 탈당]

좌우합작 7원칙 중 토지 개혁(유상몰수 무상분배)에 대한 한민당의 반대(유상몰수 유상분배 주장)로 원세훈, 한흥주 등 다수의 당원이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청년부 주요 인사 탈당]

한국민주당 청년부장 박명환을 비롯한 16명이 당의 노선에 반발하며 탈당 행렬에 동참했다.

[이순탁 탈당]

한국민주당의 주요 인사인 이순탁도 당의 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탈당을 선언했다.

[김용국 등 17명 탈당]

김용국을 포함한 17명의 당원들이 추가로 한국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당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김성수, 좌우합작 지지 발언]

김성수 수석총무는 대규모 탈당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급히 입장을 바꿔 사태 진화를 시도했다.

[김약수 등 89명 탈당]

김약수, 손영극 등 89명의 대규모 당원들이 한국민주당을 추가 탈당하며 당의 세력이 더욱 왜소화되었다.

[입법기관 설립 반대 성명]

한국민주당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립되자 이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견제 태세를 유지했다.

[김구, 친일파 숙청 촉구]

김구가 서울신문 1주년 축사에서 '친일분자 숙청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지나치게 따지지 않고 용서할만한 자도 매장하려 한다'고 발언하며 사실상 한민당을 지목해 비난했다.

[최양옥 등 17명 탈당]

최양옥, 박용희 등 17명의 당원들이 한국민주당을 탈당하며 대량 탈당 사태가 이어졌다.

[김상규 등 중앙위원 탈당]

김상규를 비롯한 4명의 중앙집행위원과 82명의 당원이 추가로 탈당하며 당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이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박원식 등 58명 탈당]

박원식 등 58명의 당원이 탈당하며 대량 탈당 사태의 마지막 물결을 이루었으며, 이는 당의 노선 통합과 결속 강화로 이어졌다.

1947

[안재홍 민정장관 공격]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중도파 안재홍이 임명되자, 한민당은 중도파의 미군정 기구 진입을 경계하며 안재홍을 맹렬히 비난하고 심지어 인사 발령까지 거부했다.

[한현우, 징역 15년 선고]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가 최종 언도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면서,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우익 진영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이승만, 공위 참가 보류 주장]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 지명자로 이윤영을 발표하자, 한민당이 지지하던 김성수 등을 기피한 것에 각 파벌이 반발하며 이윤영 인준이 부결되었다.

[반탁 진영 공위 참가 논란]

반탁 진영 대표자 대회에서 미소공위 참가 여론이 반반으로 갈린 가운데, 한국민주당의 장덕수 등이 참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한민당, 공위 참가 선언]

한국민주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공식 선언하고, 다른 우익 진영에도 참가를 종용하며 미소공위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밝혔다.

[한민당, 우익 공위 참가 재차 종용]

한민당은 우익 진영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것을 재차 종용하며, 이승만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임정수립대책협의회 구성]

한민당은 우익 진영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종용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권위를 내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으나, 정작 임시정부 측은 참여하지 않았다.

[한독당 3당 분립]

한국독립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로 내부 갈등을 겪다 신한국민당과 민주한독당으로 분열하며 3당으로 나뉘었다.

[2차 미소공위 결렬 및 단정론 전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한국민주당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김성수 암살 미수 사건]

호남선 열차에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김성수가 암살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조선해양청년단 소속의 백영기 등이 여운형 피살에 대한 복수로 노린 것이라고 밝혀졌다.

[장덕수 피살 사건]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자택에서 박광옥, 배희범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장덕수 살해범 체포]

장덕수 피살 사건 발생 이틀 만에 미군정 경찰이 범인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여 수사에 착수했다.

[김성수 암살 미수 진상 발표]

경무부장 조병옥은 김성수 암살 미수 사건이 조선해양청년단 소속 백영기 등이 여운형 피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노린 것이라고 발표했다.

1948

[장덕수 피살 관련 김석황 체포]

수도청장 장택상이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하면서,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이 사건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측과의 결별]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의 명칭을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하며, 사실상 임시정부 측과의 정치적 결별을 공식 선언했다.

[장덕수 피살 범인 발표]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박광옥, 배희범 등을 포함한 10명이 장덕수 피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장덕수 살해 재판 김구 연루설]

장덕수 살해 사건 제1회 공개 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피고인 진술서에 담긴 김구 관련 내용을 증거로 제출하며 사건의 파장을 키웠다.

[김구, 장덕수 사건 소환]

미군 군율재판위원회는 김구에게 3월 12일 출정 소환장을 발부했다.

반면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연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김구, 재판서 연루 부인]

김구는 미군 군사법정의 증인심문에서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며 장덕수 피살 사건과의 관련성을 강력히 부인했다.

[배희범, 장덕수 암살 이유 증언]

장덕수 살해 사건 공판에서 배희범은 장덕수가 신탁통치를 시인하고 과거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이유였다고 증언했다.

[대한혁명단 조직 증언]

장덕수 피살 사건 공판에서 용의자들은 1947년 8월 한양의원에서 대한혁명단을 조직했으며, 원래 안재홍, 배은희, 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장덕수만 암살 대상으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장덕수 사건 교수형 선고]

장덕수 살해 사건 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박광옥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

[유엔, 한민당을 '극우'로 규정]

유엔은 한국민주당이 임시정부에 보낸 메시지 내용을 근거로 유엔보고서에 한민당을 '극우' 정당으로 규정했다.

[장덕수 사건 판결 감형]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한 후 박광옥, 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되 집행을 보류하고, 다른 사형수들의 형량을 종신형 및 10년형으로 감형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제1당]

한국민주당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90명의 입후보자 중 29명이 당선되며 총 유효 투표의 13% 의석을 차지, 제1당이 되었다.

[미군정, 한민당 '극우' 언급]

주한미군사 자료에서 '양측 모두 극우적인 한민당 소속이었는데,'라고 명시하며 경무부 내부 갈등을 언급, 한민당의 극우적 성향을 기록했다.

[초대 내각 인선 갈등 시작]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 지명자로 이윤영을 발표하자, 한민당이 지지하던 김성수 등을 기피한 것에 각 파벌이 반발하며 이윤영 인준이 부결되었다.

이승만은 원내 3대 파벌의 후보를 기피하며 통일 염원과 동시에 친일 논란을 피하려 했고, 이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 악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승만, 의원들 비판 및 이범석 내정]

이승만은 의원들이 진영 논리에 함몰돼 국가 재건을 방해한다고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한 후,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내정했다.

[한민당, 이범석에 내각 8석 요구]

김성수 당수가 이범석 국무총리 내정자를 초대하여 국무총리 인준 동의 조건으로 내각 8석을 요구했고 이범석이 이를 수용했다.

동시에 한민당 내 이승만 지지파와 호남파 간의 내분이 발생했다.

[이승만-한민당 결별 시작]

이승만 대통령이 이범석의 건의를 무시하고 한민당계에서 김도연 1명만을 입각시키자, 윤치영 등 이승만 지지파가 한민당을 탈당하며 이승만과 한민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정현모 등 국회의원 탈당]

윤치영에 이어 정현모를 비롯한 9명의 국회의원들이 한국민주당을 탈당하며 이승만 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

국회 특별법기초위원회가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안'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을 작성하여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반민법 국회 상정 및 한민당 반대]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한국민주당은 이 법이 사회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법제위원회로 회부하자고 주장했다.

[김준연, 반민법 과도한 추궁 우려]

한국민주당 선전부장 김준연은 일제 치하에서 친일 관련 범위가 광범위했으므로 너무 심하게 추궁하면 교각살우의 폐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김성수, 친일파 처벌 범위 축소 요청]

한국민주당 당수 김성수는 친일파·민족 반역자 숙청을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회견을 청하여 친일파 문제를 광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했다.

[친일 재벌, 한민당에 로비 자금 제공]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논의되자, 친일 재벌 김모씨가 이 법안의 완화 또는 무능화를 위해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한국민주당에 제공하며 로비를 벌였다.

[반민특위 전원 사임]

신익희 국회의장이 반민족행위가 있는 정부위원들의 임명을 승인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 전원이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현우, 옥중서 임정 지지 주장]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가 옥중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행에 대해 심경 변화가 없다고 밝히며 스스로를 '대한임정 지지자'라고 주장했다.

[여순사건 계기 정부 공격 강화]

한국민주당은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며 정권 획득을 목표로 비건설적인 국회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9

[한국민주당 해체 및 통합 결의]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각각 해체하고 민주국민당으로 통합 결성할 것을 결의하며 새로운 정치적 기반 마련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국민당 소속 국회의원 23명이 한국민주당과의 합당을 반대하고 탈당하는 진통이 있었다.

[민주국민당 정식 출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통합으로 민주국민당이 정식 출범했으며, 이는 1955년 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농지개혁법 제정]

이승만 정부가 농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했다.

이는 한민당의 주요 재정 기반이었던 전라도 친일 지주층을 겨냥한 것으로, 한민당의 반이승만 노선 전환을 가속화했다.

한민당은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나,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30% 10년 상환안을 주장했으며, 당수 김성수가 염전으로 농지개혁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행각을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농지개혁법 실시 강조]

민주국민당 함상훈 선전부장이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으나 행정기구와 예산 미비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조속한 실시를 강조했다.

1950

[언론, 한민당 '극우' 언급]

한성일보, 자유신문 등의 보도에서 '종래 극우이던 한민계 의원'이라고 명시하며 한국민주당의 극우적 성향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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