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애국단

독립운동단체, 항일조직,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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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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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단체, 항일조직,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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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조직한 핵심 항일 무장투쟁 단체. - 이봉창 윤봉길 의거로 일본 고위 요인들을 처단하며 세계적 반향을 일으킴. - 중국 장제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내 한중 연합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함. -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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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이봉창, 애국단 가입]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김구의 신뢰를 얻은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으로 가입하며, "적국의 수괴(首魁)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는 비장한 선서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는 곧 다가올 거대한 의거를 예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김구는 청년단원을 모집하던 중 1931년 말 일본어에 능통한 이봉창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함께 지내면서 신뢰를 쌓게 되었고, 12월 13일 이봉창을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가입시켰습니다. 이봉창은 이때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적국의 수괴(首魁)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봉창, 도쿄 파견]

일왕 암살을 결심한 김구의 지시로 이봉창 의사가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상하이를 출발, 도쿄로 향했습니다.

그는 히로히토 일왕의 관병식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김구에게 암호전문으로 알리며 거사 계획을 구체화했습니다.

이봉창이 일왕 암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자, 김구는 히로히토 일왕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1931년 12월 17일, 이봉창은 상해를 출발하는 우편선 빙천환(氷川丸)에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3등 선객으로 승선, 12월 19일 고베에 입항했습니다. 이후 도쿄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월 8일 관병식이 거행됨을 알고 상해의 김구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음'이라는 암호전문으로 거사 계획을 알렸습니다.

1932

[이봉창 의거 발생]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세계를 뒤흔든 거사를 감행했습니다.

비록 암살은 실패했지만, 이 의거는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고,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을 호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행부중(不幸不中)' 기사를 쓴 중국 신문들이 폐간되는 등 국제적 파장이 컸습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암살에는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 의거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청도 《국민일보》는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撃日皇不幸不中)'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일본 군경의 습격으로 신문사가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장사(長沙)·상해 등지의 신문들도 '불행부중(不幸不中)'의 문구를 썼다가 일본의 항의로 폐간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봉창 의거는 일왕을 폭살하지는 못했지만, 1931년 완바오산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을 호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각지의 교포들로부터 격려 편지와 자금 지원 제의가 쏟아지는 등 독립운동에 대한 국내외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일제는 중국 침략을 서둘러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이봉창 의거의 국제적 반향에 당황한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서둘러 상하이를 무력으로 제압했습니다.

이로 인해 상하이는 무장해제되고 중국군 주둔이 금지되어,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이 더욱 노골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 제국은 중국 침략을 서둘러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변에서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을 제압함으로써 상하이는 무장해제되었고, 중화민국은 더 이상 자국의 군대를 상하이에 상주시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 야욕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출운호 폭파 미수]

한인애국단이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해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 군사령부의 핵심 군함 '이즈모호(출운호)'를 폭파하려 했으나, 폭탄 장착 과정에서 발각되어 아쉽게 실패했습니다.

이는 일본군 핵심 전력에 대한 대담한 공격 시도였습니다.

1932년 2월, 한인애국단은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하여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핵심 군함인 출운호(이즈모호) 폭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잠수부들이 머뭇거리다 발각되어 거사는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비행장 폭파 발생]

1932년 3월 25일 10시 5분, 일본군 비행장에서 폭파 사건이 발생하여 3명이 부상하고 1명이 실종되었으며 12명이 사망했습니다.

비록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시설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의 일부로 추정됩니다.

1932년 3월 25일 10시 5분, 일본군 비행장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명이 부상하고 1명이 실종되었으며, 12명이 사망했습니다. 비행장을 폭파시킨 사람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독 암살 미수]

김구의 지시로 이덕주와 유진만 단원이 국내로 파견되어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을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덕주는 옥사하고 유진만은 광복 후 별세했습니다.

김구는 윤봉길 의거 직전 한인애국단 단원인 이덕주와 유진만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932년 4월, 이덕주와 유진만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계획된 공작을 실행하려다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거사는 실패했습니다. 이덕주는 7년형을 구형받은 후 3년 뒤인 1935년 2월 해주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유진만은 광복 후까지 조용히 살다가 별세했습니다.

[윤봉길, 선서문 작성]

윤봉길 의사가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는 비장한 선서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는 훙커우 공원에서 펼쳐질 역사적인 거사를 앞두고 그의 불굴의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내용의 선서문을 작성했습니다.

[윤봉길 의거 발생]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 축하연에 폭탄을 투척, 상해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일본 고관들을 처단하는 세계적인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장제스마저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며 극찬한, 한민족 독립운동사의 금자탑을 세운 사건입니다.

1932년 2월,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후 김구는 중국 정부 요인 왕백수, 천궈푸와 중국군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했습니다.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제1차 상하이 사변 패전으로 접근이 어려워 포기했습니다. 이후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윤봉길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새벽 6시, 김구는 윤봉길과 최후의 아침식사를 함께 했고, 윤봉길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김구에게 건넨 후 오전 7시경 거사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날 일본 제국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제1차 상하이 사변 승전기념 및 천장절 행사를 열었고, 윤봉길 의사는 상해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일본 고관들을 처단했습니다. 윤봉길 의거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한인의 반일 투쟁이 국제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으며, 중국 인민들에게도 큰 고무작용을 했습니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다롄 의거 미수]

김구의 지시로 유상근, 최흥식이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 암살을 위해 다롄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윤봉길이 사용했던 폭탄까지 준비했으나,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체포되면서 거사는 실패했습니다.

유상근은 13년간 옥고를 치르다 광복 하루 전 옥사했고, 최흥식은 수감 중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구는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사장 우치다 고사이 등을 암살하기 위해 유상근, 최흥식을 다롄으로 파견했습니다. 1932년 4월 25일에 유상근은 윤봉길이 사용했던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떠나 5월 4일 다롄에 도착했습니다. 이성발 형제, 최흥식과 거사를 준비하던 중,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발각되면서 최흥식이 체포되었습니다. 고문과 심문으로 유상근의 거처를 알아냈고 유상근마저 체포되었습니다. 이성발 형제도 유상근이 체포된 다음 날 체포되었습니다. 결국 거사는 실패했고, 유상근은 뤼순감옥에서 13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옥사했습니다. 최흥식은 수감 중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순국일은 알 수 없습니다.

[김구, 주모자 선언]

김구는 상하이 각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자신임을 당당히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거액인 60만원의 현상금이 걸렸지만, 김구의 세계적 명성은 치솟았고 임시정부의 재정난까지 해소되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는 군무부장 김철과 함께 중국국적 한국인 선궈췐의 주선으로 외국인기독교청년회 주사 미국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비호를 받아 모 목사의 사택에 잠복했습니다. 1932년 5월 9일, 김구는 상하이 각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에 의해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구의 세계적 명성은 치솟았고,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도 활기를 띄어 재정난이 해소되었습니다.

[김구, 장제스 피신]

일제의 추격을 피하고자 김구는 상하이를 탈출하여 항저우를 거쳐 자싱으로 피신했습니다.

장제스 총통의 지시로 천궈푸 조직부장이 김구를 보호하며, 장제스-김구 간의 비밀 연락 통로가 마련되어 한중 연합의 기반이 다져졌습니다.

일제에게 수배된 김구를 장제스(장개석)는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진과부)에게 보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천궈푸는 상해의 피치 박사 집에 은신해 있던 김구를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시키고자 했고, 이를 조직부에서 일하던 샤오정(소쟁)에게 맡겼습니다. 샤오정은 그가 잘 알고 지내던 추푸청(저보성)에게 부탁했습니다. 추푸청은 중국 국민당 당원으로 저장성(절강성) 주석을 역임한 바 있고 자싱(가흥)의 유지였습니다. 1932년 5월 14일, 김구는 상하이를 탈출하여 항저우로 가서 쥐잉뤼서(聚英旅社)에 투숙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자싱으로 이동해 추푸청의 집에 피신했습니다. 이후 장제스-천궈푸-샤오정-김구로 이어지는 연락통로가 마련되었습니다. 상호간의 연락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중국 국민당의 공패성이 난징과 자싱을 오가며 연락을 담당했고, 박찬익도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천궈푸는 중요한 사항의 경우에는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맡았습니다.

[이봉창 사형 선고]

일왕 암살 시도 후 체포된 이봉창 의사가 인곡형무소에 수감된 채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는 일본 제국이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한 탄압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왕 저격 거사 후 체포되어 인곡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2년 9월 30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봉창 의사 순국]

오전 9시 2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왕 암살이라는 대담한 거사를 감행했던 이봉창 의사가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습니다.

그의 희생은 한민족의 불굴의 저항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게 했습니다.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봉창 의사에게 사형이 집행되어 조국 독립을 위한 그의 숭고한 희생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순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의사가 총살형으로 순국했습니다.

그의 순국은 중국 장제스 총통의 극찬을 받으며 한중 연합의 불씨를 지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의 주역인 윤봉길 의사에게 총살형이 집행되어 순국했습니다. 그의 의거는 국제적으로 한인의 반일 투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으며, 중국 인민들에게도 큰 고무작용을 했습니다.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희생은 한중 연합의 기틀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5

[애국단, 중국 학생에 글]

한인애국단 명의로 '중화전국내경학생대표에 보내는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윤봉길 의사 순국일에 맞춰 중국 학생들에게 구국운동 동참을 호소하며, 한중 연대를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1935년 12월 19일, 한인애국단 명의로 구국운동에 나선 중국 학생대표들에게 보내는 글인 「한인애국단에서 中華全國來京학생대표에 보내는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날입니다.

1936

[한인애국단 해체]

1936년까지의 공식 언론 활동 이후, 한인애국단은 별도의 해체 선언 없이 자연스럽게 활동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주요 인물들의 투쟁 방향 변화와 임시정부의 새로운 전략 모색과도 연관될 수 있습니다.

1936년 8월 29일 「國恥紀念日에 愛國同志에 檄함」 발표 이후, 한인애국단은 공식적인 활동이 확인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3.1 기념일 격문]

한인애국단 명의로 「3·1기념일에 대한 격문」이 발표되어,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날을 맞아 민족의 단결과 항일 의지를 다시금 고취했습니다.

1936년 3월 1일, 한인애국단 명의로 「3 · 1기념일에 대한 격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애국단, 중국동지에 글]

훙커우 공원 의거일에 맞춰 한인애국단 명의로 「한인애국단이 중국혁명동지에게 삼가 고하는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중국과의 연대를 강조하며 공동의 적에 맞설 것을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1936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명의로 「한인애국단이 중국혁명동지에게 삼가 고하는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4월 29일은 홍구공원 의거를 결행한 날입니다.

[국치기념일 격문]

국치기념일을 맞아 한인애국단 명의로 「국치기념일에 애국동지에 격함」이 발표되어, 망국의 한을 잊지 않고 독립 의지를 다지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1936년 8월 29일, 한인애국단 명의로 「國恥紀念日에 愛國同志에 檄함」이 발표되었습니다.

1945

[유상근 의사 옥사]

다롄 의거를 시도하다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13년 간 옥고를 치르던 유상근 의사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안타깝게 옥사했습니다.

그의 희생은 해방의 기쁨을 보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극을 상징합니다.

다롄 의거 미수 사건으로 체포된 유상근은 뤼순감옥에서 13년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옥사했습니다. 최흥식은 수감 중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정확한 순국일은 알 수 없습니다.

1946

[7의사 유해 환국]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7분의 의사 유해가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국 광복 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한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김청광, 김석영, 홍성주, 박상조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이 중 윤봉길과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원이었습니다.

[부산 삼의사 추도회]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김구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추도회가 성대히 열렸습니다.

이후 유골은 봉안소에 안치되고 서울로 봉안될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1946년 6월 15일 낮 12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추도회가 열렸습니다. 추도회가 끝난 다음 유골은 다시 봉안소에 안치되었고, 김구 총리 일행은 당일 동래에서 일박 후 부산발 해방호 열차로 유골을 봉안하고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삼의사 유해 서울 도착]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 속에 조계사(태고사)에 임시 안치되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의 귀환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46년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삼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역장의 안내로 일단 귀빈실에서 잠시 휴계한 다음 소년군을 선두로 조계사(태고사)에 안치했습니다.

[삼의사 국민장 거행]

수만 명의 시민과 이승만, 김구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의 국민장이 효창공원에서 거행되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이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민족적 대행사였습니다.

1946년 7월 7일 아침, 수만 명의 시민이 시내 태고사에 운집했고, 국민장의 행렬은 오전 10시 삼의사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 속에 효창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여운형과 각 정당 단체 대표자, 각 학교 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안국정 사거리, 종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여 금정(현 용산구 효창동),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에 이르렀습니다. 효창공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12시 40분이었고, 오후 2시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된 뒤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

[이봉창·윤봉길 서훈]

조국 독립에 기여한 이봉창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윤봉길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각각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영원히 기리는 조치였습니다.

1962년, 이봉창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윤봉길 의사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68

[유상근·최흥식 서훈]

다롄 의거를 시도했던 유상근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최흥식 의사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어 그들의 희생이 기려졌습니다.

(최흥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

1968년, 유상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최흥식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습니다. 최흥식은 이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90

[이덕주·유진만 서훈]

조선총독 암살 미수를 시도했던 이덕주, 유진만 의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이들의 헌신적인 독립운동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1990년, 이덕주 의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유진만 의사에게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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