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근대 협회, 민중 계몽, 민권 운동, 자주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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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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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협회, 민중 계몽, 민권 운동, 자주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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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입니다. 민중의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며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습니다. 독립문 건립 만민공동회 개최 등 활발한 계몽 및 개혁 활동을 펼쳤습니다. 자주 국권 자유 민권 자강 개혁을 핵심 가치로 삼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보수 세력과의 충돌로 해산되었지만 그 정신은 후대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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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서재필 귀국]

갑신정변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정부의 사면령으로 1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이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4년 12월 정부의 사면령이 내려지자 11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우선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알아야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1896

[건양협회 결성]

김윤식을 비롯한 갑오경장 주도세력 50여 명이 건양협회를 결성했으나, 활동이 지지부진하여 이후 독립협회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는 독립협회의 규모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1896년 2월 김윤식 외 갑오경장 주도세력 50여 인에 의해 결성되었다가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건양협회를 독립협회가 흡수하여 규모를 확산시켰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서재필이 백성 스스로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고, 국내외 사정을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순 한글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계몽운동에 나섰습니다. 이는 독립협회 활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895년 박영효, 유길준 등의 권고로 귀국한 서재필은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알아야 된다고 역설하며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 <대조선 독립협회보> 못지않게 충실한 협회의 대변지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협회 창설]

서재필을 주도로 이완용, 안경수, 윤치호 등이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과 민중의 인권·참정권 주장을 목표로 독립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초기에는 사교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민중계몽 및 근대적 정치 단체로 발전했습니다.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이완용, 서재필, 안경수,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등에 의해 결성, 조직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사교 형식으로 출발하여 민중계몽단체, 근대적인 정치단체 및 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했습니다. 협회의 결성을 주도하던 개화파는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했습니다. 협회 강령은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민권쟁취, 자주독립, 국권회복입니다.

[독립문 건립 및 독립관 개칭]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정신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웠으며,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 장소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자주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중요한 상징적 활동이었습니다.

1896년 11월 지금의 서대문구 자리에 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그 옆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함을 기념하는 독립문을 건립했습니다. 이때 독립문 건립에 쓰일 성금은 왕실 인사와 고위 관료, 그리고 직업을 알 수 없는 많은 국민이 냈습니다.

1897

[만민공동회 시작]

독립협회가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 시작하며 백성들에게 토론과 연설을 통해 자기 주장을 펼칠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민중의 정치 참여와 계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897년 중반부터 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 주관하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로써 토론과 웅변, 연설에 대한 것이 일반인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열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종 환궁 성사]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총영사관에 머물던 고종에게 환궁을 호소하여, 마침내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897년 2월 아관파천 이후 계속 주조선러시아 총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공사관 체류가 문제임을 지적하고,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여 성사시켰습니다.

[독립협회 노비 해방 결의]

독립협회 토론회에서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는 것이 의리상 불가하다'는 주제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참석자 중 100명 이상의 노비가 자발적으로 해방되는 등 노비 해방 풍조가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킬 것을 계획했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 제8회 토론회의 주제로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에 대단히 불가하다'를 선언하였습니다. 토론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고, 참석한 회중은 자기가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성부 양반가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는 등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898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고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도록 하는 등 열강의 이권 침탈에 강력히 저항하며 자주국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고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홍종우의 상소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민공동회, 러시아 고문단 철수 요구]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을 격렬히 성토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여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1898년 3월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을 격렬히 성토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누구나 참여해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인 만민공동회는 조선 민중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켰습니다.

[서재필 출국]

독립신문과 협회의 활동을 위험요소로 여긴 척신과 황제파 대신들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서재필이 협회를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등에게 인계하고 조선을 떠났습니다. 이후 협회는 윤치호와 이상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독립신문과 협회의 활동을 위험요소로 여긴 척신과 황제파 대신들이 서재필을 공격하게 되면서 궁지에 몰렸고, 자객까지 침투하게 되자 결국 그는 떠나게 됩니다. 서재필은 1898년 5월 협회를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등에게 인수하고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서 떠났습니다.

[관민공동회 개최 및 헌의 6조 건의]

독립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정부 고위 관료와 백성들이 함께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를 조직하여, 시국 개혁을 위한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이를 고종에게 건의하며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독립협회 활동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898년 10월 한성부 종로 네거리에서 관민공동회를 조직,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 안을 고종에게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헌의 6조는 외국인에 의지하지 않고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광산·철도·차관 등 외국인과의 조약 시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서명 및 날인 필요, 전국 재정 탁지부 관할 및 예산·결산 공포, 중대 범죄 공판 진행 및 피고 인권 존중, 칙임관 임명 시 정부 자문 및 과반수 찬성, 규정의 실지 시행을 주요 내용으로 했습니다.

[중추원 관제 반포]

정부가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을 독립협회에서 투표로 선거하게 하는 새로운 중추원 관제를 발표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의회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의 결실이었으나, 결국 좌절되었습니다.

1898년 11월 2일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이었습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반수(25명)는 정부가 국가에 공로 있는 자를 천거하고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하게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를 환영하며 11월 5일에 선거하기로 했습니다.

[독립협회 간부 체포]

수구파가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익명서를 퍼뜨리자,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17명에 대한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려 부회장 이상재 등 주요 간부들이 검거, 투옥되었습니다.

1898년 11월 5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에 의해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회장 윤치호는 체포 직전 몸을 피했습니다. 선거 전날, 수구파는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외무대신 정교 등으로 정권을 쥐려 한다는 익명서를 거리에 내다붙였고, 익명서에 놀란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독립협회 간부 석방]

이승만 등을 중심으로 한 만민공동회의 철야 농성과 시위로 체포되었던 독립협회 간부 17명 전원이 석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장안의 스타로 부상하며 민중의 영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격분한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인 이승만은 앞장서서 철야 농성을 벌였고, 날이 밝자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소집하여 사건 경위를 해명하고 동지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11월 10일 체포된 17명 전원이 석방됐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장안의 일약 스타로 데뷔하게 됩니다.

[독립협회 강제 해산]

고종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하면서 독립협회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이는 독립협회와 보수 세력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1898년 12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습니다. 이는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수구파의 무고와 익명서 사건으로 인한 고종의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독립협회의 활발한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899

[독립협회 최종 해산]

1898년 강제 해산 이후 1년여 간 존속하던 독립협회가 최종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에서 개설한 만민공동회는 1900년까지 존속하며 그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고종이 민회 금압령을 내려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 25일 사실상 해체되었고, 그 후 협회는 1년여 간을 더 존속하다가 1899년 12월 최종 해산되었습니다. 독립협회에서 개설한 만민공동회는 1900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민권 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주장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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