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민족 종교, 신흥 종교, 독립운동 단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8
홍암 나철이 단군을 숭앙하며 1909년 창시한 민족 종교입니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거점으로서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 및 무장 투쟁을 지원했습니다. 광복 후에도 민족 정체성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교육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5
[경전 수령을 통한 종교 활동 시작]
나철이 백전 도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받으며 종교 활동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나철은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 도인으로부터 대종교의 핵심 경전인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받았습니다. 이는 대종교 창시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908
1908년 나철은 도쿄에서 두일백 도인으로부터 단군교포명서를 전해 받았습니다. 이 문서는 국조 단군 숭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대종교 창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1909
[대종교의 시작, 단군교 창시 (중광절)]
홍암 나철 선생이 서울 재동에서 동지 10명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를 창시했으며, 이날을 중광절로 삼았습니다.
나철 선생은 일본의 대한제국 간섭이 심해지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 서울 북부 재동에서 오기호, 정훈모 등 동지 10명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를 창시하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날을 중광절로 기념합니다.
1910
[단군교, 대종교로 개칭 및 만주 진출]
단군교를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고, 같은 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며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단군교는 창시 1년 만인 1910년 1월 15일, 정훈모의 친일 변절로 인한 교단 분열과 일제의 탄압을 앞두고 '대종교'로 교명을 변경했습니다. 같은 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여 국내를 넘어 만주 일대로 포교 영역을 확대했습니다.
1910년 7월 30일,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는 이에 반발했습니다. 정훈모는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시켰고, 이후 정훈모의 단군교는 친일 인사들을 수뇌부에 두며 일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14
[본사 만주 이전 및 포교 영역 확대]
대종교 본사를 만주 북간도로 옮겨 국내와 만주 일대로 포교 영역을 확대하고 독립운동 기틀을 다졌습니다.
대종교는 1910년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한 데 이어, 1914년에는 아예 대종교 본사를 만주 북간도로 이전했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뿐 아니라 만주 일대로 포교 영역을 넓혔으며, 독립운동 거점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1915
[일제의 대종교 탄압 시작]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하며 대종교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10월 8일, 일본 제국은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하여 대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종교 총본사는 만주 지린성 허룽현 청파호로 옮겨졌습니다.
1916
1916년 중광조 나철이 순교하자, 대종교의 역사서 편찬에 기여한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했습니다. 김교헌은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오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했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습니다.
1919
[상하이 임시정부 주요 구성원, 대종교인 다수]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일 정도로 대종교는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했을 때,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습니다. 이는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등 많은 애국지사가 대종교인이었음을 보여주며, 대종교가 한국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 중 하나였음을 입증합니다.
1920
[독립군 기지 건설 및 무장투쟁 전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대종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1920년대 대종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대한독립군단과 같은 독립군을 조직하고 지원했습니다. 특히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을 만큼,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1923
[김교헌 사망 무렵, 교세 확장]
2대 교주 김교헌 사망 무렵, 한국·만주·노령(러시아)·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을 보유하며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2대 교주 김교헌이 사망할 무렵인 1923년에는 대종교가 한국, 만주, 노령(러시아), 중국 본토 등지에 48개의 시교당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져왔음을 보여줍니다.
1932
[윤세복 3대 교주 취임 및 지하 활동 전환]
윤세복이 3대 교주로 취임한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당했으며, 대종교는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대 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1932년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일제의 대종교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많은 교인이 체포되고 학살당하면서 대종교는 외부 활동이 어려워져 지하 조직으로 전환하여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7
[탄압 속 시교당 수 증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며 포교활동이 확대되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종교의 시교당 수가 52개로 증가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곧 독립운동의 확대였습니다.
1945
[광복과 대종교 세력의 국내 귀환]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만주로 망명했던 대종교 세력들이 국내로 귀국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후, 약 30년 넘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종교의 총본산 세력들과 주요 교인들이 1946년을 전후하여 미군정 조선 시기의 영토로 영구 귀국했습니다. 이는 대종교의 새로운 국내 활동 시대를 열었습니다.
1946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습니다. 이는 민족의 자주성과 대종교의 위상을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개천절 성화 봉송 및 점화]
개천절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어,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되어 점화되었습니다.
1946년 개천절 행사에서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민족의 영산인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되어 점화되었습니다. 이는 민족의 건국 정신과 대종교의 역할을 대내외에 알리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1948
[대한민국 초대 정부와 대종교의 역할]
대한민국 초대 정부 수립 후 대종교는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고, 홍익인간 교육이념 채택,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 대종교 지식인들이 정부 고위직에 입각하여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국경일 지정,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습니다.
1955
한국전쟁 이후 환국 직후에도 번성하던 대종교는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시기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등 경전과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 역사서 보급에도 힘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