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시민 운동, 민중 운동, 사회 단체, 정치 단체, 토론회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7
*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 민중의 힘을 모아 국정을 개혁하려 했던 대토론회이자 시민운동. * 독립협회 주도로 시작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민중 대회로 성장. * 열강의 이권 침탈 반대 부패 척결 민중 참정권 요구 등 개혁 운동 전개. *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참여한 한국 최초의 대중 운동. 백정 출신 연설은 파격적인 신분 해방의 상징. * 헌의 6조 결의로 한국 최초의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 * 정부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현대 대한민국 시민운동의 중요한 모델이 됨.
1896
[독립협회 창립]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패 척결, 내정 개혁을 목표로 독립협회를 조직했습니다.
백성들의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알리며 회원 가입에 자격 제한을 두지 않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1897
[만민공동회 첫 출범]
독립협회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도로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가 처음 개최되었습니다.
한성부 시민, 소상인,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중 집회로, 국정 개혁을 위한 연설과 강연, 민중 건의사항을 채택하는 공개적인 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관민공동회로 성장]
박정양을 비롯한 정부의 개혁적 관료들이 독립협회와 함께 만민공동회를 주관하면서, 이 모임은 명실상부한 범국민적인 대회이자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정부와 민중이 함께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로 불리며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1898
[대규모 반외세 시위 전개]
한성부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평민인 미곡상인 현덕호가 회장으로 추대되며 신분 초월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한러은행 개설 등 열강의 이권 개입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토와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결과, 러시아인 고문단과 한러은행이 철수하고 프랑스 금광 채굴권, 일본인 군사교관 소환 조치 등이 성사되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만민공동회 독자 활동]
만민공동회 집회는 거의 날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개최되며,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시민단체로 거듭났습니다.
직접 대표를 뽑아 회의 결의사항을 집행하는 등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선보였습니다.
[고종, 의회 설립 허락]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함께 고종에게 '의회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거듭된 상주 끝에 고종으로부터 의회 설립을 허락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국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었습니다.
[헌의 6조 채택 및 백정 연설]
1만여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관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가장 천대받던 백정 출신 박성춘이 개막 연설을 하며 신분 차별을 초월한 참여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정부의 개혁안인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헌의 6조는 외국 의존 지양, 이권 계약 시 민중 대표 서명, 재정 투명성 확보, 중죄인 공개 재판, 칙임관 임명 시 정부 동의, 법률 시행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는 하원 설치 등 민권 신장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독립협회의 헌의 6조와 차이를 보였습니다.
[한국 최초 의회 설립안]
헌의 6조 실시 약속 후, 한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인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습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은 정부가,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투표로 선거하게 하여 국민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독립협회 간부 대거 체포]
중추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획책한다'는 익명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을 내렸고,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한 1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이승만이 배재학당 학생들과 함께 철야 농성 시위를 벌이며 맞섰습니다.
이승만은 모닥불을 지펴놓고 군중에게 연설하며 단결을 독려했고, 결국 정부는 11월 10일 체포된 17명 전원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위는 '헌의 6조 실시'와 익명서 조작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계속되었습니다.
[만민공동회 강제 해산]
고종은 익명서 사건을 빌미로 독립협회가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모함을 믿고,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 2천여 명과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불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혈충돌이 발생하며 민중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투옥되어 고문 끝에 종신형을 선고받는 등 주요 인사들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만민공동회가 제시한 헌의 6조 또한 폐지되었습니다.
1899
[만민공동회 최종 폐지]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만민공동회는 얼마 동안 그 명맥을 이어가려 노력했으나,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폐지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