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1967년)

정당,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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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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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은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제1야당입니다. 제3 4공화국 시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끌며 한국 정치사의 주요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아우르는 빅텐트 정당으로 활동했으나 1980년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해 해산되며 격동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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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윤보선 대선 후보 출마]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박정희 후보에 맞섰습니다.

윤보선 후보는 4,526,541표, 40.93%의 득표율로 2위에 그치며 아쉽게 낙선했습니다.

[신민당 창당]

민주세력의 결집을 통해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며 신민당이 공식 창당되었습니다.

창당과 동시에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표위원에는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을 추대하며 제1야당으로서의 위상을 다졌습니다.

[신민당 정식 등록]

신민당이 정식으로 등록되어 법적 인정을 받았습니다.

1968

[유진오 총재 추대]

신민당은 제2차 전당대회를 통해 총재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를 도입하고, 유진오 대표를 초대 총재로 추대했습니다.

1969

[유진오 총재 재추대]

제3차 전당대회에서 유진오 총재가 재추대되었고, 당헌 개정을 통해 부총재직을 4명으로 늘리고 정무위를 두는 등 당 운영 체제를 보강했습니다.

[삼선개헌 저지 위한 당 해산]

삼선개헌 저지를 위해 유진오 총재는 긴급 전당대회를 열어 개헌 지지 성명을 낸 의원 3명을 제외한 44명 전원을 제명하고 당을 자진 해산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이는 해당 의원들의 의원직 상실을 노린 한국 정치사상 유례없는 초유의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삼선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2(117명) 찬성 족수 중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등 3명의 신민당 의원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며 찬성 의원이 122명에 달하자, 신민당은 당 해산을 통해 해당 의원들의 의원직을 상실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민주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야당의 강력한 투쟁 방식이었습니다. 해산된 당 소속 의원들은 '신민회'를 결성하고 최단 시일 내 재건을 다짐했습니다.

[신민당 재창당]

자진 해산했던 신민당은 빠르게 창당대회를 열고 유진오 전 총재를 다시 총재로 추대하며 당을 복원했습니다.

이는 삼선개헌 저지를 위한 전략적 재정비의 일환이었습니다.

구 신민당의 당헌과 정강정책을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당의 연속성을 강조했습니다.

[신민당 재등록 완료]

재창당된 신민당이 공식적으로 재등록되었습니다.

1970

[유진산 새 대표 선출]

유진오 총재가 뇌졸중으로 사퇴함에 따라 임시 전당대회가 열려 유진산 수석부총재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논란이 일었습니다.

총재직을 대표위원제로 바꾸고 치러진 선거에서 유진산은 치열한 접전 끝에 과반 득표로 대표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날 자유당을 흡수합당하며 당세를 확장했습니다.

[한국독립당 흡수합당]

한국독립당을 흡수합당하며 당의 외연을 더욱 넓혔습니다.

1971

[김대중 대선 후보 출마]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국민적 기대를 모았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5,395,900표, 45.2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역대급 초접전을 펼쳤으나 아쉽게 낙선했습니다. 이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평가됩니다.

[진산 파동 발생]

유진산 대표가 사퇴하면서 신민당에 '진산 파동'이라는 리더십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김홍일 대표 선출]

진산 파동으로 인한 리더십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김홍일 대표대행이 김대중 후보를 꺾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표 선출 투표는 3차례에 걸쳐 진행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1차와 2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었고, 결국 김홍일 대행이 김대중 의원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표가 되었습니다.

1972

[신민당 내 계파 분열]

신민당이 유진산계를 중심으로 한 '진산계 전당대회'와 김홍일, 김대중, 양일동 등 '반진산연합계'가 별도로 전당대회를 열며 당이 두 쪽으로 분열되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1973

[유신 사태 속 당 재통합]

10월 유신이라는 날벼락에 직면한 신민당은 분열된 상태로는 대처하기 어렵다고 판단, 유진산 대표의 사퇴로 다시 통합의 길을 걸었습니다.

김홍일 대표 측이 유진산 대표를 상대로 낸 직무정지 소송을 취하하며 통합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유진산 총재 재선출]

통합 전당대회를 통해 2년 임기의 총재직을 신설하고 유진산 전 대표를 총재로 선출하며 민주헌정 회복 등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을 천명했습니다.

1974

[유진산 총재 서거]

신민당의 유진산 총재가 서거하면서 당에 다시금 리더십 공백이 찾아왔습니다.

[김영삼 총재 선출]

유진산 총재 서거 후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치열한 경선 끝에 김영삼 전 원내총무가 신민당의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총재 선출을 위한 투표는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2차 투표까지 이어졌으며, 4위 고흥문과 5위 이철승 후보가 각각 김영삼과 김의택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김의택 대행이 사퇴하며 김영삼 총무가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1976

[신민당 각목 난동 사건]

새 총재 선출을 위한 신민당 전당대회에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사주를 받은 조직폭력배 김태촌이 난입하여 각목을 휘두르고 대의원 명단을 불태우는 등 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는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는 한국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야당 전당대회 폭력 사태로 기록됩니다.

박정희 정권은 온건 노선의 이철승 의원을 당수로 만들기 위해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당사에 난입,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김영삼 총재 측 대의원들은 전당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비주류만의 전당대회로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선출되는 등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당이 두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는 유신 체제하에서 야당 탄압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충환 총재대행 추대]

각목 난동 사건으로 분열된 당을 수습하기 위해 주류와 비주류 측의 합의로 이충환 의원이 총재대행으로 추대되었으며, 당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선출]

주류와 비주류의 합의로 다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제를 도입하고 이철승 후보가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표최고위원 선출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결선 투표까지 이어지는 접전이었으며, 정일형 후보가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면서 결국 이철승 후보가 김영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1979

[김영삼 총재 재선출]

신민당 정기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하고 김영삼 전 총재가 다시 신민당의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며 국민적 기대를 모았습니다.

총재 경선에는 7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김대중 전 의원의 권유로 조윤형, 김재광, 박영록 후보가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습니다. 1차 투표에 이어 2차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김영삼 총재가 간발의 차이로 이철승 대표를 꺾고 총재직을 탈환했습니다.

[김영삼 총재 직무 정지]

김영삼 총재가 법원의 결정으로 총재직 직무가 정지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야당 탄압의 일환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김영삼 총재 직무 복귀]

직무 정지 상태였던 김영삼 총재가 총재직에 복귀했습니다.

1980

[김영삼 총재 정계 은퇴]

신군부의 강압적인 협박으로 김영삼 총재가 정계에서 은퇴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신민당 공식 해산]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7조에 따라 당시 존재하던 모든 정당이 자동으로 해산되면서 신민당 역시 13년 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정치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당시 활동하던 모든 정당을 해산시킨 5공화국 헌법에 의해,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서의 험난했던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이후 신한민주당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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