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당
정당, 독립운동 단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3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심장이 된 한국독립당이 상하이에서 출범했습니다. 이동녕 안창호 김구 등 한국 독립운동의 거성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민족주의 정당입니다. 해방까지 임시정부의 핵심 여당으로서 독립의 큰 그림을 그리며 민족의 염원을 담았습니다. 광복 후 국내 정치에 뛰어들었으나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여러 차례 위기와 분열을 겪었습니다. 1970년 주요 야당에 통합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한국 독립사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1930
[한국독립당 창당]
혼란스러운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이 화려하게 출범했습니다.
이동녕, 안창호 등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거물들이 주축이 되어, 임시정부의 사실상 '여당'으로서 독립의 주춧돌이 되고자 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이 곧 정부처럼 운영되기도 했지만, 점차 민주적인 여당의 형태로 자리 잡으며 독립운동의 중심축으로 활약했습니다.
1935
[조선민족혁명당 합류]
독립운동 진영의 대통합을 목표로, 한국독립당은 5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한독립당, 의열단 등 여러 단체와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거대 조직으로 합쳐졌습니다.
이는 좌우익을 아우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한국독립당 재건]
조선민족혁명당이 사회주의 계열에 의해 주도되자, 조소앙 등 기존 한국독립당 핵심 인사들은 과감히 탈당을 선언하고 민족주의 노선을 지키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선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937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참여]
한국독립당은 김구가 창당한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함께 우익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는 흩어졌던 민족주의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모으려는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1939
[좌우익 연합체 참여]
독립운동의 힘을 더욱 키우고자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소속 단체들과 좌익 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단체들 간의 대대적인 통합 논의에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좌우익을 아우르는 독립운동 연합체인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되며 독립운동의 큰 물줄기를 만들었습니다.
1940
[민족진영 대통합]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중, 충칭으로 옮겨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 (기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민족주의 3당이 김구를 중심으로 드디어 하나의 '한국독립당'으로 완전히 통합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독립당은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강력한 여당이자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942
[좌우 합작 시작]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독립당은 좌익계열과도 손을 잡고 독립운동의 폭을 넓혔습니다.
이는 해방을 앞두고 모든 독립운동 역량을 총집결하려는 중요한 노력이었습니다.
1945
[광복 후 국내 활동]
광복과 함께 한국독립당은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의 정당으로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임시정부의 핵심 세력이었던 만큼,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이승만 탈당]
해방 후 국내 정치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에 입당했던 이승만이 정파 정치에 반대하며 탈당했습니다.
이는 해방 공간에서 시작된 정치적 갈등과 노선 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46
[해방 후 3당 통합]
광복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한국독립당은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국민당, 신한민족당과 합쳐 대규모 통합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해방된 조국에서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다지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47
[미소공위 찬성파 탈당]
미소공동위원회 참석을 둘러싼 노선 갈등으로 한국독립당은 또다시 내부 분열을 겪었습니다.
김규식,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 했던 안재홍 등 구 국민당 세력이 미소공위 성사를 주장하며 한독당을 탈당, 신한국민당과 민주독립당을 결성했습니다.
이는 해방 정국의 복잡한 이념 대립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1948
[임병직 등 탈당]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에서 임병직 등 주요 인사들이 연이어 탈당했습니다.
이는 해방 이후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당의 구심점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습니다.
[남북협상과 세력 약화]
김구 주도의 한국독립당은 남북협상 참여를 기점으로 당내 세력이 점차 분열되고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대의와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두고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각자의 노선을 걸으며 겪었던 불가피한 진통이었습니다.
[제헌국회 총선 불참]
김구 주도의 한국독립당은 제헌국회 총선에 불참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김구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제헌국회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1949
[핵심 인사 이탈]
김구 피살 이후 한국독립당은 와해 수순을 밟으며 주요 인물들이 대거 당을 떠났습니다.
신익희는 민주국민당으로, 조소앙은 사회당을 창당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고, 이시영, 이범석 등은 이승만 대통령 진영으로 합류했습니다.
이는 한국독립당의 사실상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김구 피살과 당 위기]
한국독립당의 구심점이었던 김구 주석이 비극적으로 피살되면서 당의 세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독립당의 와해를 가속화시켰고, 많은 핵심 인사들이 다른 정당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62
[김홍일 중심 재건]
김구 주석 사망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한국독립당은 김홍일을 중심으로 '구국일념의 야당'을 선언하며 재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약화된 기반으로 인해 재건은 쉽지 않았습니다.
1965
[김두한 당선, 원내 진입]
재건 후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던 한국독립당은 보궐선거에서 김두한이 당선되면서 드디어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단 한 명의 의석이었지만, 이는 한국독립당이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했음을 알리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1966
[내란음모사건 발생]
한국독립당은 '내란음모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사건은 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1967
[식물 정당화]
내란음모사건의 여파로 한국독립당은 '식물 정당' 체제를 면치 못했습니다.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다시피 하며 당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선거 연속 낙선]
한국독립당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진한 후보를 내세웠지만 낙선했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1969
[김학규 재건 시도]
쇠퇴해가던 한국독립당은 김학규에 의해 다시 한번 재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당의 힘은 예전 같지 않았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격이었습니다.
1970
[신민당으로 통합, 해산]
긴 역사를 이어온 한국독립당은 야당 통합 움직임에 따라 신민당 등 주요 보수정당으로 흡수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았던 한 독립운동 정당의 마지막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