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무장독립운동단체, 독립운동, 아나키스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2
1919년 약산 김원봉이 중국 상하이에 설립한 무장독립운동단체. 3.1운동 이후 비폭력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무력 항쟁을 유일한 수단으로 삼음. 조선총독부 등 일제 주요 기관 파괴 및 친일파 암살을 목표로 활동.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정신적 기반으로 삼아 폭력투쟁을 강조. 이후 중국 국민당 황포군관학교 입학 등 노선 변화를 거쳐 조직 개편 및 해체.
1920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파]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서장을 폭사시켰습니다.
이는 의열단이 일제의 심장부에 던진 강력한 첫 경고였습니다.
[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파]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던져 일제 경찰에 대한 의열단의 응징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1921
[김익상, 총독부 폭탄 투척]
김익상 의사가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부수는 대담한 거사를 감행했습니다.
1922
[다나카 기이치 암살 시도]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 의사가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습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습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그는 이후 벌어진 시가전에서 홀로 수많은 적과 맞서 싸우다 순국하며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조선혁명선언 발표]
약산 김원봉의 요청으로 단재 신채호가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명확히 하고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임을 선언하며 한국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이 선언은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단원들의 필독서로 지정되었으며, 거사 후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1924
[김지섭, 日궁성 폭탄 투척]
김지섭 의사가 일본 도쿄의 궁성 정문 앞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불발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제국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하려 한 의열단의 세계적인 대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친일파·밀정 암살 시도]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친일파 조직 일진회 회장 이용구 암살을 시도했으나 부상만 입히는 데 그쳤습니다.
(배정자가 은퇴하게 된 사건임)
[친일파 정갑주 사살]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의사가 대표적인 친일파 인물인 정갑주와 그의 가족을 사살하며 친일 세력에 대한 의열단의 강력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만주 총영사관 폭탄 투척]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의사가 만주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이어 군자금 탈취를 시도하던 중 김광추 의사가 총에 맞아 순국하고,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926
[나석주, 식산은행 습격]
나석주 의사가 일제의 대표적 경제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며 민족 경제 착취에 대한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했습니다.
1927
[난창 폭동 참여와 와해]
의열단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봉기를 일으킨 난창 폭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의열단 노선 변화의 시작이었으나, 조직의 와해를 가져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날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나중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1928
[창립 9주년 성명서 발표]
의열단은 창립 9주년 성명서를 통해 폭력혁명 강조와 함께 공산주의적 사상을 반영하며 혁명 노선 변화를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민족적 협동전선과 세계 혁명전선으로의 통일을 주장한 중요한 선언이었습니다.
성명서에는 강도 일본 타도, 전투적 협동전선, 통일적 독립당 완성, 자치주의자 타도, 혁명의 기초를 노농대중에게, 세계혁명과 연결, 소비에트 연방과 동맹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1929
[공산주의 노선 변화와 이탈]
의열단의 노선이 공산주의로 기울자, 비공산주의자 의열단원 중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하여 대거 이탈하면서 의열단은 겨우 잔당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의열단 해체 성명 발표]
의열단은 '본단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에 부응치 못하였다'는 해체 성명서를 내고 스스로 해체했습니다.
이는 의열단의 조직적 무력 투쟁의 막을 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해체 성명서를 내고 스스로 해체하였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