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정당, 공산주의 정당, 독립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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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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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공산주의 정당, 독립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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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비밀리에 창당된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입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심한 탄압과 내부분열 속에서도 해산과 재건을 반복했습니다. 해방 후 남북한 공산주의 세력 재편의 핵심적인 전신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으며 폭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 정치 세력으로 오늘날 조선로동당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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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고려공산당 대회 개최]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는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이 해외에서 구체적인 조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가 열렸습니다. 중국 오사 운동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조선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를 개최하며,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1924

[조선공산당 지부 베이징 설립]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중국 베이징에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해외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거점을 확대하는 시도였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궤적을 따라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중국 베이징에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내 공산주의 운동과 연계될 수 있는 해외 거점 마련의 일환이었습니다.

1925

[조선공산당 정식 창립]

서울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정식으로 창립하고, 김재봉을 초대 책임 비서로 선출했습니다. 이 당은 '화요회당'으로도 불렸습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초대 책임 비서로 김재봉이 선출되었습니다. 이 당은 화요회 출신이 주동이 되어 조직되었다 하여 일명 '화요회당'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박헌영의 집에서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고, 박헌영이 책임 비서로 선임되었습니다.

1925년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는 데 성공하고,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박헌영이 고려공청회 책임 비서로 선임되었습니다.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발생 및 김재봉 구속]

김재봉, 박헌영 등이 모스크바 파견 훈련을 추진하다 일제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김재봉 등이 체포되며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해체와 재건을 거듭하게 됩니다.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 조직 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 파견 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그 계획이 탄로되어 김재봉, 강달영 등이 체포되었고, 신의주는 물론 간도에 있던 조선공산당의 근거지까지 수색당해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었습니다.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입니다.

[제2차 조선공산당 극비 재조직]

제1차 공산당 사건 이후 강달영을 책임 비서로 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극비리에 재조직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제1차 당의 후속 조직이었습니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되었습니다. 재조직된 공산당원들은 1차 공산당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당 책임 비서에는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 비서에는 권오설이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 조직이었습니다. '강달영당'으로도 불렸습니다.

1926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발생 및 해산]

강달영 주도의 2차 공산당은 6.10 만세운동 참여를 계획했으나, 거사 직전 밀정에 발각되어 간부들이 구속되고 당이 강제 해산되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겪었습니다.

강달영당의 정치 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달영당은 민족주의 진영과 천도교 중진 등과도 접촉을 시도하며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추진했습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은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탄로되어 일망타진당하면서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간부들은 구속되고 강달영당은 강제 해산당했습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고 합니다.

[정우회 선언 발표]

일본에 있던 사회주의 유학생단체 '일월회' 간부들이 국내 잠입 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26년 11월 일본에 있던 사회주의 유학생단체인 일월회의 간부인 안광천, 하필원 등이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습니다. 이들은 곧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 형태를 정치투쟁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며 노선의 전환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선언을 정우회 선언이라고 합니다. 이 선언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협동을 추진하자는 내부의 의견을 결집시켰습니다.

[제3차 조선공산당 재건 (ML당)]

정우회 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습니다. 이를 ML당이라고 하며, 코민테른으로부터 당 조직 운영 및 단일 민족혁명전선 조직 방침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12월 정우회 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습니다. 이를 ML당이라고 합니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 사상 이른바 ‘파쟁 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불립니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 조직 운영 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 방침 및 운영 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 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합니다.

1927

[비정통파 '춘경원당' 결성]

정통파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 등이 서울 춘경원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해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습니다. 이 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1927년 12월 정통파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 등이 서울 춘경원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해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이라고 불렸습니다.

1928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ML당 사건) 발생]

ML당은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책임 비서를 수시로 바꿨으나, 김철수,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 등 간부들이 일경에 검거되며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해산되었습니다.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 책임 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김세연 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습니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 비서로는 양명·하필원·김철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당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춘경원당 해산]

이영 등이 결성한 비정통파 '춘경원당'이 일제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되며 해산되었습니다.

이영 등이 결성한 비정통파 조선공산당인 춘경원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고 말았습니다.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발생]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발생하여 차금봉 등 170여 명의 당원이 구속되고 조직이 와해되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차금봉, 김재명 등 170여 명이 구속되었고, 일부는 고문치사 당했으며, 사실상 조직이 와해되었습니다. 이 시기 차금봉은 노동자 출신 최초의 당수였습니다.

[간도공산당사건 발생 및 강제 해산]

간도공산당사건이 발생하여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조선공산당은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간도공산당사건이 발생하여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조선공산당은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공산당 탄압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코민테른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 임시 해산]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인해 조선공산당이 임시 해산되었습니다. 이후 박헌영이 재건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이 임시 해산되었고, 이후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테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9

[제5차 공산당 사건 및 재건동맹 조직]

제5차 공산당 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고, 안광천 등이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며 재건의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1929년 6월 제5차 공산당 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안광천 등은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여 당 재건의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1945

[장안파 조선공산당 출범]

해방 직후 이영을 책임 비서로 하는 장안파 조선공산당이 출범하며, 공산당 재건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이영을 책임 비서로 하는 장안파 조선공산당이 출범하였습니다. 이는 조선공산당이 일본의 탄압에서 벗어나 재건되는 첫 움직임 중 하나였습니다.

[재건파 조선공산당 출범]

해방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재건파 조선공산당이 출범하여, 장안파와 함께 공산당 재건의 두 축을 이루었습니다.

1945년 8월 20일 해방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재건파 조선공산당이 출범하였습니다. 이는 장안파와 함께 공산당 재건의 주요 세력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장안파와 재건파 조선공산당 통합]

장안파와 재건파가 최종 통합하여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이는 해방 이후 분열되었던 공산주의 세력의 일시적인 통합을 의미합니다.

1945년 8월 24일 장안파와 재건파가 최종 통합되어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이 통합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조직적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습니다. 이 재건은 소련군정의 승인을 받았으며, 이후 북조선분국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소련군정은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에 의거해 조선공산당을 승인하고 김일성에게 '북조선분국'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김일성, 북조선분국 책임 비서로 선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북한 내 공산당 권력의 핵심 인물이 결정된 중요한 순간입니다.

1945년 12월 17일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이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북한 지역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이 김일성에게 넘어가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46

[찬탁 지지 서울시민대회 개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원래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서울시민대회를 열었으나, 갑자기 찬탁으로 입장을 바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는 대중의 외면을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습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갑자기 찬탁으로 바뀐 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는 조선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이 극단적인 폭력 투쟁 노선과 더불어 인민들에게 외면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선공산당 해산 및 남조선로동당 창당 전신]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전신이 되며 해산했습니다. 이로써 남한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은 새로운 조직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전신이 되었고, 이로써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이는 북조선분국이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는 시기와 맞물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재편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49

[조선로동당 창립]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합쳐져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실권은 소련군정을 등에 업은 빨치산파에 남아 있었습니다.

1949년 6월 30일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은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꿔 합쳐졌습니다. 하지만 실권은 소군정을 등에 업은 빨치산파에 남아 있었으며, 박헌영을 지도자로 한 옛 남로당 인사들은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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