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1955년 대한민국)
정당, 보수주의, 자유주의, 빅텐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28
- 1955년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맞서 반이승만 세력이 결집해 창당된 빅텐트 정당입니다. - 구파와 신파 간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1956년 장면 부통령 당선이라는 전례 없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 4.19 혁명 후 총선에서 압승하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어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를 배출했습니다. -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강제 해산되었고 이후 1963년 부활했으나 1965년 민중당으로 합당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1954
[사사오입 개헌 발생]
이승만 정권의 변칙적인 헌법 개정, 즉 '사사오입 개헌'은 온 국민의 비난을 샀고, 이는 반이승만 세력이 결집하여 민주당을 창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5
[민주당 창당 선포]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민주국민당, 흥사단, 자유당 탈당파 등 다양한 반이승만 세력이 모여 '빅텐트' 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이들은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민주당 발당대회]
민주당의 시작을 알리는 발당대회가 열려, 곽상훈 민의원 부의장이 임시의장을 맡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당의 나아갈 방향을 담은 정강정책이 채택되었고, 당의 미래를 이끌 지도부 선출은 중앙위원회에 위임되었습니다.
[신익희 초대 대표 선출]
민주당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신익희 전 민의원 의장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초대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독재에 맞서는 민주당의 상징적인 리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총 305표 중 신익희가 234표(76.7%)로 대표최고위원 당선. 장면 49표(16.1%), 곽상훈 11표(3.6%), 조병옥 6표(2%), 정일형 1표(0.3%).
1956
[장면 부통령 당선]
비록 대통령 후보는 서거했지만,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당시 집권당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도 당당히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야당 인사가 부통령에 당선된 대한민국 역사상 전례 없는 쾌거였습니다.
이로써 민주당은 이원집정부제 성격의 연립정부 구성원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신익희-장면 대선 후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다가오는 대선을 위해 신익희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장면 최고위원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야권의 강력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신익희 후보 비극적 서거]
제3대 대통령 후보로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신익희 대표가 선거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서거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전국에 큰 충격을 안겨주며, 민주당에게도 헤어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대선 전략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곽상훈 임시대표 선출]
신익희 대표의 서거로 인한 당의 혼란 속에서 곽상훈이 임시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비상 상황에서 당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지도부 체제를 준비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조병옥 새 대표 선출]
서거한 신익희 전 대표의 뒤를 이어 조병옥 최고위원이 민주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당내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당을 재정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총 299표 중 조병옥이 203표(67.9%)로 대표최고위원 당선. 곽상훈 92표(30.8%), 장면 3표(1%), 김도연 1표(0.3%).
[조병옥 대표 재선출]
민주당은 제2차 전당대회에서 대표 선출 방식을 당헌으로 정하며 당의 운영 체계를 강화했습니다.
이와 함께 조병옥 대표가 재선출되어, 당의 안정과 리더십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총 896표 중 조병옥이 531표(59.3%)로 대표최고위원 재선출. 곽상훈 355표(39.6%).
1957
[조병옥 대표 3선 성공]
민주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당의 정책 요강이 채택되고, 조병옥 대표가 압도적인 지지로 세 번째 대표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내 그의 입지가 확고했음을 보여줍니다.
총 891표 중 조병옥이 872표(97.9%)로 대표최고위원 재선출. 곽상훈 11표(1.3%), 장면 4표(0.5%), 민영남 1표(0.1%), 김상돈 1표(0.1%).
1958
[4대 총선 야당 역할 공고화]
민주당은 제4대 총선에서 79석을 확보하며 당시 이승만 정권에 맞서는 주요 야당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는 민주당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핵심 정치 세력임을 입증하는 결과였습니다.
[조병옥 대표 4선 성공]
민주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조병옥 대표가 네 번째로 대표직에 올랐습니다.
이 자리에서 당은 국가보안법 개악 저지와 지방자치법 개정을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며 정권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총 994표 중 조병옥이 960표(96.6%)로 대표최고위원 재선출. 장면 15표(1.5%), 곽상훈 7표(0.7%), 백남훈 1표(0.8%).
1959
[조병옥-장면 정부통령 후보]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조병옥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장면 부통령이 부통령 후보로 최종 지명되었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에 맞설 강력한 야권 대표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총 966표 중 조병옥이 484표(50.1%)로 대통령 후보, 장면이 481표(49.7%)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
[장면, 새 대표최고위원]
정부통령 후보 지명 다음 날,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의 새로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조병옥 후보와 함께 민주당의 1960년 대선 승리를 이끌 핵심 리더십으로 부상했습니다.
총 968표 중 장면이 518표(53.5%)로 대표최고위원 당선. 조병옥 447표(46.2%).
1960
[조병옥 후보 비극적 서거]
제4대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 대표가 선거 직전 갑작스럽게 서거했습니다.
1956년 신익희 후보의 비극에 이은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민주당은 물론 국민들 모두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당선]
민주당 소속 윤보선이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민주당이 마침내 집권에 성공하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15 부정선거 만행]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부정선거로 인해 당선이 무효화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켜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19 혁명으로 정권 퇴진]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민주주의를 외치며 4.19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결국 물러났고, 이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민주화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총선 압승, 제2공화국 여당]
4.19 혁명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라는 영광스러운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구파 탈당, 신민당 창당]
민주당 내부의 오랜 갈등이 심화되면서, 구파 세력이 '일당 독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민주당을 탈당하고 독자적인 '신민당'을 창당했습니다.
이는 제2공화국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심각한 내부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 당 해산]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군사정권은 민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이로써 대한민국 제2공화국과 민주당의 활동은 막을 내렸습니다.
1963
[민주당 독자적 부활]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이 끝나가면서, 과거 민주당 인사들이 다시 모여 당을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초기에는 다른 신당과의 합당을 논의했으나, 지도부 구성 갈등 끝에 결국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재창당을 선언했습니다.
1965
[민정당과 합당, 민중당]
1963년 재창당된 민주당은 당시 야당인 민정당과 합당하여 '민중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출발을 알렸습니다.
이는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야권 세력의 통합 시도를 보여주는 움직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