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대한민국)
정당, 보수 정당, 역사, 극우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8:26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1951년 창당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집권 여당.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강력한 보수 정치를 펼쳤다.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권력 연장을 위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하야와 함께 사실상 몰락했다. 이후 군소 야당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1970년 신민당에 흡수되며 해산되었다.
1951
[이승만, 신당 조직 천명]
이승만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며 자유당 창당의 서막을 알렸다.
이는 다가올 195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였다.
[이승만, 신당 조직 담화]
이승만 대통령이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며 구체적인 창당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대통령 중심의 강력한 집권 여당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시동이었다.
[이범석 귀국 및 창당 위임]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이 귀국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신당 창당의 중책을 맡겼다.
이는 이범석의 강력한 조선민족청년단 조직 기반을 활용하려는 전략적 결정이었다.
[원외 자유당 발당대회]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원외 자유당'이 먼저 창립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친이승만 세력으로, 조선민족청년단과 5대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되었다.
[원내 자유당 발당대회]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원내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로써 두 개의 자유당이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형태로 병존하는 독특한 구조가 형성되었다.
총재로 이승만을 추대했다.
1952
[이승만, 2대 대통령 당선]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는 발췌 개헌을 통해 직선제가 도입된 후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였다.
[함태영, 3대 부통령 당선]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무소속 함태영 목사가 294만여 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공천을 받은 이범석은 낙선했다.
이승만은 이범석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자유당 당원 이갑성, 백성욱, 정기원 등이 동시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자유당 표가 분산되었고, 이범석은 181만 6천표로 2위에 그쳤다.
[원외 자유당 전당대회 개최]
이범석을 부당수로 추대하며 원외 자유당의 조직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연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었다.
[2대 대선 후보 이승만 공천]
대전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을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공천했다.
이승만은 형식적으로 후보 지명을 거부했으나, 이는 민의 동원을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이승만, 대선 출마 공식 수락]
이승만 대통령은 350만 명의 재출마 탄원서가 접수되었다는 명분 아래, 마지못해 대통령 후보 등록을 허락했다.
이는 발췌개헌을 통한 직선제 전환 후 자신의 당선을 위한 연출된 과정이었다.
[당수제 폐지 및 총재 추대]
자유당은 당수제를 폐지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총재로 추대했다.
이는 이승만을 당의 절대적인 리더로 확고히 하는 조치였다.
1953
[족청계 축출 및 임원 개선]
제4차 전당대회에서 '족청계' 세력이 축출되고 당 임원들이 대거 교체되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당내 이범석 계열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측근인 이기붕을 중심으로 당권을 재편하려는 의도였다.
1954
[3대 국회의원 선거 114석 확보]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203석 중 114석을 확보하며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는 발췌 개헌 이후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여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혁신강화와 당면정책 논의]
제5차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혁신 강화와 당면 정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발췌 개헌으로 인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고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시도였다.
1955
[이기붕, 중앙위원회 의장 추대]
제6차 전당대회에서 이승만 총재를 재추대하고, 이기붕 민의원 의장을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하며 그의 당내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로써 이기붕은 이승만 다음가는 당내 2인자로 부상했다.
1956
[이승만, 3대 대통령 당선]
이승만 후보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70.0%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야당 후보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이승만의 당선이 더욱 용이해진 측면도 있었다.
[이기붕, 4대 부통령 낙선]
이기붕 부통령 후보는 44%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자유당은 대통령은 당선시켰으나 부통령은 야당 인물에게 내주는 결과를 맞이했다.
[3대 대선 후보 이승만 공천]
제7차 전당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 민의원 의장을 제4대 부통령 후보로 공천했다.
1957
[당헌 개정 및 임원 개선]
제8차 전당대회에서 당헌 개정과 임원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승만 총재와 이기붕 중앙위원회 의장 체제를 재확인하며 당의 권력 구조를 안정화했다.
1958
[4대 총선 126석 확보]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233석 중 126석을 확보하며 계속해서 원내 다수당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야당 의석도 상당수 확보되어 견제의 목소리가 커졌다.
1959
[4대 대선 이승만 후보 재공천]
제9차 전당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4대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 의장을 제5대 부통령 후보로 다시 공천했다.
이는 1960년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1960
[5대 총선 참패 및 야당화]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는 1공화국 집권 여당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4대 대통령 및 5대 부통령 선거]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내세워 선거를 치렀다.
이 선거는 후에 대규모 부정선거로 드러나며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승만, 총재직 사퇴]
4.19 혁명의 여파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자유당의 강력한 리더십이 사실상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당명 개칭 논의 무산]
임시 전당대회에서 자유당의 당명을 공화당이나 신정당으로 개칭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반대파의 보이콧으로 결국 무산되어 자유당이라는 당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1961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되면서 자유당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는 1공화국 집권 여당의 공식적인 종말을 알렸다.
1963
[6대 총선 당선자 미배출]
재창당 후 치러진 제6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지역구와 전국구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하며 참패했다.
[장택상 총재로 재창당]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 활동이 허용되면서 장택상을 수석최고위원(총재)으로 하여 자유당이 재창당되었다.
이는 옛 자유당 세력의 일부가 명맥을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1964
[장택상 탈당 및 남송학 대표 취임]
장택상이 자유당을 탈당한 후 남송학이 당의 대표로 취임하며 당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자유당은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태였다.
1966
[이재학, 의장 추대]
이재학이 자유당의 의장으로 추대되며 당을 이끌게 되었다.
당은 이 시기에도 군소 야당으로 존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1967
[7대 총선 당선자 미배출]
제7대 총선에서도 자유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며 다시 한번 참패를 기록했다.
당세는 회복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걸었다.
1970
[신민당 흡수합당 및 해산]
자유당은 결국 신민당에 흡수 합당되며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유당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