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정치인, 교수, 사회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5:00:45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자의 길을 걸었으며 유신독재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습니다. 정계 입문 후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최연소) 민선 3기 경기도지사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주요 요직을 거쳤습니다. 다수의 정당에서 대표직을 수행하며 한국 정치의 격동기를 헤쳐온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 서울대 입학 및 시위 주도
- 삼성 사카린 밀수 규탄 시위
- 노동·빈민운동, 결혼, 투옥
- 유신체제하 수배 및 도피
- 부마항쟁 관련 체포 및 석방
-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및 귀국
- 민자당 입당 및 국회의원 당선
- 15대 국회의원 재선
-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
- 16대 국회의원 당선 및 개혁 주장
- 민선 3기 경기도지사 당선
- 한나라당 탈당
- 대통합민주신당 참여 및 대선 경선
-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선출
- 통합민주당 대표직 사임 및 칩거
- 춘천 칩거 종료 및 정계 복귀
- 민주당 대표 선출
- 분당을 보궐선거 당선 (4선)
-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책임 사퇴
- 민주통합당 경선 패배
- 18대 대선 출마 선언
- 수원병 재보선 낙선 및 정계 은퇴
- 정계 복귀 및 더민주 탈당
- 바른미래당 대표 당선
1947
1950
[아버지 교통사고 사망]
4살 되던 해인 1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홀어머니와 형제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1959
1962
[경기고 입학 및 시위 참여]
경기중학교 졸업 후 경기고에 입학했으며, 고등학교 3학년 무렵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 참가했습니다.
1965
[서울대 입학 및 시위 주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1966
[삼성 사카린 밀수 규탄 시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두 번 받았으며, 이후 강원도 함백탄광에서 광부로 일했습니다.
조영래, 김근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69
1972
1973
[노동·빈민운동, 결혼, 투옥]
소설가 황석영과 구로공단 전자회사와 목공장에 위장취업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생활하다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으며, 대학 3학년 때 만난 이윤영과 7년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1975
[유신체제하 수배 및 도피]
1970년대 중반 유신독재의 탄압이 심화되면서 현상금 200만 원, 2계급 특진이 걸린 수배자가 되어 2년 동안 숨어 살며 원주의 사과 과수원, 서울의 철공소 등에서 일했습니다.
1977
1978
1979
[부마항쟁 관련 체포 및 석방]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민주화운동 확산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대책을 논의하던 중 수사당국에 검거되어 김해 보안대에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유신독재체제 붕괴(박정희 사망)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1980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봄, 세계교회협의회(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982
1987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및 귀국]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5공 말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우리의 딸 권양' 보고서 발간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1988
1990
[서강대학교 교수 임용]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사회과학연구소 소장도 맡았습니다.
진보적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1993
[민자당 입당 및 국회의원 당선]
재야 대표 인사로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경기도 광명시에 당선되며 제14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1996
[15대 국회의원 재선]
신한국당 소속으로 제15대 총선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으며, 5월 18일을 국가 기념일로 건의하여 시행되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98
2000
[16대 국회의원 당선 및 개혁 주장]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6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총재 제도 폐지, 상향식 공천제 도입, 당권-대권 분리 등을 주장했고, 이는 여야 모두에서 채택되었습니다.
2002
2007
[대통합민주신당 참여 및 대선 경선]
민주평화계의 대통합을 이루어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했으며,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정동영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습니다.
2008
[18대 총선 패배 및 낙선]
통합민주당을 이끌고 18대 총선에 임했으나 299석 중 81석을 얻는 데 그쳤고, 본인도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낙선했습니다.
[통합민주당 대표직 사임 및 칩거]
18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통합민주당 대표직을 사임한 뒤, 강원도 춘천으로 떠나 칩거하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010
[춘천 칩거 종료 및 정계 복귀]
춘천 칩거를 마치고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며 정계 복귀를 선언했습니다.
[민주당 대표 선출]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상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며 당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2011
[희망대장정 전개]
다시 전국을 돌며 시민들의 건의와 주장을 경청하고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노선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희망대장정을 전개했습니다.
[분당을 보궐선거 당선 (4선)]
제18대 국회의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을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4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책임 사퇴]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운 박영선 의원이 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대표 사퇴를 선언했으나, 하루 만에 철회해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2012
[민주통합당 경선 패배]
민주통합당 국민 참여 경선 결과 문재인에게 패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문재인이 대선에서 패함으로써 정권 교체는 실패했습니다.
2013
[화성갑 보궐선거 불출마]
10·30 경기 화성갑 보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강조하며 국민의 시선에서 욕심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2014
[수원병 재보선 낙선 및 정계 은퇴]
7·30 수원 병 재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 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만덕산 자락에 있는 토굴로 들어가 칩거했습니다.
2016
[정계 복귀 및 더민주 탈당]
오랜 산중 생활을 마치고 제7공화국으로의 개헌을 명분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으며, 최측근 이찬열 의원과 함께 더불어민주당을 전격 탈당했습니다.
2017
[국민주권개혁회의-국민의당 통합]
자신의 정치기반인 국민주권개혁회의와 국민의당의 통합을 선언하며 새로운 정치적 동력을 모색했습니다.
2018
2020
[21대 총선 비례대표 낙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생당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소속 당인 민생당 또한 비례 2.7%, 지역구 0석으로 참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