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사건
정치 스캔들, 미국 역사, 닉슨 행정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52
•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을 뒤흔든 초대형 정치 스캔들. • 닉슨 행정부의 민주당 불법 침입 도청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서 시작. • 결정적 증거 스모킹 건 테이프 공개로 닉슨 대통령 사임. •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 대통령. • 언론의 역할 변화 투명한 정부를 위한 법 제정에 큰 영향. • 미국 민주주의와 권력 남용 감시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사건.
1972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
1972년 6월 17일 새벽, 워터게이트 호텔 경비원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 사무실의 수상한 침입 흔적을 발견하며 거대한 스캔들이 시작됩니다.
현장에서 5명의 남자가 체포되었고, 이들이 대통령 재선위원회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며 백악관은 궁지에 몰리죠.
닉슨 행정부는 단순 '3류 절도'라며 선을 그었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특종 보도와 익명의 제보자 '딥 스로트'의 등장은 사건을 일파만파로 키웁니다.
이는 단순한 절도를 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 스캔들의 서막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버나드 바커가 E. 하워드 헌트의 백악관 연락처를 지니고 체포된 사실, 매코드가 CIA 요원이자 대통령 재선위원회 경비주임이었던 점,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의 심층 보도, 그리고 '딥 스로트'로 알려진 FBI 부국장 마크 펠트의 존재가 이 사건을 단순 절도 이상으로 확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의 조직적인 개입 가능성이 대두되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백악관의 조직적 은폐]
사건 발생 직후, 닉슨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들은 FBI의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CIA를 이용하려 합니다.
이는 녹음 테이프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죠.
대통령 재선위원회 직원들은 '선관공'이라는 특수팀을 만들어 정보 누설을 막고 민주당원과 반전운동가를 상대로 불법 공작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펜타곤 페이퍼' 유출자의 정신과 사무실에 침입하는 등 치밀하고도 광범위한 은폐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1973년 4월 8일, 이 모든 음모가 세상에 들통나면서 닉슨 행정부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닉슨 대통령과 H. R. 홀더먼 수석보좌관이 FBI 수사 저지를 위해 CIA 이용을 논의한 것이 녹음 테이프에 담겼으며, 이는 이후 특별검사에게 제출될 주요 증거가 됩니다. 조지 고든 배틀 리디와 E. 하워드 헌트 등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재선위원회 직원들은 '선관공'(plumber unit)이라는 특별조사팀을 운영하며 정보 누설을 막고 민주당원 및 반전운동가에게 공작을 실행했습니다. 특히 '펜타곤 페이퍼' 유출자인 대니얼 엘스버그의 정신과 사무실 침입 공작이 유명합니다. 찰스 콜슨의 자서전에 따르면, 닉슨파 고위 관리들은 자신들의 엄청난 특권과 닉슨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 지식을 이용해 은폐 계획을 꾸몄으나, 1973년 4월 8일 이들의 음모가 들통나게 됩니다.
1973
[특검 임명과 위원회 출범]
1973년 1월 8일, 워터게이트 침입범들의 재판이 시작되며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피고 중 한 명이었던 제임스 W.
매코드의 폭로로 대통령 재선위원회와 백악관의 연루 사실이 드러나자, 상원은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전방위적인 조사를 시작하죠.
압박을 느낀 닉슨 대통령은 최측근들을 사임시키고,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지명하며 사건의 진실이 서서히 밝혀질 조짐을 보입니다.
대중의 관심 속에 TV로 생중계된 청문회는 닉슨 행정부에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안겼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매코드가 대통령 재선위원회와의 관계를 인정하며 위증했음을 밝힘에 따라, 사건은 단순 절도를 넘어선 더 큰 조사의 필요성을 낳았습니다. 샘 J. 어빈 주니어 상원의원이 설립한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는 백악관 직원을 소환하며 본격적인 진실 규명에 착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닉슨은 그의 가장 유력한 보좌관인 홀더먼과 얼리크먼을 사직시키고,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을 경질했으며,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지명했습니다.
[녹음 테이프와 학살]
1973년 7월 13일,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의 모든 대화가 자동 녹음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합니다.
이른바 '스모킹 건'이 될 수 있는 이 녹음 테이프를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요구하자,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 특권'을 내세워 제출을 거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닉슨의 해임 명령을 거부한 법무장관과 차관이 줄줄이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 일명 '토요일 밤의 학살'이 벌어졌죠.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외쳤지만, 대중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특별위원회 청문회 중 알렉산더 P. 베터필드 대통령 부보좌관이 백악관의 자동 녹음 시스템을 폭로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콕스 특별검사와 상원 조사위원회는 즉시 테이프 제출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했습니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을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고,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명령했으나, 엘리엇 L. 리처드슨 법무장관과 윌리엄 D. 란케르즈하우스 법무차관이 이 명령을 거부하며 연이어 사임했습니다. 결국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 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는 '토요일 밤의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닉슨의 지지율은 급락했으며, 11월 17일 그는 플로리다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 am not a crook.)"라는 유명한 변명 연설을 하게 됩니다.
1974
[탄핵 소추안 가결]
결정적인 증거인 '스모킹 건' 테이프가 공개되기 전부터 닉슨 대통령은 사면초가에 몰립니다.
1974년 3월 1일, 그의 옛 측근 7명이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 방해 혐의로 기소되었고, 대배심은 닉슨을 '기소되지 않은 공모자'로 지목했죠.
하원은 대통령 탄핵 조사를 시작했고, 7월 27일부터 30일까지 사법방해, 권력 남용, 의회 모욕 등 세 가지 탄핵 소추안을 차례로 가결했습니다.
이는 닉슨의 정치적 생명이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1974년 3월 1일, 홀더먼, 얼리크먼, 미셸 등 대통령의 옛 측근 7명이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대배심은 닉슨을 비밀리에 '기소되지 않은 공모자'로 지명하며 그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계속되는 압박 속에 하원은 대통령 탄핵 조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고, 하원사법위원회는 1974년 7월 27일 사법 방해, 7월 29일 권력 남용, 7월 30일 의회에 대한 모욕이라는 세 가지 탄핵 소추안을 연달아 가결시켰습니다. 이로써 닉슨에 대한 상원의 지지 또한 급격히 약해졌으며, 그의 사퇴는 시간문제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대법원 판결과 스모킹 건]
대통령 특권을 내세우며 녹음 테이프 공개를 거부하던 닉슨은 결국 백악관이 임의로 편집한 기록을 제출했지만, 무려 18분 30초 분량의 삭제된 부분이 발견되며 은폐 의혹은 더욱 커집니다.
이 논란은 급기야 미국 대법원까지 올라가고, 1974년 7월 24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닉슨의 '대통령 특권'을 무효화하고 테이프 제출을 명령합니다.
이로써 7월 30일 공개된 테이프, 일명 '스모킹 건'은 닉슨과 홀더먼이 FBI 수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려 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담고 있었고, 닉슨의 사임을 기정사실화 했습니다.
닉슨이 제출한 편집된 녹음 기록에서는 다수의 비속어 삭제와 함께 18분 30초가 삭제된 부분이 발견되어 큰 의혹을 낳았습니다. 백악관은 이를 비서의 실수로 돌렸으나, 언론 보도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테이프 제출 문제는 대법원까지 이어졌고, 1974년 7월 24일, 대법원은 닉슨의 대통령 특권을 무효화하고 특별검사 레온 자보로스키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만장일치로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닉슨은 7월 30일 문제의 테이프를 넘겨주었으며, 이 테이프에는 닉슨과 홀더먼이 국가안전보장을 날조하여 조사를 저지할 계획을 세운 내용이 담겨 있어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 증거는 닉슨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닉슨 대통령 전격 사퇴]
탄핵안 가결이 확실시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스스로 사퇴를 결정하는 초유의 선택을 합니다.
1974년 8월 8일 밤, 그는 국민을 향한 TV 연설을 통해 다음 날 정오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고, 8월 9일,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됩니다.
이후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며 닉슨에게 '특별 사면'을 단행함으로써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하게 해주었지만, 이는 동시에 닉슨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치와 언론의 역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역사를 바꾼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닉슨은 공화당 상원의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에 충분한 표가 있음을 전달받자 사퇴를 결정했습니다. 1974년 8월 8일 밤, 국민을 향한 TV 연설에서 닉슨은 다음 날인 8월 9일 정오에 사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닉슨 사임 후 부통령 제럴드 R. 포드가 대통령으로 승격되었고, 9월 8일 닉슨 대통령의 모든 범죄 가능성에 대해 특별사면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면으로 닉슨은 이후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이는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선거운동 자금 조달법, 정부 고관의 자산 공개 요구 법률, 정보의 자유 법 등 새로운 법률 제정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매스미디어가 정치인의 활동을 정력적으로 보도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는 정치인의 개인 행위까지도 적극적으로 밝히는 계기가 되었고, 조사 보도와 금융 정보에 기반한 스캔들 보도가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