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전쟁, 아프리카 역사, 내전, 국제 분쟁, 정치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8- 13:37:32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라이베리아를 황폐화시킨 비극적인 충돌로, 찰스 테일러의 독재 정권과 이에 맞선 반군 세력 간의 처절한 사투를 담고 있습니다. 시에라리온 내전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인 연합(LURD)과 라이베리아 민주 운동(MODEL)이라는 두 반군 세력이 수도 먼로비아를 포위하며 정점에 달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압박과 평화 유지군의 개입으로 찰스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을 떠나며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수십만 명의 희생자와 난민을 낳으며 서아프리카 역사에 깊은 흉터를 남겼습니다. 본 기록은 전쟁의 서막부터 평화 협정 체결, 그리고 전범 재판에 이르는 긴박한 역사의 흐름을 추적합니다.
1997
[찰스 테일러의 집권]
제1차 내전이 종결된 후 실시된 선거에서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집권은 겉으로는 평화를 가져온 듯 보였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와 주변국 개입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반대 세력의 불만은 수면 아래에서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테일러는 당시 '나를 뽑지 않으면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습니다.
국제 감시단은 선거 과정의 투명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나 지역 안정을 위해 결과를 수용했습니다.
이후 테일러 정권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며 새로운 분쟁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1999
[반군의 첫 습격]
기니를 거점으로 하는 무장 세력이 라이베리아 북부 보인자마를 습격하며 제2차 내전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정부군은 즉각 대응에 나섰으나 반군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하며 국경 지대의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민간인들은 갑작스러운 전투를 피해 인근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습격자들은 테일러 정권에 반대하는 라이베리아 망명자들로 구성된 초기 반군 세력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습격을 넘어 조직적인 무장 투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정부군은 반군의 배후로 기니 정부를 지목하며 국가 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었습니다.
[로파주의 긴장 고조]
전략적 요충지인 로파주에서 정부군과 반군 간의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었습니다. 반군은 점 점 더 조직화된 모습으로 정부의 기반 시설을 타격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중앙 정부의 행정력은 북부 국경 지대에서 사실상 마비되었습니다.
로파주는 라이베리아의 주요 농업 및 자원 지대로서 전쟁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반군은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보급망을 구축했습니다.
테일러 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으나 지형적 한계와 내부 부패로 인해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2000
[LURD 반군 결성]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인 연합(LURD)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어 체계적인 반정부 투쟁을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찰스 테일러의 하야를 유일한 목표로 삼고 군사 행동을 본격화했습니다. 기니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LURD는 막강한 화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LURD는 전직 라이베리아 해방 연합(ULIMO)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반테일러 분파들이 통합된 조직입니다.
세쿠 코네가 의장직을 맡아 정치적, 군사적 지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테일러 정권에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이 되었으며 전쟁의 규모를 비약적으로 키웠습니다.
[기니 국경 분쟁 심화]
라이베리아 정부군이 반군의 기지를 타격한다는 명분으로 기니 국경을 침범하며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기니 또한 이에 맞대응하며 양국 간의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내전이 서아프리카 지역 전체의 안보 위기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테일러 정부는 기니가 LURD를 지원하고 있다며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기니 군은 라이베리아 접경 지역의 민간인 거주지에 포격을 가하며 보복 조치를 취했습니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지역 안정을 위해 중재에 나섰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2001
[유엔의 제재 결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테일러 정권의 무기 거래와 다이아몬드 밀수 혐의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시에라리온 내전 반군을 지원한 대가로 정권의 자금줄을 차단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라이베리아는 국제 사회에서 더욱 고립되며 경제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안보리 결의 제1343호는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 수입 금지와 고위 관료의 여행 금지를 포함합니다.
이른바 '피의 다이아몬드'가 내전의 자금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었습니다.
테일러 정권은 이 제재로 인해 군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군사적 우위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2002
[국가 비상사태 선포]
LURD 반군이 수도 먼로비아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테일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정부는 민간인의 이동을 제한하고 강제 징집을 확대하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도시 전체에 공포와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비상사태 하에서 정부군은 반대파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인권 유린을 자행했습니다.
먼로비아의 물가는 치솟았고 필수 생필품 공급이 끊기면서 민생고가 극에 달했습니다.
반군은 라디오를 통해 테일러의 항복을 요구하며 심리전 강도를 높였습니다.
[아싱턴의 함락]
반군이 수도 인근의 전략적 거점인 아싱턴을 점령하며 정부군의 방어망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는 테일러의 고향이자 정치적 상징성이 큰 지역을 잃은 것으로 정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정부군의 탈영병이 늘어나며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반군은 정교한 매복 작전을 통해 정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기습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아싱턴 점령은 반군이 언제든 수도를 직접 공격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위협을 입증했습니다.
국제 구호 단체들은 전면적인 도심 전투가 임박했음을 경고하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그바릉가 쟁탈전]
라이베리아 제2의 도시인 그바릉가를 두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도시의 주인은 수차례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서 도시 인프라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정글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바릉가는 과거 찰스 테일러의 내전 당시 본거지였기에 양측 모두에게 자부심과 전략적 가치가 컸습니다.
정부군은 공군력을 이용해 반군 점령지를 폭격했으나 민간인 피해만 가중시켰습니다.
양측의 무자비한 교전은 국제 인권 단체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2003
[MODEL 반군의 등장]
남부 지역에서 라이베리아 민주 운동(MODEL)이라는 새로운 반군 그룹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코트디부아르의 지원을 받으며 남동부 항구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테일러 정권은 북부와 남부 양면에서 공격을 받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MODEL은 주로 윌리엄 도 전 대통령의 부족 출신들로 구성되어 테일러에 대한 강한 복수심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주요 수출입 항구를 장악함으로써 정부의 마지막 재원 확보 경로를 차단했습니다.
내전은 이제 LURD, MODEL, 정부군의 3자 구도로 재편되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국토의 60% 상실]
반군의 파상공세로 정부군이 라이베리아 영토의 절반 이상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습니다. 테일러 대통령은 수도 먼로비아만을 간신히 수비하며 국제 사회의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반군은 테일러의 퇴진 없이는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주요 도로와 통신망이 반군의 수중에 떨어져 정부의 행정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지방 관리들은 반군에 투항하거나 도주했으며 무정부 상태가 확산되었습니다.
테일러는 해외 용병을 고용하려 시도했으나 자금 부족과 제재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찰스 테일러 전범 기소]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이 찰스 테일러를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전격 기소했습니다. 아크라에서 평화 회담이 시작되던 당일 발표된 이 소식은 테일러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는 더 이상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통치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기소장은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학살을 배후 조종했음을 명시했습니다.
가나 당국은 체포 영장을 집행하지 않았으나 테일러의 외교적 운신의 폭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라이베리아 내전 해결을 위한 국제적 압박의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아크라 평화 회담 개최]
라이베리아 정부와 반군 대표단이 평화 협상을 위해 가나의 아크라에 모였습니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강력한 압박 속에 시작된 이 회담은 전쟁 종식을 위한 마지막 희망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전투 소식이 협상장에 전해지며 회담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ECOWAS와 아프리카 연합(AU)이 공동으로 주관하여 모든 분쟁 당사자를 테이블로 불러들였습니다.
반군은 테일러의 즉각적인 사임을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국제 사회는 라이베리아의 과도 정부 수립과 민주적 선거 실시를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먼로비아 공방전 시작]
LURD 반군이 수도 먼로비아 외곽을 돌파하며 본격적인 도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이 공포의 기간을 '제1차 세계대전'이라 부르며 지하실과 교회로 숨어들었습니다. 정부군은 대통령궁을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반군은 중화기를 동원해 도심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며 정부군의 투항을 종용했습니다.
전기와 수도 공급이 중단되었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학교와 경기장에 수용되었습니다.
시가전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며 도시는 거대한 묘지로 변했습니다.
[첫 휴전 협정 체결]
아크라에서 협상 중이던 양측이 전격적인 휴전에 합의하며 먼로비아의 총성이 잠시 멎었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평화를 기원했으나 긴장감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국제 사회는 이 휴전이 정식 평화 협정으로 이어지기를 고대했습니다.
휴전 합의문에는 테일러의 퇴진과 과도 정부 수립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군 지휘관들 간의 소통 부재와 불신으로 인해 현장에서는 위반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이 휴전은 전쟁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너무나도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휴전 파기와 재교전]
휴전 협정 체결 일주일 만에 반군이 다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며 먼로비아는 다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반군은 항구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구호 물품의 유입이 차단되면서 수도의 기아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반군은 정부군이 먼저 휴전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항구와 주요 교량을 점령했습니다.
테일러 대통령은 결사 항전을 선언하며 어린 소년들까지 무장시켜 전선으로 내몰았습니다.
먼로비아의 도심은 포격과 약탈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중앙 먼로비아 침투]
반군 부대가 수도의 핵심 지역인 중앙 비즈니스 지구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부군은 주요 교량을 파괴하며 저항했으나 반군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시내 곳곳에서 근접 총격전이 벌어지며 민간인들은 극한의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반군은 항구에 쌓여있던 식량 창고를 장악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미국 대사관 주변에는 피난처를 찾는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몰려들어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의약품 부족으로 인한 전염병 확산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격렬한 박격포 공격]
반군이 먼로비아 도심을 향해 수백 발의 박격포탄을 발사하며 최후의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 기록된 이 시기는 내전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기간 중 하나였습니다. 국제 사회는 즉각적인 중단과 인도적 통로 확보를 요구했습니다.
포탄은 병원, 대사관, 주거 지역을 가리지 않고 떨어져 아비규환의 현장을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은 죽은 가족의 시신을 미국 대사관 앞에 쌓아두며 국제 사회의 개입을 촉구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상황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어 전 지구적인 공분을 샀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 준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라이베리아 인근 해상에 미군 군함을 배치하고 개입을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라이베리아와 역사적 유대 관계가 깊은 미국의 움직임은 테일러 정권에 강한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반군 세력은 미국의 개입을 환영하며 공세를 잠시 늦췄습니다.
미국은 직접적인 전투 참여보다는 평화 유지군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해병대원들이 대사관 방어와 주요 시설 보호를 위해 먼로비아 시내로 전개되었습니다.
미군의 등장은 전쟁의 균형을 깨고 평화 협상을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심리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 승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라이베리아에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ECOWAS를 중심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즉시 배치되어 분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전쟁터에 국제법의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였습니다.
안보리 결의 제1497호는 무력 사용 권한을 포함하여 민간인 보호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나이지리아 군을 주축으로 한 ECOMIL 병력이 라이베리아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결정은 반군과 정부군 모두에게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강력한 경고가 되었습니다.
[ECOMIL 병력 상륙]
나이지리아 출신의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IL)이 먼로비아 공항에 상륙하여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절망에 빠졌던 시민들은 이들을 영웅으로 환영하며 평화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습니다. 평화유지군은 즉시 주요 교차로와 전략 지점에 배치되었습니다.
상륙 직후 평화유지군은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완충 지대를 설정했습니다.
초기 병력은 수천 명 규모였으나 점차 확대되어 전국적인 치안 회복에 나섰습니다.
미군은 공중 지원과 물자 보급을 담당하며 ECOMIL의 안정적인 정착을 도왔습니다.
[테일러의 사임 발표]
국제 사회의 끈질긴 압박과 군사적 위기 속에 찰스 테일러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라이베리아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나이지리아의 망명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이는 찰스 테일러 정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발표였습니다.
테일러는 마지막 연설에서 국제 사회를 비난하며 자신을 희생양으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사임은 평화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그에게 안전한 망명처를 제공하되 정치 활동을 중단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나이지리아로의 망명]
찰스 테일러가 부통령 모제스 블라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나이지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가 라이베리아 땅을 떠나자 먼로비아 시내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수년간 이어진 그의 지배가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 아프리카 국가 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이양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테일러는 나이지리아 칼라바르의 은신처로 이동하여 국제 법정의 추적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의 출국은 라이베리아가 전쟁의 어둠에서 벗어나 재건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먼로비아 포위 해제]
찰스 테일러의 출국 이후 반군 LURD가 먼로비아 항구 지역의 통제권을 평화유지군에게 넘겼습니다. 수개월간 이어진 수도 포위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으며 식량과 의약품이 도심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오랜만에 굶주림과 포격의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반군 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도심 밖으로 철수하며 휴전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항구를 통해 들어온 대량의 구호 물자가 배급되어 아사 직전의 시민들을 구제했습니다.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던 시신들이 수습되고 방역 작업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포괄적 평화 협정(CPA)]
라이베리아 정부, LURD, MODEL, 그리고 각 정당 대표들이 아크라에서 포괄적 평화 협정에 최종 서명했습니다. 이 협정은 2년간의 과도 정부 운영과 민주적 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협정은 반군 세력의 무장 해제와 군대 통합 과정을 명시했습니다.
모든 당사자가 참여하는 거국 일치 내각을 구성하여 국정 공백을 메우기로 했습니다.
국제 사회는 이 협정이 라이베리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보장하기를 강력히 지원했습니다.
[유엔 라이베리아 임무단(UNMIL)]
유엔 안보리가 라이베리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대규모 평화유지군인 UNMIL의 창설을 승인했습니다. 기존 ECOMIL의 임무를 승계하여 전국적인 무장 해제와 치안 안정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라이베리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지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보리 결의 제1509호에 따라 최대 1만 5천 명의 병력과 민간 경찰이 배치되었습니다.
UNMIL은 선거 준비 지원, 인권 보호, 법치 회복 등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반군 분파들이 다시 무기를 들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억지력이 되었습니다.
[국가 과도 정부(NTGL) 출범]
사업가 출신의 주드 브라이언트가 수장을 맡은 라이베리아 국가 과도 정부가 공식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중립적인 성향의 브라이언트는 분열된 정파들을 화합시키고 전후 복구를 지휘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라이베리아는 새로운 민주 국가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과도 정부는 반군 대표들을 내각에 포함시켜 정치적 갈등을 내부적으로 흡수하려 노력했습니다.
주요 임무는 무장 해제 완료, 난민 귀환 지원, 그리고 공정한 대통령 선거 준비였습니다.
비록 부정부패와 행정력 부족의 문제가 있었으나 전쟁을 멈추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2004
[본격적인 무장 해제 실시]
UNMIL의 주도하에 수만 명의 반군 전사들에 대한 무장 해제 및 사회 복귀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무기를 반납하는 전사들에게는 현금 보상과 직업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전쟁의 도구였던 총기들이 대량으로 수거되어 폐기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보상금 문제로 소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점차 안정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소년병들의 사회 복귀와 심리 치료가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라이베리아 내에는 다시는 조직적인 반군 활동이 불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2005
[여성 대통령 탄생]
내전 후 실시된 첫 민주적 선거에서 엘렌 존슨 설리프가 승리하여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그녀의 당선은 라이베리아의 새로운 도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국제 사회는 설리프 정부의 재건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축구 스타 조지 웨아와의 치열한 경합 끝에 지적인 지도력과 행정 경험을 인정받아 당선되었습니다.
설리프는 국가 부채 탕감과 인프라 복구, 부패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집권은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라이베리아를 국제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복귀시켰습니다.
2006
[찰스 테일러 체포]
나이지리아에 망명 중이던 찰스 테일러가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다 체포되어 라이베리아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해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긴 법적 투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테일러는 나이지리아 정부의 추방 결정이 내려지자 현금을 들고 카메룬 국경으로 도주했으나 검문소에서 붙잡혔습니다.
그의 체포는 라이베리아 내에 남아있던 테일러 지지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재판은 시에라리온이 아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진행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2012
[역사적인 유죄 판결]
헤이그 국제법정이 찰스 테일러에게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현대사에서 국가 수반이 국제 법정에 의해 처벌받은 드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총 11개의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5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법정은 테일러가 반군 RUF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다이아몬드를 챙겼음을 확정했습니다.
판결문은 그가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진 끔찍한 잔학 행위를 방조하고 지원했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 판결은 전 세계 독재자들에게 '반인도적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2018
[UNMIL 임무 공식 종료]
라이베리아에서 15년간 평화 유지 임무를 수행해 온 UNMIL이 공식적으로 활동을 마쳤습니다. 라이베리아 정부군과 경찰이 전국적인 치안권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라이베리아는 이제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국가가 되었음을 입증했습니다.
철수 기념식에서 라이베리아 정부는 국제 사회의 헌신에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UNMIL은 라이베리아가 전쟁의 폐허에서 안정적인 민주 국가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후 라이베리아는 민주적인 정권 교체를 이어가며 평화로운 발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