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고대사, 그리스, 도시국가 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32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대 그리스를 뒤흔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전쟁입니다. - 아테네의 해양 제국 야심과 스파르타의 육상 패권 다툼으로 촉발. - 27년간의 긴 전쟁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황금기를 끝내고 피폐화. - 아테네는 민주정이 변질되고 스파르타 중심의 질서가 재편되며 그리스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꿈. - 전쟁의 잔혹성과 전면전 양상이 두드러져 고대 그리스 사회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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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의 씨앗, 에피담노스]
그리스 변방 도시 에피담노스에서 민중파와 귀족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습니다.
민중파가 귀족을 추방하자 귀족은 비그리스인 세력과 연대하여 반격했습니다.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과거 식민지였던 코르키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델포이 신탁의 명분을 내세워 코린토스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와의 오랜 갈등 속에서 이를 수용, 군대를 파견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에피담노스는 코르키라의 식민지였으나 건설자가 코린토스인이었고, 코린토스인 정착민도 있어 코린토스 역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내부 분쟁이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이어지며 대규모 충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코린토스-케르키라 격돌]
에피담노스 문제로 코린토스와 케르키라가 협상에 실패하며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과 2천 명의 중무장보병을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케르키라는 80척의 선단으로 맞섰습니다.
악티온 곶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케르키라가 15척의 코린토스 선박을 파괴하며 승리했고, 제해권을 장악하여 코린토스의 동맹 도시까지 공격했습니다.
케르키라는 승리를 기념하여 레우킴메 곶에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이후 코린토스가 대규모 전쟁 준비에 나서자, 동맹국이 없던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아테네, 전쟁에 발 담그다]
코린토스와의 갈등 심화로 케르키라가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하자, 코린토스도 아테네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테네는 두 번의 민회 끝에 케르키라가 침공당할 시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체결하고, 초기 10척의 함대를 파견하며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갈등에 발을 담그게 됩니다.
아테네의 이러한 결정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특히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세력 충돌, 대규모 해전]
코린토스와 동맹국들이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케르키라 앞바다에 파견하자, 케르키라도 140척의 함대로 맞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코린토스 연합군이 70척의 함대를 파괴하며 우위에 섰을 때, 아테네의 증원 함대 10척이 갑작스럽게 개입했습니다.
이 예상치 못한 개입에 코린토스는 후퇴하며 승패가 정해지지 않은 채 해전이 끝났습니다.
아테네는 조건부 동맹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전투에 적극 개입하며 코린토스를 자극했습니다. 이 해전은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긴장을 극도로 끌어올렸으며, 전면전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거대한 전쟁의 서막]
마침내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전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아티케를 선제공격하며 육상전의 우위를 노렸고,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해 펠로폰네소스반도 해안을 습격하며 맞섰습니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역사의 황금기를 끝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불리는 첫 단계로, 10년간 대치하며 이어졌습니다. 아테네는 해군 강국이었지만, 전쟁 초기 예상치 못한 태풍과 해일 등 자연재해로 해군력이 큰 피해를 입어 전력이 약화되기도 했습니다.
[10년 전쟁의 일시적 휴전]
10년간 승패 없이 지속되던 전쟁은 양측의 소모전 끝에 일시적인 평화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아테네의 소모된 국력과 델로스 동맹 내부의 분열 조짐으로 아테네가 먼저 휴전을 제안했고, 양측은 니키아스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전쟁의 첫 단계인 '아르키다모스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지만, 근본적인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델로스 동맹 내부의 이탈 우려는 아테네가 휴전을 서두른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대규모 원정, 시칠리아로!]
니키아스 평화조약의 효력이 약해지고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충돌이 발생하자, 아테네는 전세 역전을 위해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 공격을 목표로 거대한 원정대를 파견했습니다.
이는 아테네의 해상 패권을 재확인하고 서부 지중해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찬 시도였습니다.
아테네의 이 원정은 전례 없는 규모였지만, 먼 거리와 강력한 적에 대한 오판, 그리고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아테네 운명을 바꾼 배신]
스파르타의 반격을 막기 위해 새로운 아테네군 지도자로 추천되었던 알키비아데스가 돌연 스파르타로 망명했습니다.
자신의 정적들에 의한 사소한 고발과 모함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자, 그는 아테네의 군사 정보를 모두 스파르타에 넘겨버리는 충격적인 배신을 감행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망명은 아테네의 군사 계획을 완전히 노출시켰고, 이후 전쟁의 흐름을 스파르타에 유리하게 돌려놓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시켈리아 원정대의 패배와 아테네의 최종 패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칠리아의 악몽, 전멸]
기원전 415년에 시작된 시켈리아 원정은 결국 대참사로 막을 내렸습니다.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은 시라쿠사이의 강력한 저항과 아테네 내부의 문제,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으로 인한 정보 유출 등으로 아테네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습니다.
이 패배는 아테네의 국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전쟁의 마지막 단계인 '데켈레이아 전쟁' 또는 '이오니아 전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이 재앙적인 실패로 인해 제해권을 상실하고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 함대 최후의 전투]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에게해와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을 지원하며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던 중,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완전히 궤멸되었습니다.
이 해전은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으며 사실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주도권을 확고히 했고, 아테네는 해상 패권을 상실하며 완전히 무력화되었습니다. 다음 해 아테네의 항복으로 27년간의 긴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아테네의 몰락과 굴욕]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함대가 궤멸된 다음 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항복했습니다.
스파르타는 항복 조건으로 아테네 도시의 모든 성벽을 파괴하도록 강요했으며, 아테네는 이로 인해 완전히 유린당하고 전쟁 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했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며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지형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켰습니다.
[아테네, 공포 정치와 부활]
전쟁 패배 후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의 지지 아래 과두파 정권인 '삼십인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들은 공포정치를 펼치며 대규모 숙청을 지휘했으나, 불과 9개월 만에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공화정 파 세력에 의해 타도되고 아테네 민주정이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로 아테네 민주정이 일시적으로 붕괴하는 혼란을 겪었으나, 시민들의 노력으로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의 비극적 최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된 알키비아데스와 삼십인 정권 지도자 크리티아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공화정 복원 후 아리스토파네스 등에 의해 탄핵당했습니다.
공개 재판 끝에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네 사회와 지성계에 미친 깊은 상처와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쟁의 책임과 패배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합리한 재판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페르시아 내전과 그리스 용병]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크세르크세스 2세와 작은 키루스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쿠나크사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그리스 용병대 지휘관 크세노폰은 그의 유명한 저서 《아나바시스》를 남겼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그리스 전역에 만연한 빈곤은 많은 그리스인들이 용병으로 해외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그리스 사회 변화상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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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황혼, 마케도니아의 부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오랫동안 소모적 내전 상태에 빠져 약화된 틈을 타, 북방의 신흥 강국 마케도니아 왕국이 힘을 키웠습니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테네-테바이 연합군을 대파하며, 마침내 그리스 세계 전체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전투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이후 헬레니즘 시대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초래한 그리스의 쇠퇴가 궁극적으로 외부 세력의 지배를 가져온 최종적인 결과였습니다.